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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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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창세기 39장 1-6절
제  목 : “요셉”   


신구약 성경의 등장인물은 총 2930명입니다.
여기에는 아담은 물론 오늘의 요셉과 가롯 유다도 포함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인물을 귀하게 여깁니까?
용기가 부족한 사람은 다윗을 흠모할 것이고,
복음의 열정에 붙잡힌 사람은 바울을 꼽을 것이며,
헌신에 보람을 갖는 사람은 마리아나 루디아를 본 받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닮은 인물이 있는데, 곧 요셉입니다.
요셉의 인격과 삶이 예수님을 나타낸 만큼,
모든 성도의 모든 면에서 본인 된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 예수님 같은 사람

무엇이 예수님다울까요?
① 지극히 낮은 곳에서부터 지극히 높아짐
미국 사회의 경우 동남아인들이 이민 가서 그 주류사회에 들어가는데 평균 3대가 걸립니다만 우리나라 사람은 1.5대가 걸렸습니다.
이는 지극히 빠르고 이례적인 일입니다.
타 민족에 비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시킨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당대에 있어서 큰 제국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 주류사회에서는 충격을 주었을 것이요
◦ 노예사회에는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일은 오직 요셉에게만 국한된 일입니다.
왜요?
예수님의 신분을 웅변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 말구유에 태어나신 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며 장사된 「비하」의 신분이 있으시고,
◦ 부활, 승천, 재림, 심판의 왕이라는 지극히 높아지신 「승귀」의 신분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두 신분은 결국
우리들의 신분과도 같습니다.
모든 성도가 과거에는 「죄의 노예」였지만,
지금은 은혜를 따라 「의의 왕」이 된 줄 믿습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② 침묵하심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에게 시기와 모함을 받는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고통의 절정은 노예로 팔려감과 감옥살이를 할 때였습니다.
잘못이 없는 고난과 고통!
그러나 요셉은 「입」이 있으나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혀」가 있으나 저주하지 않았으며
「이」가 있으나 갈지 않았던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동족에게 팔리고,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여 빌라도 앞에서 고난당하시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한 고통 속에서 조차 침묵하셨습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함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③ 형제를 용서함
요셉의 가장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요셉 생애의 가장 극적인 모습이 언제인가요?
◦ 감옥에서 나와 총리가 될 때입니까?
◦ 아버지 야곱을 만날 때입니까?
◦ 애굽을 기근에서 살게 할 때입니까?

요셉의 위대할 때는,
자신을 해한 형제들을 용서할 때입니다.
자신이 요셉인줄 알고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

  창 50:20-2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적반하장된 경우입니다.
용서 받을 형들이 간곡히 빌어야 할 텐데 용서해줄 요셉이 오히려 간곡히 위로합니다.

이 모습이 주님과 인생과의 차이이고 세상 나라와 하늘나라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러셨습니다.

  눅 23: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테반집사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똑 같았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 중에 하나님 사랑을 더욱 경험하기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천국 기쁨을 더욱 누리기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용서」하십시오.
조건부 용서가 아니라
긍휼을 갖고 용서해 보십시오.
「분노」와「복수」보다 더 큰 희열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④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
아들 요셉이 출세를 하니 아버지 야곱이 호사를 누립니다.
◦ 바로 앞에 서고
◦ 바로를 축복하고
◦ 말년의 생활이 여유 있고,
◦ 죽어서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창 50:2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아버지께 복종하시기 위함이요
그 궁극적 목적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 모습은 모든 성도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 왜 삽니까?
◦ 왜 그 일을 이루어야 합니까?

  고후 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2) 형통한 사람

예수님 같은 요셉은 형통한 사람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 오래 전 한 청년이 대학입시에서 낙방했습니다.
낙심하여 좌절 중에 있는 청년에게 요셉의 생애를 읽도록 권하였는데,
그 다음날 툭툭 털고 일어나서 2차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청년이 발견한 교훈은 소위 「형통」이라는 이해였습니다.
세상에서의 형통은 「내 뜻」혹은 「우리 뜻」대로의 성공을 의미합니다만
성도에게의 형통은 「하나님 뜻」대로 되어지는 성공을 가리킵니다.

◦ 심리학자 찰스. 후케시 박사가
「성공이 사람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연구 발표했습니다.
내용인즉 「성공했다고 평가한 사람들의 반 정도가 불행을 느끼며 산다」였습니다.

무슨 얘기인가요?
한마디로, 성공했다고 우쭐대는 인물이든
아니면 성공했기에 부러움을 받는 인물이든
빚 좋은 개살구형 성공이 반이라는 뜻입니다.
행복치 못하면 성공은 아닙니다.
내가 만드는 성공의 실상이 이 모양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누리는 성공은 행복한 성공입니다.
성공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형통 비결이 나옵니다.
① 믿음

  잠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강조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3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23절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② 순종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아는 성도는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실천이 나옵니다.
대표적 성향이 주어진 임무에 「성실」입니다.

일전에 큰 아이가 학교에서 견학을 갔습니다.
오는 길에 비가 왔고, 관광버스에는 두 명만 남았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인즉 여의도까지 갔다 오기가 힘드니 중간에 내려서 다른 차를 타라고 강요하더랍니다.
싫다고 하니 욕을 하며 운전이 거칠어 졌답니다.
물론 인솔교사도 없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기사는 1명이라도 가야 되고
◦ 인솔교사는 끝까지 있어야 됩니다.
◦ 비 오는 날 거리를 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교육의 차이이며 신앙의 차이입니다.

우상을 섬겼던 신앙은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이 다릅니다.
성실이니 책임이니 보다는 편법이나 요령이 앞서고 부정부패 부실공사의 근원이 비롯됩니다.
우리 유학생들의 곤란 겪는 사항이 「거짓말」입니다.
「컨닝, 표절」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 대하고 기독교교육은 「성실」을 가르칩니다.

요셉이 여주인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고 감옥에서 전옥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성격적 우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었던 「믿음」입니다.

또 다른 성향은 「원만한 관계」입니다.
능력 있고 성실만이 성공의 원칙은 아닙니다.
주변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요셉이 관계를 잘 맺고 살았다는 증명이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를
◦ 「애굽의 큰 애통이라」고 여겼습니다.
히브리인이 애굽에서 이러한 칭찬을 들었습니다.
칭찬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 반복합니다만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관계 개선 한 것입니다.

  결  론

형통은 성공입니다.
이 성공에는 공식이 있는데 믿음+순종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작은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원망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최선의 삶을 가꿉니다.
그러므로 순간의 형통이 아닌 지속적인 형통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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