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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교회 ⑤ / 골 1: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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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좋은 교회 ⑤
성경본문 골로새서 1: 24-29

설교내용

  사도 바울이 가르친 교회론에 근거하면 좋은 교회는 세 가지를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모두가 말씀의 은총을 누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좋은 교회는 24, 25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것은 사도 바울의 교회론에 중요한 요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온 것은 세상의 것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왔습니다. 그 말씀을 영적으로 먹고자 왔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기관이고, 그 목적을 성취할 때 좋은 교회가 됩니다.

  말씀을 이루는 교회

  말씀을 이룬다는 말에는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첫째, 말씀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이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이고, 이 말씀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이 말씀을 이루어 가는 것이 교회의 건설과 교회의 유지목적이 됩니다.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말씀입니다.

  요즘 역에 가면 4월 1일부터 개통되는 고속전철에 대한 홍보를 많이 듣게 됩니다. 제가 최근 열차를 여러 번 탔는데 홍보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안전성입니다. 고속철도는 안전하다. 또 하나는 경제성입니다. 고속전철은 국가경제에 큰 공헌을 합니다. 또 하나는 유용성입니다. 이제 1일 생활권 개념이 아니라 천안, 대전, 대구 이러한 도시를 서울 근교에 있는 동네처럼 그렇게 인식될 만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안전성, 경제성, 유용성을 가지고 홍보합니다. 설계를 잘 했고, 이러한 효력이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도로든지, 건물이든지 그 기초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룬다는 여기에 교회론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이루는 것입니다. ‘이룬다’는 것에는 인간의 수고가 따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이 육체에 채우는 고난’이 말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룬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동반하는 개념입니다. 말씀을 이루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할 때 이 말씀이 우리로 인하여 성취되어지고 순종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우리가 살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신학적 강조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학의 절대적인 진리가 두 가지로 집합됩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협이 없는 절대 진리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강요합니다. 왜냐하면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 외에는 구원이 없음으로 바울은 절대 진리로 강조합니다. 또 하나는 교회론적인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믿는 우리는 그 몸에 속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에 대하여 바울은 절대 진리로 강조합니다.

  이단들은 바로 두 가지 진리에 대하여 어느 한쪽이라도 손상을 입히면서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독론, 교회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단이 될 여지가 없습니다. 이단은 두 가지 진리 안에 틈을 만들어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단 교회는 교회론이 언제나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단 교회는 구원론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교회의 기초요, 말씀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구원,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신뢰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이 진리는 가감이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진리요, 그대로 절대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남성들은 경험을 많이 합니다. 이발소에 가면 면도를 합니다. 면도할 때 보면 눈을 말똥 말똥 뜨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자면서 면도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시간이 잠잘 시간이 아닙니다. 면도칼이 잘못되면 단순히 부상 입는 정도가 아닙니다. 끝나 버립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맡겨 놓고 졸고 있습니까? 면도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에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믿음이 그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에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믿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을 내가 믿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결과에는 과정이 있고,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수고가 따르는 것이 있을 때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은 불행의 동의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사회적인, 교계적인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불신입니다. 이 불신의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부자 아버지가 죽으면서 늦둥이 8살의 아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이 재산을 지켜야 한다. 너를 가까이 하는 사람, 너를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 모두 도둑이야. 경계하고 재산을 잘 지켜라”고 유언하고 죽었습니다. 아들이 자라면서 재산을 지키고 큰 부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인생은 너무나 불행해졌습니다. 부인, 자녀, 친척, 친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행한 사람으로 끝났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불행의 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는다는 것에는 우리가 말씀을 이루는 결과를 가지고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믿고 영광돌림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이 무엇입니까? 26절에 보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말미암아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말씀이 무엇인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밀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예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비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로 믿어졌습니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드러난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 비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성도의 그리스도로만 끝나는 비밀이 아닙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 비밀입니다. 이방인에게도 이 비밀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이방인에게 이 비밀을 알리는 역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각자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를 드릴 줄 모르는 예배당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말씀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이 말씀의 이룸이라는 것은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대목에 있어서 앞으로 전력을 투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시면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알려진 비밀이면서도 이방인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는 비밀입니다.

  28절의 말씀은 더 발전적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이라고 했습니다. 전파하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은 전도입니다. 권하는 것은 교제입니다. 가르침은 교육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도들이 서로 권하고 교제하는 것과 그리고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도, 교제, 교육의 사역이 교회의 주무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각 사람이 완전한 자로 세워짐

  여기 각 사람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습니다. 각 사람이라는 개념은 구원론과 심판론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각 사람을 주목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을 주목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심판의 약속에도 보면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한 사람도 예외 없습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구원의 역사도 각 사람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적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의 개념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전도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져가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좋은 교회의 조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우리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이 말씀을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각 사람이라는 것에는 각자의 책임론이 따릅니다.

  우리나라는 운동하는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건강을 위해서 각자 운동을 할 줄 압니다. 운동을 해보면 잘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골프치는 사람들도 어떤 때는 잘 되고 어떤 때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다가 잘못되면 온갖 핑계가 많습니다. 볼링을 쳐서 점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공이 좋지 않다” “레인이 맞지 않다”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 안에 있습니다. 날씨 탓도 아니고, 유니폼 탓도 아닙니다. 본인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이 잘 되지 않을 때 자기 탓은 하지 않고 여건을 탓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사고는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고 합니다. 선진국과 평균 비교해 보면 사망률이 8:1입니다. 아직도 극복할 과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고 나면 핑계가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집계를 한 통계를 보니 대형사고 가운데 70, 80%가 운전자의 음주 상태, 환각제를 먹고 있는 상태에서 대형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의 주범은 운전자입니다. 도로 사정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세우는 것은 모든 방면에 다 적용된다고 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이것이 교회 목적입니다. 좋은 교회는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몫을 할 줄 아는 교회로 세워져 가야합니다. 내가 바로 완전한 자로 세워진 자리에서 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지 않고 있다면 나로 인하여 내가 다니는 교회가 좋지 않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론에 있어서 하나님은 각 사람이라는 각론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한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져 가야합니다.

  그런데 완전한 자라는 개념은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완전하다는 말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받아야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우리는 완전한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의 삶을 말합니다. 상태가 아니라 삶입니다.
  금덩어리는 그대로 진열장에 두어도 가치가 있습니다. 금덩어리 보고 일을 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은혜 받은 상태, 기도하는 상태, 내가 예수 믿고 있다는 상태로 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말씀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삶이 헌신되고 우리의 삶이 거기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그 모습을 두고 완전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 이루어져 감

  그러므로 말씀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진다는 것도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말씀이 이방인 가운데 믿는 역사로 드러나는 것, 복음의 비밀이 이방인 가운데 드러나는 것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설교는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예배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주된 형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임하고 우리가 그 말씀에 화답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심으로 예배가 됩니다. 우리의 찬양, 기도, 헌금, 우리의 몸과 마음, 엿새 동안 살아 왔던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린 사람은 예배적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말씀, 설교도 성경 강해가 아닙니다. 성경 읽기가 아닙니다. 설교는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려면 예배드리지 않고 혼자 성경 읽어도 됩니다. 혼자서 참고서 가지고 성경지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여러분이 설교를 듣습니까? 설교는 믿음으로 사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었다면 믿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는 믿음으로 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믿음으로 사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으면 예배드린 자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었으면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이 따라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를 완전한 자로 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자적으로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완전한 자로 우리를 대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10장 45절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어 보내면서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을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냉수가 강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냉수 한 그릇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냉수 한 그릇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냉수 한 그릇을 소자에게 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구걸하는 하는 사람에게 돈 한 푼 주는 것은 쉽습니다. 상대방이 반응을 하든지 않든지 주면 끝납니다. 거기에는 과정, 인간미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한 푼 던져 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냉수 한 그릇을 주려면 그렇지 않습니다. 냉수 한 그릇을 주려면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앉아서 기다리라 하든지, 서서 기다리라 하든지, 잠깐 기다리라고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냉수를 받을 사람이 기다리고 있든지 서 있든지 상대방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떠서 주어야 합니다.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물을 받아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 먹고 나서 그릇을 주면 그릇을 받아야 하고,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아야 합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인간미가 있어야 하고, 내가 떠서 주어야 하고,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하고, 상대방과의 접촉이 있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것을 요구합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 한 푼 던져주고 지나가는 봉사가 아니라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 과정이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것은 이 과정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성공에는 과정이 병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벌었다고 했을 때 철저하게 과정을 추적해 보면 과정이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렇게 원하지 않습니다. 삶을 요구합니다.

  맺는 말

  여러분의 믿음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주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삶이 따를 때 그 믿음은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삶이 없다면 말씀을 이루는 과정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보잘 것 없습니다. 정말 가진 사람에게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져도 말씀을 이루는 삶이 따르지 않으면 가진 것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말씀을 이루는 교회라야 합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 증거 되는 교회라야 합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교회라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는 하나님이 주목하는 개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주목하시면서 “오늘도 네가 네 몫을 다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완전한 자의 삶, 말씀을 이루는 삶 속에서 축복과 영광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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