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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마나 힘드셨을까?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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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눅22:39-46
제목: 얼마나 힘드셨을까

  지금 미국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 (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큰 흥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멜 깁슨이 제작하고 감독한 이 영화는 제작 당시부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입니다. 개봉 첫날 3000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려 제작비를 하루만에 뛰어넘더니 단숨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최후의 12시간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객들은 영화에 빠져들기가 무섭게 피와 살점으로 범벅되는 잔혹하고도 사실적인 영상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지난 22일에 온누리 교회에서 한국상영을 앞두고 시사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도 역시 예수님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목도하며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로마 병사가 쇳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예수님의 등과 이마, 배 등을 때리는 장면에서 객석 곳곳에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목의 부드러운 살에 쇠못이 박혀 들어갈 때에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고 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 사람들의 표정에는 ‘정말 그렇게까지 고통을 당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제 4월초에 한국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이 영화가 한국사람들에게, 특히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꼭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수난, 고통, 죽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과 제자들, 베드로와 특히 가룟유다의 배반을 통해 배신의 아픔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당하신 또 다른 고난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세족식과 성만찬을 하시고 주님은 여느 때와 같이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셨습니다. 평상시 즐겨 찾으시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44절에 보면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당시 기도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애타게 기도하셨는지,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면서 예수님은 간절히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주님이 몹시 괴로워하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말 어느 때보다도 예수님이 힘들어하는 것을 느낍니다. 일찍이 이렇게 고민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록한 다른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당시의 심정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몹시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고통스러워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에 이어 얼마나 괴롭고 힘드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예수님을 힘들고 괴롭게 한 것이었을까요? 과연 이처럼 간절히 기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육체의 아픔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체가 당하는 아픔이 있을 때 속에서 눈물나도록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종종 봅니다. 아픈 육체의 통증을 가슴에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울 기력도 없이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특히 암으로 죽어 가는 어떤 장로님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약을 먹지 않고 앉아서 찬송을 부르다가 배를 움켜쥐고 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고 괴로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아픔은 정말 참기 힘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그 고통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가 그 고통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주님의 아픔은 육체를 뛰어넘습니다. 그렇게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밤이 무섭고, 혼자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밤에 혼자 있으면 아이들이 가장 놀라는 것을 봅니다. 또 뭔가 위험한 일이 엄습해 올 때 직감적으로 갖는 공포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바로 그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갖는 두려움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죽음이 엄습해 올 때, 가까이 올 때, 처음에는 그것을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작년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배웠습니다만 죽음이 다가오면 처음에는 거부합니다. 왜 내가 죽는가에 대한 원망과 불평도 생깁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체념하고 받아드리는 단계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동일합니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의 인간입니다.

  지난 주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본질적인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느냐 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다면 모든 사람이 다 스스로 죽을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있고, 힘들고 괴로움이 많은 세상인데 죽으면 끝난다고 믿으면 다 죽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지 않습니다. 물론 요즘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긴 하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오래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죽겠다고 해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의 ‘죽’자만 나와도 소름이 끼치고, 말을 막습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본질적으로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이 고민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 이것 때문에 주님이 땀방울이 핏방울 되기까지 기도하셨을까요? 그러나 역시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자기정체성을 확립하신 분이십니다.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을 아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죽음도 아셨지만, 부활도 아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미 알고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과 공포는 죄 때문에 오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이 잔을 옮겨달라고 애원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체의 아픔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신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사람도 명확한 대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당하신 영적 고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고통이란 곧 분리의 아픔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떨어지고, 멀어지고, 분리되는 아픔 때문에 주님의 힘들어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아니 지금이후 영원토록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번도 분리되거나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연결되고, 예수님이 성령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처럼 삼위의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영광과 능력과 권능과 성품에 있어서 동일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딱 한번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입니다. 십자가는 분리의 상징입니다. 죄와 거룩이 분리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대표로 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하기 위해 거룩하신 주님은 죄인으로 하나님께 선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도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셔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괴롭고 아프시지만 그 순간은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분리의 고통을 통과한 은혜입니다. 바로 그 분리 때문에 예수님이 괴로워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이 왜 그토록 힘들어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주님을 힘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과 하나님이, 주님과 내가 분리되어 힘들어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이 결혼하여 평생을 살 듯이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그런데 함께 하다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나와 하나님을 분리시키는 것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이사야 5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먹구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고, 죄는 어두움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생기면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죄를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해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 언제나 수요일입니다. 역사적으로 그 날을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회개할 때 머리에 재를 뿌리던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겠다고, 하나님과 다시는 분리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 신앙이 필요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몸부림치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도록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바르고 참된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사순절에 할 일입니다.

  또한 이제 좀더 하나님과 가까이, 주님과 가까이, 십자가에 좀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십자가의 현장에서 실패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엄청난 실패에는 많은 원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고, 너무 자만하고 교만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54절에서 알려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입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간 것, 그것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 ‘멀찍이’라는 말은 아주 애매 모호한 위치입니다. 상황에 따라 가까이 갈 수도 있고, 여차하면 도망갈 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베드로는 두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순간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가 의도한 대로 뭔가 큰 일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달려가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혹 예수님이 이대로 끝나면 줄행랑을 칠 준비까지 하면서 따라간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밀착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경호원처럼 가장 가까이 예수님과 붙어 다닌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접근하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통제했고, 예수님이 뭔가 기적을 행하실 때에 다른 제자는 몰라도 베드로만큼은 가까운 현장에서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수제자로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갑니다. 결국 그러다가 그는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서있는 위치는 예수님과 얼만큼 떨어져 있습니까? 멀찍이 따라갑니까, 아니면 밀착해서 가고 있습니까? 교회도 좋고 세상도 좋은 위치는 아닙니까? 덥지도 차지도 않는 신앙은 아닙니까? 교회는 나오지만 마당만 밟고 가지는 않습니까? 한발은 세상에 한발은 하나님에게 걸쳐 있지는 않습니까? 두마음이 언제나 문제요, 적당하게 두는 거리가 주님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그렇게 주님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멀찍이는 주님과 내가 분리되는 거리입니다. 그렇게 따라갈 때 언제나 주님과 나 사이로 수많은 유혹들이 자리 잡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주님을 힘들게 한 것은 분리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을 힘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죄를 회개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야 합니다. 사순절에 더욱 주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헌신하면서, 이번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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