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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제자의 4大 원리 (눅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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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51~62
예수제자의 4大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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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은 제자의 도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20세기 한국 교회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 ‘제자훈련’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Discipleship Training. 이 DT라고 하는 것이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인데 우리 한국교회가 주로 부흥회 중심이었고, 영성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 체계적인 말씀 교육이 부족할 때에 제자훈련 운동이 한국 교회 성장에 역기능도 있었지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제자 훈련의 허와 실을 경험하면서 지난 20세기 동안 성장해왔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3년 동안 12명의 제자를 잘 훈련해서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건설가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제자 훈련과 다 관련이 되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9장에도 예수님은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면서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특별히 광야 뜰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셔서 예수님이 물질계의 주인이시다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그 몸이 기적적으로 변하고 세상의 그 어느 세탁제라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옷이 변하고, 몸이 변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변화할 수 있는 분이시다 하는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어떤 사람이 아이가 있는 데 귀신이 들려서 자꾸 경련을 내고 거품을 내고 물과 불에 자꾸 빠지고 자기 몸을 던지고 했을 때 예수님이 그 귀신을 내어 쫒으시고 그 아이를 고치심으로 예수님은 영계와 물질께의 왕이시다 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3차에 걸친 사역을 다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51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고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라고 하는 동네인데, 이 동네를 지나가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시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은 어떤 소원을 가져야 되며 어떤 삶의 목표를 가져야 되며 또 어떤 동기를 가져야 되면 어떤 삶의 우선순위를 가져야 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고 삶의 동기가 무엇이며 우리 마음에 어떤 소원을 품어야 하는지를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지금 바르게 살고 있는가 자기를 비판, 평가해보고 우리 삶의 목표를 다시 견고케 할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써 신앙생활에 어떤 소원을 품는 것이 바른 소원인가, 예수 제자의 바른 소원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바른 소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 데, 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문제는 주전 721년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범죄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앗수르 사람을 일으키셔서 사마리아를 멸망시키셨습니다. 이 때 앗수르 사람들은 이제 유대인을 다 잡아서 앗수르로 데려가고, 앗수르 사람을 사마리아에 심어 식민정책을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순수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혼혈족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고,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먼저 보내 물어보게 합니다. “사마리아 촌에 가서 내가 이 길을 지나가야 하겠는데 허락을 해주겠습니까?” 하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어디로 가시오?” “우리는 유대인인데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하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못 지나갑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할 수 없이 다른 촌으로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54절에 보면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예수님을 못 지나가게 하니 믿음에는 행동이 따라야 된다고 하는 행동의 사도 야고보와 사랑의 사도 요한, 사랑으로 가득 찬 요한이 성질이 났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제자들은 벌써 귀신도 내쫒아 보고 병도 고쳐보고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고 그 말씀을 믿고 믿음대로 행동만 하면, 이 세 가지 요소만 합쳐지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벌써 믿음도 갖추고 행동할 준비도 갖추고 ‘예수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싹 불살라 버리시옵소서. 말씀만 하시옵소서.’ 하며 예수님의 허락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25절에 ‘예수께서 둘러보시며 꾸짖으시고’ 딱 다섯 글자로 그들의 소원에 대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셨으니 아마 어떻게 꾸짖으셨을까 제가 생각해보니 이렇게 꾸짖으셨을 것 같습니다.

  ‘너희들이 어찌해서 마음에 못된 소원을 가지고 있느냐! 너희 마음의 소원이 잘못됐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을 내려서 살라버려야 할 죄인들이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벼락을 맞아도 골백번도 더 맞을 놈들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도 받고 사명도 받았거늘, 어찌해서 너희도 의로운 사람이 아닌 존재인데 내가 너희를 의롭다 하고 은혜를 주어서 사명을 받아 일하고 있는 너희가 어찌해서 동료 죄인을 향해 그런 못된 소원을 품느냐? 인자의 온 것은 내가 불을 내려서 사람을 죽이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온 줄로 아느냐?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려고 하는 소망을 가져 온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제자 된 너희들도 나와 같은 구원의 소원, 사랑의 소원을 품고 살아야 될 것이 아니냐?’ 

  여기 이러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으니 제가 상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꾸짖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에 올바른 소원을 품어야 하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근데 꾸짖으셨다 하니 ‘얘들아, 잘한다. 하지만 말을 조금만 바꿔보면 안되겠느냐?’ 이렇게 야들야들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아버지로 두고도 큰 소리치고, 시장을 아버지로 둬도 큰소리치고 다니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살고 있는 우리 권세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 능력은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능력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위대한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왜 잘 안 나타납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바른 소원을 품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자로써 능력을 좀
이용해서 내 감정을 풀어보고, 내 원수도 갚고 보기 싫은 사람도 꺽어 보려는데 쓰려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바른 소원을 품고 ‘하나님, 제가 사랑을 좀 베풀어야겠습니다. 사랑을 베풀 능력을 좀 주옵소서.’ 하면 능력을 안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원하오니 내게 구령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안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겸손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으니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소원에 대해서는 아끼지 아니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바른 소원을 갖게 되면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우리소원에 승리와 성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번 12월 달은 우리마음에 소원을 검토해야합니다. 나에게 어떤 소원이 있는가, 내 소원 중에 악한 것은 없는가’ 이러한 것을 반성해 보고 악한 것은 빼내고 사랑과 영혼구령에 대한 소원으로 가득 찬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른 목표

  예수님은 제자의 삶의 목표가 바른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57절에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9절에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1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여기서 주를 쫓겠다는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를 쫓겠다는 사람을 상대하셨고 쫓으라고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올바른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쫓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예수님을 원형으로 삼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원형으로 한 모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언행심사나 우리의 욕망이나 동기나 소원 등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겠다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이 목표가 좋은 목표이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우릴 구원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8:29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신 목적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라고 예지 예정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사역 목표를 무엇에 두었습니까? 갈라디아서 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자녀를 낳는 수고를 갈라디아교회에서 했습니다. 왜 그러한 수고가 필요합니까?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제자의 삶의 목표는 예수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쫓을 것이 못됩니다. 돈을 쫓아보세요. 도망갑니다. 연애하는 남자들은 여자를 쫓아가도 도망갑니다. 명예를 좇아 봐도 도망가지만 예수님을 쫓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최종목표는 예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히말라야 산을 등산할 때 수많은 산맥들은 수없이 많이 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무식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지식의 목표를 세웁니다. 공부하기를 결심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려면 거지가 되어선 안되겠다 싶어서 돈을 벌 결심을 합니다. 이렇게 재력과 지식의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면 남을 도와주어야 하므로 영권이 있어야겠다 싶으면 기도하는 것을 결심합니다. 물권이 있어서 남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싶으면 사업의 목표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혼자 살면서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가정을 이루어 안정되게 살아야겠다고 하면 가정의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반듯이 생각해야 할 것은 스스로 평가하고 삶의 방향을 비판해봐야 할 것은 이 모든 부분적인 목표들이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부분적인 목표를 이루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와 아무관계가 없는 것은 도움이 안되고 도리어 우리 삶에 해가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내년에 미국 L.A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목표를 삼았다면 이것을 하기위해서는 돈도 벌어야하고 짐도 부치고 친구도 정리하고 신문도 끊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비행기표를 북경 가는 표를 샀다면 그 사람은 궁극목표에 어긋난 것입니다. 모든 부수적 목표가 잘 이루어졌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은 잘못간 인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어도 예수님 모습을 닮아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사회활동을 해도 이것이 예수님 모습을 닮아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얘기지 저랑은 관계가 없습니다 하는분 계십니까?

  이것은 종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본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수적인 목표를 세우려고 집착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왜 공부하십니까?” “좋은 대학 가려고요.” “왜 좋은 대학가십니까?” “좋은 직장 얻으려고요.” “왜 좋은 직장 얻으십니까?” “돈
벌려고요.” “왜 돈버십니까?” “잘살려고요.” “왜 잘 사시려고요?” “......”

이렇게 사람들이 궁극적인 목표를 끝까지 물으면 모릅니다. 왜 잘살아야하는지 모릅니다. 이런말 있지요? “왜 사냐거든 웃지요.” 왜 웃을 까요? 모르니까 웃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부적인 목표는 결국 예수형상을 닮는 것에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루고자 하는 이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 항상 궁극적인 목표에 비추어 스스로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표 없이 그냥 목표가 무엇인지 물으면 알지 못해서 웃는 그 인생은 과녁 없는 화살 쏘기 입니다. 그 인생은 방향 없이 달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바른 소원과 바른 삶의 목표를 품어야 합니다.

바른 동기

  제자의 삶에 바른 동기는 무엇입니까? 57절에 보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말은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네가 나를 따르려하면 집도 절도 없는 존재가 되고 머리 둘 곳도 없는 존재가 될 텐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는 한 치의 땅도 허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이 자신을 높이고 위하고 성공 시키는데 모든 자원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털끝만큼도 안 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는 아무것도 안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따르겠다는 것은 선생인 나도 이 세상에 있을 곳이 없는데 너 또한 그렇게 하겠느냐?” 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을 쫓겠다하면서도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성공시키는데 동기를 둔다면 그런 동기는 성공할 수 없는 동기입니다. 주님을 쫓는 동기가 이기적인 목적과 세상적인 야망을 달성하고 주님을 이용해서 세상적인 욕구를 충족해본다면 그 사람의 동기는 성공할 수 없는 동기입니다. 주님을 쫓는 동기는 하나님을 높이고 성공시키는데 두어야 주님도 바르게 쫓게 되고 그 사람의 동기도 성공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쫓는 제자는 먹을 것 마실 것 다 포기하고 머리 깍고 산으로 들어가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동기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따라가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저절로 따라오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을 이용해서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해결하겠다는 동기를 갖게 되면 그것도 해결을 못 받고 주님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모로써 자녀가 있는데 자식이 부모의 재산을 탐내서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뺏을 동기로 부모를 가까이한다는 것을 그 부모가 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자녀에게 부모가 재산을 주겠습니까? 반면에 자녀가 그 부모를 사랑하고 높이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늘 가까이 한다면 그 부모는 없는 것도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제가 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 유학을 많이 보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 중에 저에게 이런 말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제가 유학 갔다 돌아오면 교수자리 하나 주시겠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그런 학생에게는 “돌아보시며 꾸짖으시되” 55절 말씀이 적용됩니다. 저는 그런 학생에게 아주 혼을 냈습니다. “네가 지금 공부하러가면서 나중에 밥 먹을 것을 걱정하느냐? 네가 하나님 앞에 그릇을 넓히고 키우면 주께서 축복하셔서 너를 교수로, 목사로, 선교사로 그 그릇에 합당하게 쓰시는 것이지 벌써부터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느냐? 유학 가는 동기가 잘못되었다!” 라고 혼을 냈습니다. 주께서 나를 주의 일에 어떻게 쓰임 받고 어떻게 훈련해서 나를 키울까 생각하는 자에게 학위도 잘 마치고 교수로도 목사로도 선교로도 쓰시는 것입니다. 쓰시는 분은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그릇을 넓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 영광 돌리도록 이러한 궁극의 동기를 가지고 있어야 주께서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을 높이는 동기를 갖아야 합니다.

바른 우선순위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5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1절에는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주님을 쫓되 조건이 많습니다. 부친을 장사하고 또 한사람은 가족에게 작별을 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부친을 장사하는 사람은 부모에게 사은생활을 하는 것이고 가족에게 작별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의무생활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은 제자로 합당치 않다고 배척해버리십니다. 이것은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제 1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와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제 2 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성격에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뒤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사은생활, 의무생활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앞에 나오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를 따르는 것이 2호로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1호 가족적인 문제가 2호가 되어야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주일인데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해야 할 의무와 친척 결혼식 참석의 의무가 충돌된다면 여기 나온 두 사람은 친척 결혼식에 갈 것 입니다. 기도할 시간과 밥 먹을 시간이 충돌될 때 언제나 밥을 먼저 먹고 기도시간을 뒤로 합니다. 이
런 사람은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고 예수님 제자에 합당치 않습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는 이상한 것 가르치네. 가족으로 의무생활을 하지 말란 말입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부모 살아계실 때 용돈 한번 안 드리고 불효하다가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낸다고 폼을 잡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엇을 드십니까? 이것은 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것도 아니고 가족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 1 우선순위로 살아가는 사람이 부모에 대한 사은생활도 잘하고 가족에 대한 의무생활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나 순서가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 1호로 사랑하고 부모와 가족을 제 2호로 사랑하라” 이것
이 변함없는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제자는 바른 소원을 품고, 바른 목표를 세우고, 바른 동기를 갖고, 바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 때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볼 때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 닮은 사람들이란 뜻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폼만 잡고 나서기 좋아해서 성도들에게는 인심을 잃은 한 집사님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얘들아 사람들이 날보고 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지 아니?” 이 집사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집사님이 예수님을 닮아서겠지요”였지만, 아이들의 대답은 “아마 집사님의 실상을 몰라서 그래요” 라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예수제자로서 내가 지금 삶의 바른 목표로 가고 있는가? 내 동기와 소원 내 삶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되어있는가? 내가 예수님을 이용해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려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나는 피조물 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먼저 섬기는 일에 헌신이 되어있는가? 이것을 스스로 비판하고 평가해보시기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바른 목표를 다시 확립하시고 참된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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