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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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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망했습니다.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고향과 일들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니엘과 여러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로 갔습니다. 그곳은 제가 되기 전의 일터였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밤새껏 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집지 못했습니다. 실망했습니다. 힘이 빠졌습니다. 그러자 날이 샙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들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잡으라. 그리하면 잡히리라.” 그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겉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들이 육지에 오니 숯불이 피어져 있고 생선도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를 헤아려 보니 백 쉰 세 마리였습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너라. 와서 아침 식사를 하라’. 그때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지 알았습니다. 그들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베드로 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마다 “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살아라하신 뜻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에게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까지 내어놓겠나이다.”(요 13:37)라고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마당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정말 좋은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랑에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아가파오(Agapao)와 필레오(Phileo)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 ‘아가파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주고도 더 주고 싶은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엔 시비가 없습니다. 허물을 가려 줍니다. 다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아가파오)‘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만 한다면 다 OK입니다. 따지고 큰 소리 지르고 시비 거는 것 아닙니다. 이 사랑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일본 도쿄 긴자의 한 뒷골목 이야기입니다.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아낌없이 20여 미터의 긴 행렬이 늘어섭니다. 자리가 40석 밖에 되지 않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야기 입니다. 식당 이름이 라 베토라 (LA BETTORA)입니다. 종업원이 나와서 조그마한 칠판을 내 걸면 순서대로 이름을 적어 놓고 자기가 입장할 시간까지 기다립니다. 여기서 저녁 식사를 한다는 것은 로또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답니다. 2000년 1년 예악은 1999년 여름에 모두 끝난 것입니다. 지난해부터는 2개월 치씩만 예약을 받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맛이 있기에……. 그 식당주인인 오치아이 쓰토무(54세)씨는 식당을 돈 벌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수단이라 합니다. 손님들에게 원기를 불어 넣어주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 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사실 사랑에 탈이 나면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자동차에 이상이 생기면 맨 먼저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 보니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필레오(Phileo)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인간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 안다는 헬라어로 오이다(Oida)와 기노스코(Ginosko)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는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것이 으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사랑의 첫 출발은 참아야 합니다. 실은 우리가 갈팡질팡하는 것은 사랑이 모자람입니다. 우리는 늘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혼돈의 연속입니다. 사람들도 다 편이 갈라져 있습니다. 문제는 화해와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브레이크 고장 난 차가 급경사로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문제에 정답이 나오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도 그렇습니다. 즐거움과 고통도 그렇습니다. 평화가 있는가 하면 불안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 아픔, 고통, 미움이 없는 세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온갖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행의 고통을 잠시 잊으려고 마약을 복용합니다.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세계를 늘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있을까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유토피아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세계는 천국입니다. 교회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덜 갖춘 인격입니다. 제자 베드로가 3년 동안 제자훈련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비굴했습니다. 비겁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절묘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했습니다. 여기서 보십시오. 세 번이나 “예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시대의 주인공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 사랑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제일 많이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사랑은 온유해야 합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내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을 사람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합니다.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섧은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의 사랑이 사랑인가를 다시 부끄럽게 생가가합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좋을 때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정이라면 다윗과 요나단 사이를 말합니다. 그 사이는 목숨같이 사랑했습니다. 친구를 위해 왕좌를 양보했습니다. 이런 우정이 사랑다운 우정입니다. 성경에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사랑” 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평화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 영양실조, 교육 부족, 가난이 문제라고 합니다. 사랑부족입니다. 지금 정치판을 보십시오. 4월 15일이면 우리나라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합니다. 좋은 사람이 선출되어 우리나라를 자기 가정처럼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 선출되었으면 합니다. 더 이상 미움의 칼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경주에서 일등 해야 합니다. 진리 문제 아니면 양보하세요. 사랑은 내가 져주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손해보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믿어주는 것입니다. 양보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혼, 오죽했으면 이혼까지 하겠습니까? 예전에는 이런 일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두 쌍이 결혼하면 그 중 한 쌍은 헤어진다합니다. 대부분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살고 있지만 체면이나 자식들 때문에 힘들지만 참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사회 문제로 심각한 지경까지 갈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배속에 가스가 차 있는 것처럼 답답합니다. 시원하게 뚫어 줄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없다는 쪽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길은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람은 사랑에 눈이 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수 있다면 세상은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믿음도, 소망도 다 사랑과 관계가 깊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세상은 행복해 집니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  사랑하는 영혼만이 아름답다  ―

첫 번째 메시지

남자는 여자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기억하지 말고
여자는 남자의 용기는 기억하되 실수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네 번째 메시지

먹이가 있는 곳에 틀림없이 적이 있고,
영광이 있는 곳에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다섯 번째 메시지

달릴 준비를 하는 마라톤 선수가 옷을 벗어 던지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잡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

일곱 번째 메시지

행복의 모습은 불행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죽음의 모습은 병든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여덟 번째 메시지

남을 좋은 쪽으로 이끄는 사람은 사다리와 같다.
자신의 두 발은 땅에 있지만 머리는 벌써 높은 곳에 있다.

아홉 번째 메시지

웃음소리가 나는 집은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소리가 나는 집은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열 번째 메시지

황금의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애옥의 불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든다.

열두 번째 메시지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희생 없는 사랑 하나 마나

열세 번째 메시지

마음이 원래부터 없는 이는 바보이고,
가진 마음을 버리는 이는 성인이다.

열네 번째 메시지

비뚤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열다섯 번째 메시지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하는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즐겁다

마지막 메시지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늘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세상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욕구불만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합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시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기다랍니다. 양보합니다. 이해합니다. 우리 그런 사랑으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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