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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종려주일] 우리의 질고를 지고 / 사 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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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의 질고를 지고
본문 : 이사야 53:4~9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入城)하신 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입성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 부르고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주일이라고 해서
'고난 주일(Passion Sunday)'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이 당하실 그 고난에 대한 예언이 아주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조금 전 말씀을 함께 읽을 때 다들 그렇게 느끼셨겠지만
오늘 말씀은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말들로 가득차있습니다.

"질고를 지셨다" "슬픔을 당하였다"
"징벌을 받았다" "맞으며 고난을 당했다"
"찔렸다" "상했다" "징계를 받았다" "채찍에 맞았다"...

자 성도 여러분, 본문에 나타나는 주인공은 왜 이렇게 극심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인데...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때문이다."

본문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그가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당한 것은 자신의 죄나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우리 죄 때문에!!... 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5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대리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나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

믿으십니까? 본문 6-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대신하여... 대신!! 맞으러 오셨고.. 대신!! 죽으러 오셨지만...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후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의 비밀은 그렇게 오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삼일 후,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예수님의 그 죽음, 그 극심한 고난과 혹독한 고통은
전적으로 자신의 죄나 허물 때문이 아닌... 우리 때문에!! 나 때문에 담당하신 것이었음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이나... 말씀을 들었던 군중들...
치료받아서 나았던 사람들이나 죽었다가 살아났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그렇다면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한 것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믿음이 있는 듯 했으나 사실은 없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이 한 행동은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며
각기 제 길로 간 것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사순절을 맞아 때맞춰 개봉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교역자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최후 마지막 12시간을 다룬 영화로서...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는데..
오늘의 본문의 내용과 같았습니다.

매맞고 찔리며 상하고 곤욕을 당하다가 끝내 죽어가시는 그 마지막 순간 까지도
욕하지 아니하시고 사탄에게 시험에 들지도 아니하시며 악에 빠지지도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기 위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로 달려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한마디로 전율(戰慄)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종려주일을 맞아 평소 보다는 좀 특별하게 설교를 진행하려 합니다.
그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를 낭독해 드리는 것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려하는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는 1939년 2월
경상북도 의성 경찰서에서 죽음과 같은 극심한 옥고를 치르다가 잠시 나와서
이제 자신의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평소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행한 『오종목(五種目) 나의 기원』이란 설교인데
주목사님의 설교 원문은 고대어와 한문용어 그리고 한글이 두루 섞여 있어
제가 현대어에 맞게 좀 손질하여 말씀드리며..
문체는 설교체도 있지만 대부분이 기도체로 되어있음을 이해하시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현 강단(講壇)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할 따름이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설교가 아니고 감옥에 갇힌 중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오종목(五種目)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있는 만물은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했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이후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 장상 재자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엘 갔습니다.
그런데 폐결핵 환자로서도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는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겠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할찌라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머리엔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은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이처럼 죽으셨는데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 모르는체 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요.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러나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을 누린다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러니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요.
나는 주님 외에 다른 신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죽는 죽음은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지요.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고 싶습니다.

둘째 오랜 기간의(長期)의 고난을 잘 견디게 해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겠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형벌을 면하고 도리어 상을 준다는데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뎌내겠습니까?
그래서 다만 주님만 의지할 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십자가!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야 칠십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십년 만년 영원무궁한 것입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뿐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부활하신 예수의 몸과 같이 영생 불사의 몸이오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며...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그때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는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그때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

셋째 노모(老母)와 처자(妻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게는 팔십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도 있고.. 어린 자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로서의 의무도 귀중하고.. 家長,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시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은데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에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춘풍 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해서 눈물 뿌려가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며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을, 팔십 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쳤지만 나는 남편된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병약한 아내를 두고 잡혀 다니는 이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이 있고 어린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며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 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애처롭기 끝없습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또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이제 떠나려합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이제 떠나려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내 양들을 대목자장 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옵니다.

나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된 줄로 믿습니다.
또한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는 싸매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는 주님 손수 인도해 주시며!!
낙심하고 범죄한 자는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내 마음 차마 못 할 일이온줄 아오나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저들을 지켜주시옵소서.

늙으신 어머님과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어린 자식(子息)들과 사랑하는 양떼를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강단을 떠나려합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려합니다.

넷째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忠節)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으며...
그리스도인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나라를 붓잡고 오장원(五丈原)에 쓰러질 때까지
국궁진쇄(鞠躬盡碎) 사이후이(死而後而) 죽기까지 애썼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교회와 그 의를 붓잡고 「국궁진쇄 사이후이」
죽도록 충성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다시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변할줄이 있으랴"

이는 우리 선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忠義大節)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으며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는데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불이냐! 사자굴이냐..하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몸은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번 백번 맹세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평양(平壤)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죽고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大義貞節) 결코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의 초로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읍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를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읍시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게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

이렇게 설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다시 감옥생활을 계속하시다가
1944년,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마시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차가운 감방에서 옥사(獄死)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죽었으나... 그의 신앙은! 그의 정신은! 죽지 않았고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맞았고 고문을 당했으며 순교했으나 모든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 그분은
또 이 주기철 목사님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이 되었으며, 삶의 본이 되었으며, 고난의 본도 되었으며, 죽음의 본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런 고통과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빌라도의 재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그렇게!!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시고!!
우리가 당할 징벌을.. 우리가 맞을 매를... 대신 다 당하시고 맞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이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만 하겠습니까!!

주님은 본문 9절 말씀처럼 강포를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입에 궤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제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이 종려주일에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할 주제이며
말씀인 것인데... 다 나 때문이며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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