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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종려주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요 19:17~22 (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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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요한복음 19:17~22 (사무엘하 7:4~9 참조)
    2004년04월04일 설교 
 

  지난 금요일 요즘 시중에 화제가 되고 있는 "Passion of the Christ",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예배당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심야기도회를 대신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여간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즉 해골이라 하는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해골들이 워낙 많이 나뒹굴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는지 아니면 그 생김새가 해골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해골이라 하는 그 곳은 사람들이 다니기를 몹시 꺼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로마 병정들은 사형을 준비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분주했을 것입니다. 일꾼들을 시켜서 웅덩이는 미리 파놓았을 것입니다. 이제 죄수들이 도착하기만 하면 별다른 절차 없이 사형을 집행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정치범들이 그렇게 처형되었던 것처럼 이번 죄수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곳, 골고다는 예루살렘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며 가며 십자가 처형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 빌라도가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 위에 명패를 하나 붙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명패를 그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빌라도는 그 명패를 히브리와 로마, 그리고 헬라 세 가지 다른 말로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아마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나 또는 오며 가며 그 광경을 지켜봤던 사람들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말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애당초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차례 예수를 놓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설에 따르면 빌라도의 아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예수의 처형을 막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 말씀에도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 그가 예수를 심문하면서 예수의 인품과 그 의연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아무리 예수를 심문해도 전혀 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도 그는 별로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예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위에 그런 명패를 써서 붙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명패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써 붙인 그 명패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죽음 문턱에서 단 한 명의 길 잃은 영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명패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고백한 백부장도 아마 그 명패를 봤을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호소한 그 강도도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아마 그 명패를 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이 제멋대로 사용한 것을 갖고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단지 자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빌라도가 써 붙인 그 명패를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그 명패를 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렸을 것입니다. 과연 대제사장들은 그 일을 주도한 사람들답게 행동했습니다. 십자가 위의 그 명패를 보고 빌라도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내가 쓸 것을 썼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의 숨은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가 예수를 어떤 인물로 묘사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총독 빌라도의 입을 빌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소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그런 표현에 대해서 심기가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고 항의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지만 진짜 왕이 아니고 사이비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진짜 왕을 죽였다면 그 일을 주도한 자기들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들의 정통성이 손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는 그들의 항의는 아주 강력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혹시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예수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넣어서 “자칭 그리스도”이고,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혹시 없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주장대로 이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총독 빌라도로서는 그런 요구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에게 사형에 선고한 그가 무슨 짓인들 더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빌라도는 그들의 그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요한복음 기자가 빌라도의 입을 빌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왕이십니다!” “예수는 진짜 왕이십니다!”

  오늘 봉독한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왕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의 입을 통해서 진정한 왕권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자 다윗은 나단에게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 종교에서는 고약하게 심통을 부리는 신을 위해서 굿을 하기도 하고 신당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혀 다르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정성이 담겨 있지 않는 그 어떤 행위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인류 역사 최초의 살인이 언제 발생했습니까? 제사를 지낸 직후가 아닙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삶이나 행동은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다만 제사를 자기들의 죄를 희석시키는 도구로만 삼으려는 인간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처럼 제사만 지내면 하나님께서 덥석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사도 그렇고 심지어 성전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 7:5~7)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양을 따르는 목장에서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를 삼지 않으셨습니까? 또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와 동행하시며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와 함께 계시며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다윗의 집안을 왕조로 만들어 영원토록 튼튼하게 세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지난날과 오늘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다윗과 그 집안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왕으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시는 분이야말로 진짜 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이나 따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왕권을 가지고 세상 군주들처럼 다윗이 잘못 사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우리아를 죽인 다윗에게 노하셨던 까닭은 그가 단순히 여체를 탐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징집을 위해서 호구 조사를 실시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대노하셨던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호구 조사 때문에 그렇게 진노하셨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권력은 우리가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권력은 그 권력의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게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임금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힘이나 권력을 사용할 것 같으면 그 누구라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금년도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 왕이시라는 사실을 소리 높여 외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백마를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런데 그가 갖고 있는 무기는 세상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로 붉게 물든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가 누구십니까? 그가 바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가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인데 그 어떤 왕들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주님이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치셔야 하는 관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바로 그 성문을 통과하시던 그 사건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찬란한 비단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를 타지도 않으셨습니다. 피로 물든 옷을 입으셨고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 주님의 평화는 칼로 세우는 평화가 아닙니다.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운 초강대국의 평화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로 세운 평화입니다. 때문에 사랑과 용서, 그리고 섬김이 지배하는 나라가 바로 그 주님의 평화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시작되는 금년도 고난 주간에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그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애쓰고 수고하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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