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암호 - 십자가 (고전 1:18~25)

  • 잡초 잡초
  • 244
  • 0

첨부 1


< 제 목 > 하나님의 암호 - 십자가
< 본 문 > 고전 1:18~25

흔히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할 때 죽음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물이든 그 전기를 읽어보면 살아생전의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고 죽음은 아주 간단히 처리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죠. 예를 들어 케네디, 링컨, 혹은 간디처럼 그 죽음이 아주 특별하고, 중대한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 비교적 상세히 기록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죽음의 기록은 전체 생애 이야기의 10%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아주 특이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거의 3분지 1 가량이 마지막 고난주간과 십자가 죽음에 관한 기록입니다. 복음서뿐만이 아니죠. 신약 성경은 물론이고 구약 성경조차 십자가 죽음에 관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다름 아닌 ‘십자가’이다!”

그러면 과연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그처럼 중요하단 말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특별히 금주 고난주간인데 십자가의 의미를 잘 깨닫고 나 자신의 신앙과 인생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주간이 더욱더 구원의 감격과 감사로 넘치고, 새로운 신앙과 삶의 결단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1] 십자가의 본래 의미 : 저주와 형벌, 수치와 고통

요즘은 십자가가 악세사리나 예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일반들조차 별 거부감 없이 바라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본래 사형틀입니다. 인류 역사 상 여러 가지 잔인한 사형 제도가 있었습니다. 총살형, 사약, 참수형, 교수형, 단두대 등 ...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살벌한 것이 십자가형(刑)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형수들도 살인강도, 반역자 등 흉악범들에 한정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시민권자들은 아예 십자가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노예나 식민지 백성 중 흉악범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로마의 식민지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수치, 저주와 고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배 계층인 로마인과 헬라인들에게는 최대의 조롱거리였습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극한 고통 가운데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악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공개처형법입니다. 백성들이 보는 데서 사형수가 직접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설치된 사형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겁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유 : 대속의 죽음

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잔인한 사형틀에 달려 죽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대속의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돌아가신 겁니다.

여러분,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건강 문제, 물질 문제,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등 자기가 당장 직면한 것을 제일 심각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문제들입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 그리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흔히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죽음으로 호흡이 끊어졌다든지, 심장의 박동이 정지되었다든지, 뇌의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를 그 기준으로 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음의 기본 개념이 ‘분리’입니다. 그리고 죽음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들이 인간 불행의 핵심입니다.
i) 영적인 죽음 :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 영적인 죽음이라 말합니다. 인간의 죄는 그 영혼과 하나님을 분리시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생기는 영혼의 불안, 불만, 공허 등이 영적인 죽음의 증상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를 얻고, 세상 재미를 보아도 극복할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을 떠나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그때뿐이고 금세 불만스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ii) 육적인 죽음 : 우리가 살아 있는 모습은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수명을 다하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됩니다. 그것이 곧 육적인 죽음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심판받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전12:7)

iii) 영원한 죽음 :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흔히 육적인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영원한 죽음은 하나님과 천국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의 고통 가운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존재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 값을 반드시 묻습니다. 눈 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죄 값은 죽음입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은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하므로 피흘림(죽음)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비록 범죄하고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사랑하십니다. 차마 멸망시키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진퇴양난의 수수께끼가 생깁니다. 공의를 생각하면 죄로 인해 무조건 죽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생각하면 대충 넘어가고 살려줘야 됩니다. 공의를 따르자니 사랑에 어긋나고, 사랑을 따르자니 공의에 어긋나게 됩니다. 이 수수께끼를 푼 것이 곧 십자가 대속입니다. 죄로 인해 피흘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대신 죄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절묘한 조화가 이뤄진 셈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법정에서 두 친구가 만났습니다. 하나는 판사, 하나는 피고의 신분으로 만난 겁니다. 기묘한 만남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판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래도 저래도 곤란합니다. 법대로 하면 나쁜 친구가 되고, 적당히 봐주면 나쁜 판사가 됩니다. 그 판사는 친구인 피고에게 법정 최고의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방청석에서 술렁거립니다. 너무하다는 거죠. 그런데 판사가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벌금은 제가 내주겠습니다.” 그리고 석방해 주었습니다. 절묘하죠? 좋은 판사도 되고 좋은 친구도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원리가 바로 이런 겁니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십자가의 진리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임을 밝힙니다.(18절~20절, 25절) 이것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지혜입니다. 이런 진리의 차원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죽임을 당했다, ... 이렇게 수동형으로 표현하는데 사실은 능동형으로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계실 때 가룟 유다에 올 것을 알았으므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총독이 무죄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을 때 적당히 타협하면 얼마든지 풀려납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유대인의 왕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말 한 마디만 해도 고소한 유대인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선택은 엄청난 고통과 수치를 동반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상상해 보지만 사실 예수님이 얼마나 큰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면서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드디어 한국에도 개봉됐죠. 저도 공부 삼아 개봉일에 가서 보았습니다. 잔인한 고문과 폭력으로 예수님의 몸은 온통 피범벅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화면이 온통 벌겋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 중에는 잔인한 폭력 영화라느니 공포영화라느니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잔인함이 바로 나의 죄에 대한 것이기에 아무리 흉칙해도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합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함께 관람하는 분들이 한결같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을 숙이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금속 덩어리가 달린 채찍, 갈고리가 달린 몽둥이 등 고문 도구로 휘갈길 때 예수님의 온 몸에는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했습니다. 십자가 지고 가다 수도 없이 엎어지고, 또 채찍 맞으며 가다 자빠지고 ... 손목과 발목에 못이 박히는 장면은 눈 뜨고 보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왕이라고 했다며 조롱하는데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콱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엎드려 절하고, ... 그 수치가 얼마나 컸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그 영상은 실제 예수님이 당한 고통과 수치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과 수치가 얼마나 엄청났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상상해도 헤아릴 수 없을 겁니다.

그 엄청난 고통과 수치를 굳이 당하신 것은 대속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운명하실 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요19:30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무슨 뜻입니까? 다 지불(완불)했다는 겁니다. 인간의 죄값을 다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2천년 전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예수님이 피흘려 죽은 것이 나와 어떻게 상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은행에 엄청난 돈을 예치해 둡니다. 그러면 두고두고 어디서든지 인출해서 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하나님의 혈액은행에 예치된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지 시공을 초월해서 예수 믿으면 그 피값으로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개개인이 구원받는 방법 : 하나님의 암호 십자가를 믿음으로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셨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의미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 선택하신 사람들은 다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안 믿어도 택한 사람들은 다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며 내가 믿는 게 아니라 성령이 믿게 해 주신다는 말이 더욱 더 사리에 맞습니다.

십자가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하나님의 암호! 암호가 무엇입니까? 함 마디로 말하자면 ‘공개된 비밀’입니다. 누구에게 공개하는가 하면 자기 편에게만 공개합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암호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어보죠. 매일 매일 암호를 바꾸어서 부대원들에게 알려줍니다. ‘비둘기 - 평화’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한밤중에 보초가 접근하는 사람을 행해 묻습니다. “비둘기!” 그때 “평화!” 하고 대답을 하면 통과입니다. 반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대면 발포해도 아무 소리 못합니다. 이처럼 암호는 게 생사를 갈라놓을 정도로
중대한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 비밀을 예정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을 복음을 들으면 예정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순순히 믿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할 때 믿음으로 “아멘!” 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의 암호가 등장합니다. 민21:4~9에 나오는 ‘놋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만하며 불평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불뱀이 나타나 그들을 물었고, 그들은 온 몸이 부어오르고 죽어갑니다. 그때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암호를 알려줍니다. 놋으로 불뱀과 동일한 모형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대로 믿고 바라본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암호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행위나 공로는 필요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 된 이후에는 자녀답게 의로운 행위를 해야 되고, 주님의 일에 충성을 바쳐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믿음의 유무에 따라 모든 인간이 둘로 갈라집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둘로 갈라집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바울도 본문 22절~24절에서 그런 사실을 언급합니다. 대개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철학과 자혜를 구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의 예정 선택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좌우편에 강도 둘이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확증해 주셨습니다. 눅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정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4] 복음 전도의 중요성 : 하나님이 사용하는 유일한 구원 방법

오직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기에 전도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복음을 들음으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런데 얼핏 생각하면 전도가 정말 미련하고 비합리적인 방법 같습니다. 설득력도 없고 조롱이나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그 영혼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의 암호를 알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행13:38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의 암호를 전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 보면, 전도가 미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구원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전도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고 열심히 전도해야 됩니다. 우리 자신도 누군가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롬10:13~14 참조)
앞서 말씀드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야기를 한번 더 하고 싶습니다. 그 영화의 감독은 할리우드 배우 겸 감독인 ‘멜 깁슨’입니다. 그는 이 영화를 전도 목적으로 만들었 다고 밝혔습니다. “성령이 내게 임했으니 나는 이 영화가 복음을 전파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그가 영화를 제작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회심 체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20대에 이미 배우로서 성공하여 돈과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공허하고 지루합니다. 그래서 술과 마약에 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도박에도 중독 됐습니다. 그래도 인생은 갈수록 무의미하고 지루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자살 충동까지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영화 제작을 그 몇 배를 벌게 해 주셨지만 그 헌신은 대단한 겁니다.

멜 깁슨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가?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도 엻심히복음 전하기 바랍니다. 평소에도 그래야 되지만 특히 이번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보내면서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메세지가 무엇이겠습니까? 행16:31 “주 에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적인 것은 모자라도 문제, 남아도 문제입니다. 다만 영혼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마16:26) 개인, 가정, 나라, 온 세계가 살 길은 오직 십자가의 도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종말의 때가 임박한 이 시대에 십자가의 도를 믿음으로, 전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