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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급하지 맙시다 / 잠 1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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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급하지 맙시다

본문: 잠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왕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볼품 없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 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버렸다." 친구는 대왕의 말을 듣고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성경에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
(잠19:2 )
'발이 급한 사람'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면 실수를 하고, 따라서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꼭 시간을 두고 신중히 생각하여 일을 생각하여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며 서두르는 데 있습니다. 한번 더 생각해본다든지 여유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조선왕조 세종조에 병조판서와 예문과 대제학까지 역임하고 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많은 일화를 남긴 윤회라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어렸을 적의 일입니다. 오랜 여행에 의복은 낡아지고 여비마저 떨어져 버린 그는 어느 날 해가 저물자 이름 모를 어떤 주막집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주인을 찾아 돈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주인은 궁기가 주룩 흐르는 윤회를 아래위로 몇 번 훑어보더니 재워 줄 방이 없노라고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주막집 처마 밑에서나마 하룻밤 자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헛간의 벽에 기댄 채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주인집 아들 녀석으로 보이는 꼬마가 큼직한 구슬 하나를 들고 나와서 손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녀석은 실수하여 그만 구슬을 땅에 떨어뜨립니다. 구슬은 굴러 장독대 돌 사이로 들어갔고 녀석은 잃은 구슬을 찾느라고 한참 법석을 떨더니 마침내 포기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잠시 후 커다란 거위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그 구슬을 꿀꺽 삼키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주막 안방에서는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엄청난 값어치가 나가는 흑진주를 도둑맞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참 수선을 떨던 주인 내외는 결국 구슬을 훔친 사람은 오늘 새로 나타난 윤회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마침내 주인 내외는 날이 새면 윤회를 관가에 고발한다면서 도망가지 못하게 아예 기둥에다 꽁꽁 묶어 놓습니다. 이렇게 까닭 없이 봉변을 당한 윤회는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자기 곁에 거위도 함께 붙들어매 달라고.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주인은 선심 쓰는 셈치고 그의 말을 들어 줍니다. 다음날, 관가로 자기를 끌고 가려고 채비를 차리는 주인을 보고 윤회는 우선 거위 똥을 한번 살펴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여긴 주인이 그것을 살펴보니 그 속에 흑진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윤회는 그때야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해 주었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미안하고 겸연쩍었겠는가. 이에 주인은 사과를 겸해서, 야 이 사람아 그런 줄 알았으면 어제 저녁에 말을 하지 왜 지금에야 그 이야기를 하는가 라고 말합니다. 이에 윤회는 만약 그때 말을 했다면 당신들은 틀림없이 거위를 죽이지 않았겠는가, 내 잠깐 고생하면 거위를 살릴 수 있겠기에 일시 수모를 참았노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원래 한국인의 기질과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은근과 끈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강인한 기질과 여유와 유머를 찾아볼 수 없도록 조급해하고 감정적이며 직설적입니다.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판사판'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우리들이 격동의 세월을 지내왔고 한의 세월을 보냈다는 증거라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우리들의 생활방식이나 정서를 정곡으로 찌른 말입니다. '새치기'나 '급행료'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이나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증거요, '한탕주의'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사조입니다.
성경에 보면 조급하거나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된 신앙인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인내하는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내와 신앙을 연결시켜 표현한 말씀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로마서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2-3절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두 구절 모두에서 인내란 참 소망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며, 온전하고 흠 없는 신앙인격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자세는 조급한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끝까지 견디는 데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서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인내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생은 기다리는 시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다린 자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태 속에서 열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도중에 아기를 꺼낸다면 죽은 아이나 잘못된 아이를 얻게 될 것입니다. 농부는 씨를 심어놓고 기다려야 합니다. 도중에 열매를 따버린다면 아무 결실을 맺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전거를 탈만큼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젊은이는 그가 차를 운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의학도는 졸업증서를 받을 때까지, 직장인은 승진을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정의 평온을 위해, 새 집을 마련하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의 기술은 한 순간에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다림이란 성숙한 축복이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 갔을 때, 어느 중국집에 가서 대접을 받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중국집에서 식사라는 건 한 접시가 나오면 다 먹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접시가 나오고 또 다 먹은 다음에 그 다음……, 그렇게 해서 보통 두시간 반 동안 식사를 하는 것이 중국음식을 먹는 그 하나의 에티켓인데 가보았더니 한꺼번에 세 접시씩 나와요. 그래서 궁금해서 왜 이러냐 물었더니 한국 사람들은 처음부터 "빨리 빨리 빨리 빨리" 그러기 때문에 아예 한국 사람 가면 안대요. 세 접시씩 그냥 나온대요. 그것뿐만 아니라 빨리 먹고 가기 때문에 부탁을 안 해도 음식값을 할인해 준답니다. 소문이 났어요. 아주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급하게 놉니다. 모든 것이 빨리 빨리로 말해요. 순식간에 부자되기를 바라서 부정부패와 도박이 심하고, 서로 빨리 빨리 가려고 하다보니 그 때문에 교통사고도 세계 제1위입니다. 건축도 빨리 빨리 짓다가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빨리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서둘러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이젠하워가 보좌관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가장 자주 했던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너무 서두르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그 실수가 치명적일 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신중한 처신, 누구든 언제나 명심할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다리지 못해서 저주를 받은 한 사람의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저 유명한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여 있습니다.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6천명입니다. 사울 왕은 다급했습니다. 제사를 드려야 할 사무엘은 기한이 다 되었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민심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조급한 사울은 사무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가 해서는 안되는 번제를 사무엘 대신 드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왔을 때는 이미 번제를 드리고 난 후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부득이 번제를 드렸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이 얼마나 비참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여 조급한 번제를 드리다가 당한 심판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삽니다. 영광스러운 그 날이 임할 것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을 믿고 살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는 조급함 대신에 인내를 갖게 되며, 서두름 대신에 차분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4절에서도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말을 보게 됩니다. 서두르는 것이 사랑이 아니며, 조급한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기다려주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이 조급증을 앓고 있습니다. 당신이 조급증을 앓고 있다면 '달팽이 걸음'을 생각해 봅시다. 어느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에서 위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더듬이를 세우고 느린 속도로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을 때 나무 껍질 틈새에서 벌레 한 마리가 빠져나오더니 빈정거렸습니다. '이 느림보야' 너는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는구나. 저 위에는 네가 먹을 사과가 하나도 없어. 그러나 달팽이는 계속 기어오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입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급성장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랍니다. 호박은 6개월이면 자랍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립니다.
100년의 긴 세월에는 따뜻한 햇볕과 솜털 같은 바람의 시간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천둥 번개에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고통과 불행의 시간도 포함됩니다. 조급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기다릴 줄도 알고, 견딜 줄도 안다는 뜻입니다.
좀 늦게 가는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닙니다. 사막의 낙타는 천천히 가기에 무사히 목적지에 닿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과정이 있는 법이고,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만이 결국에는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빠른 속도, 빠른 성장, 빠른 성공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루살이 곤충은 하루만에 자라 하루만에 사라집니다. 거목(巨木)은 백년 천년 더디게 자라지만 마디마디 굳건함과 풍성함이 따를 것이 없습니다.
1910년 한일 합방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있은 뒤에 우리 한국에 많은 지성인들 뜻이 있는 분들이 해외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북만주로 많이 갔고 심지어는 구라파로 혹은 북미로 각 나라로 흩어져서 이렇게 이민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얼마가 생전 듣도 보지 못한 남미로 이민을 가게 되었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보따리를 쌌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될 때 그들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그들의 봇짐 속에는 배추, 무, 고추 이것들의 채소의 씨앗을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김치를 먹어야겠고 매운 것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낯선 지방에서 어떤 다른 양식을 취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가지고가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자마자 그들은 자기 집 뜨락에 배추, 고추, 무를 심었습니다. 아주 무성하게 잘 자랐고 그래서 이것을 뜯어서 다소간의 식량을 하며 고향생각을 달래게 됩니다. 꼭 같이 독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그 시간에 있었답니다. 이 분들은 자기 집 뜨락 옆을 돌아다니면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다가 호두 씨앗을 심는 겁니다. 그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지 않습니까?
"호두를 심어 놓으면 20년 후에 호두가 열릴는지 안 열릴는지 알 수 없는 것인데 그걸 무엇하러 지금 심느냐"고.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 하면 채소를 심었던 사람들은 그저 그대로 그 모양으로 살았고 호두를 심었던 사람들은 지금 세계의 호두 생산의 70%가 바로 거기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적인 약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만사를 조급히 생각하는 겁니다.
최후의 승리는 출발점의 비약이 아니다. 결승점에 이르기까지의 끈기와 노력입니다. 성경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5-7)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한번 더 기다리며 한번 더 생각하고 행동해보자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장19절에는 애매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를 당해도 조급하지 말고 당황하거나 서두르지를 말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둘째,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의 어려운 순간이 반드시 미래의 기쁨과 축복이 될 것을 믿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사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급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조급할 일이 없습니다.
바쁨과 조급함과 소란함 뒤에는 언제나 사단의 속삭임이 있습니다. 사단은 내용을 보지 못하게 하고 겉표면만을 보게 합니다. 사단은 사실을 보게 하지만,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 날 주님은 약속대로 구름 타고 공중에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조급하지 맙시다. 서두르거나 쉽게 단정하지 맙시다. 주님의 뜻을 기다려봅시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아니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 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스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와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의례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스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스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성경은 인내하고 기다릴 것을 말씀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성도 여러분, 승리하려는 경주자는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완주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조급하지 말고, 인내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인생에서 너무 빨리 좌절하고, 너무 빨리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에 저희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따라 인내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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