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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경과 신앙 / 잠 6: 2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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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과 신앙

본문: 잠6:27-28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한 스승이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가던 중에 그들은 길가에 종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승은 그것을 한 제자에게 주으라고 말하고, "그 종이는 무엇에 쓰였던 것 같으냐?"고 물어보자 제자는 냄새를 맡으며 말했습니다.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향수를 쌌던 종이인가 봅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걷는데 이번에는 길에 새끼줄 한 토막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승은 이번에도 그것을 제자에게 주으라고 말하고 또다시 물었습니다. "그 새끼줄은 어디에 쓰였던 것 같으냐?" "이것은 비린내가 나는 걸 보니 생선을 묶었던 줄인가 봅니다." 그 말을 들은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무엇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복을 만들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한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선해지고, 악한 자와 벗하면 악해진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하였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로버트가 거칠고 무례한 소년들과 함께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정원에서 빨간 사과 여섯 개를 따다가 쟁반 위에 얹어놓고 로버트 앞에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사과는 아직 익은 게 아니니까 다 익을 때까지 며칠 그대로 간직해두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사과를 보관해두면서 완전히 썩어버린 하나를 그 여섯 개의 사과들과 함께 두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은 "썩은 사과가 다른 사과를 모두 썩게 할 텐데…" 하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싱싱한 사과가 썩은 사과를 싱싱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니?"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8일이 지난 뒤 사과를 꺼내왔는데 과연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아들을 타일렀습니다. "얘야,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너도 결국 나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더냐? 이 좋은 사과 6개가 한 개의 썩은 사과를 싱싱하게 만들지 못할 뿐더러 싱싱한 6개 모두 썩어버린 것을 보면 나쁜 친구와 사귈 때 네가 장차 어떻게 될지 이제는 깨닫겠느냐!"
페르시아의 우화입니다. 여행을 하던 한 나그네가 점토 한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분위기를 느낀 이 나그네가 점토를 주워들고 들여다보았을 때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풍기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점토에게 물었습니다. 『이 고상하고 그윽한 향기가 왜 나는 것일까』그러자 그 점토가 나그네에게 이런 말을 속삭였습니다.
『나는 말이죠, 아주 예쁘고 기품 있는 장미꽃과 함께 있었답니다』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생활이 달라집니다. 즉 인간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결코 환경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1. 악한 환경에서 떠나야 합니다.
옛말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교육에 나쁜 영향을 주는 환경을 피하여 세 번 집을 옮긴 일을 두고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그들을 본받고 닮기 쉽기 때문입니다. 롯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하여 그곳의 나쁜 풍습에 젖은 딸로 인해 죄를 범했고, 솔로몬 왕은 말년에 이방여인들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므로 그들이 쫓는 다른 신을 두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했습니다.(왕상11:4) 우리도 우상숭배자를 친구로 두거나, 음란한 세상여인들과 가까이 하면 범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잠4:14)
산에서 조용히 도만 닦던 어떤 수도사가 세상 구경이 너무도 하고 싶어 내려왔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연극을 보러갔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수도사는 "야! 거 세상 재미가 괜찮구나"하는 시험이 마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수도사인지라 스스로 "오! 이놈, 너 마귀야, 네가 아무리 사람을 잘 시험하기로서니 나같이 수십 년 수도한 사람을 다 시험하느냐?" 하고 마귀에게 말하자, 마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수도했으면서 어찌하여 내 영토 속에 들어왔습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심지어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술집, 극장, 오락장 등은 흔히 마귀의 영토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곳을 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루 중 텔레비전 보는 시간도 말씀을 묵상하거나 성경을 읽는 시간보다 더 많아서는 안됩니다. 미국 보스턴 타프츠 대학의 아동교육연구소 스트라스버거 교수는 텔레비전이 자녀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매주 평균 23시간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다. 1년 평균 성(sex)적인 장면은 1만4천 회, 술 광고 2천 번을 보게된다. 최근 나오는 음악 비디오의 75%는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50%는 폭력을 주제로 삼는다. 자녀를 망가뜨리려거든 부지런히 텔레비전을 보게 하라."
낚시질을 해 본 사람은 다 압니다. 낚시를 던지면 낚시 미끼 주위로 뱅뱅도는 물고기는 잡히기 쉽습니다. 무엇 때문에 낚시 가까이, 미끼 가까이 뱅뱅 돌아다니는가? 마귀의 영토를 멀리하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악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이 떠나는 이유는 이 나라의 교육에, 경제에, 사회에, 정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문제는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 나라가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 우리의 문제는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큰 일을 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권력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살며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면 안되고, 죄 지으면 안되고, 예수를 떠나면 안되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이깁니다. 의인의 자손은 망하지 않습니다. 온 세계가 다 달려들어도 악이 이길 수 없고 죄악은 망합니다. 역사상 두 개의 타락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소돔과 폼페이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이 두 도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소돔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돔으로 가지 말아라, 소돔에서 나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통과 할 수 없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면 결국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이며 음란한 시대입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죄악을 쫓아가는 문화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돔을 좋아하며 소돔으로 나아갑니다. 이 길은 롯의 길입니다. 멸망의 길입니다.
창 19:12-22에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곳에서 나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소돔성에서 나와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소돔성을 위해 천사를 보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습니다.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멸망 받지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해 나옵니다. 노아, 기생 라합, 백부장,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의 가정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의 온 집안도 구원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에 나오기는 해도 세상일을 즐거워하고 물질과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물질이 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큰 것이며 그것이 바로 생명길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지신 십자가, 오직 그 십자가의 구원을 크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신앙은 나아가는 것입니다. 소돔성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죄악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소돔의 시대에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도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영적인 것을 귀히 여기고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을 가지고 살며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환경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즉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환경 탓으로 돌리면 안됩니다.
세상은 지금 온통 죄악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하셨고,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4:6)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늘 지혜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환경에 따라 깊은 신앙심이 심어지기도 하고, 나쁜 사상과 마음이 심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신앙과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 환경이 신앙과 마음을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을 가졌어도 마음이 부정적이고, 열등의식에 짓눌려 있으면 참 신앙을 가질 수 없고,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참 신앙을 가졌으면 오히려 우리의 환경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인간 모두가 주어진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헛간을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훌륭하게 주어진 환경을 파멸로 이끄는 헤롯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추한 감옥에서 성경을 기록한 바울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신체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빼어난 미모로 찬사와 흠모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일생을 마친 마릴린 몬로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당당히 환경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가 악한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했고, 사도 바울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한데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3)하였으며, 그는 옥중에서까지도 기쁨을 누렸습니다.(행16:25)
같은 장소에서 같은 눈비와 바람과 햇볕을 받아도 여전히 향나무는 향나무로,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로 자랍니다. 즉 환경이 나무를 바꾸지 못함같이 신앙 환경이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경건한 유대인 혈통에서 태어나 개신교인이 된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자가 되었고, 공산 독재자 '스탈린'은 신학교 시절에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정신병으로 말년을 보내다 죽은 독일의 '니이체'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던 가정에서 살았던 자입니다. 반면 '요한 웨슬레'와 '프란시스' 등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음을 기억할 때 좋은 환경이라고 좋은 신앙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며 나쁜 환경이라고 나쁜 신앙을 갖는 게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은 환경에 따라 크게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한 가정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술취한 아버지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형제는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20년 후 형제의 인생은 완전히 갈리고 말았습니다. 형은 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어 '금주운동'을 전개했고 동생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동일한 답변을 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때문에..."
형은 비극적인 환경을 교훈 삼아 희망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동생은 환경의 노예가 되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도약의 기회로 삼는 사람과 절망의 늪에 함몰하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환경을 탓하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가계에 흐르는 비극을 끊지 못합니다.
창세기 3장 13절에 보면 하와가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는 자신의 죄가 뱀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항상 핑계를 댑니다. 지금도 하와처럼 '때문에...'라는 말이 입에 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지? 선악과를 만들지 말지."라고 말합니다.
선악과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는 말이니 얼마나 무서운 핑계입니까? 오늘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나중에 핑계를 댑니다.
"내가 편모슬하에 자라서 그랬어요. 가난이 한이 되어서 그랬어요. 과거에 받은 상처가 많아서 그랬으니까 이해하세요."
더 나아가 "세상이 더러워서, 사회가 부조리가 많아서.."라고 핑계대기도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 특히 심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환경이 나빠서 그렇다" 혹은 "사회환경이 나빠서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환경을 잘 만들어 주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 원인일까요?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대부분이 무신론에서 시작됩니다. 그 학문의 연구 방법부터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들이 스스로 모여서 어떻게 잘 살 수 있겠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입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가 범죄를 해도 다 환경이 그래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다 환경과 관계되는 것이니 누구를 처벌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거든 환경을 탓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탓하고 싶은 환경을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어야지 환경이 인간을 좌우할 수 있도록 방치하는 존재가 되면 안됩니다. 환경 핑계를 대는 사람은 환경을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뚫기보다는 환경에 동화되기를 편하게 생각합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더 공부하여 분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공부방이 없다" 또는 "과외를 못했다"고 하면 발전이 있겠습니까? 사실상 공부방이 없어도 일등 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은 어떤 연유입니까? 환경이 나쁘면 환경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기도하고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환경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사람이지 환경과 동화된다면 물질이 아니겠습니까? 물질은 환경에 오염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려라 정복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자꾸 담배를 피우라고 유혹해서 피웠다는 소리를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핑계입니다. 그런 유혹이 없는 곳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 땅 위에 유혹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환경을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죄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환경을 핑계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가정을 변화시켜 나가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가정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나는 이 가정의 태양이 되리라!"고 다짐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만들어 나가면 반드시 가정을 밝힐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어. 저 여자가 저렇게 드세니..."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상대가 거세게 나올 때 나도 거세게 나오면 폭발하여 싸움만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거세게 나올 때 친절하게 대답하면 분노를 쉬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을 핑계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극복하는 길을 찾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반성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생길에서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대부분의 경우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가 쉽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고통의 환경에서 문제를 해결한 대표적인 여인이 있습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입니다. 나오미는 그 이름의 뜻처럼 '불행한 여인' 이었습니다. 나오미처럼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약속의 땅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경제적 문제로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이민 갔으나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앞세운 고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남편 죽고, 아들 둘 장가들였는데, 손자들도 없이 다 죽었으니 이렇게 복 없는 여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도 이런 여인이라면 박복한 여인, 불행한 여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절망스러운 환경에서 신앙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고통스러운 환경을 극복하였을까? 그는 고통의 원인을 신앙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렸습니다. 남편 없이 따라온 며느리 룻을 통하여 인생의 기쁨과 풍요로움의 만족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보아스>를 만나게 하였고, <보아스>에게 은혜를 주어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세상으로 나가지 말고,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빨리 깨달아야 할 일이 이것입니다. 고통이 왔을 때 말씀을 떠나 내 생각대로 무엇인가 해보려다가 당한 고통이 아닌가 하는 것을 빨리 발견해 내야 합니다. 요나도 풍랑 중에 이것을 얼른 깨달았습니다. 이 풍랑은 나로 인한 풍랑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다에 던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예비해 두었습니다.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4. 환경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고 개척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술집에 간다고 하여 선인이 악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인이 예배당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마을에 독실한 신자인 듯이 예배당에 나가고 있는, 그러나 품행이 좋지 않은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랍비가 하루는 그를 불러서 품행을 단정히 하라고 주의를 주자 그 사나이는 말했습니다. "나는 정해진 날은 하루도 빠짐없이 예배당에 나가는 충실한 신자인데요." 랍비는 그에게 다시 말하였습니다. "이보게. 사람이 동물원에 매일 매일 간다고 해서 동물이 되는 것은 아니 잖나" 환경이 저절로 사람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신앙심으로 자기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해야 합니다.
금세기 초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지휘자가 있습니다. 토스카니니 하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명성 있는 지휘자입니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로서 심한 근시로 인해 연주 중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주 때마다 연주할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단원들 중에 누군가에게 지휘를 대신 부탁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서 임시 지휘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 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만약 토스카니니가 그토록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유럽의 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 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 큰 능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 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아니했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성경 한 구절 봉독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집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 6- 9)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말씀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나이는 53세.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을 했다가 곧 해고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전쟁 때 입은 왼손의 부상은 그를 항상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실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는 듯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뜨거운 창작의욕을 느꼈습니다. 그 열정으로 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400여 년간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는 ‘돈키호테’입니다. 역경을 재도약의 기회로 삼은 이 작가의 이름은 세르반테스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습니다. 최상의 환경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곳이 바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최상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명포수는 맹수를 만나야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H.G. 스팻포드’씨는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두 자녀를 둔 시카고의 한 실업가였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던 어느 날 대 화재 사건으로 그는 사업과 집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돈을 채용해 재기할 때까지 아내와 자녀들을 유럽에 있는 친구에게 의탁하기 위해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그들을 전송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항해 도중 대서양 한복판에서 배가 침몰하여 두 자녀가 사망하고 아내만 겨우 구조 받았다는 슬픈 소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송을 지어 불렀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환경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 기도: 항상 주의 말씀과 지혜를 사랑하고 가까이 하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살 수 있도록 악한 환경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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