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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교회 ⑦ (행 13: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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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좋은 교회 ⑦
성경본문 사도행전 13:21-23

설교내용  오늘은 다윗의 모델을 가지고 좋은 교회의 모형을 함께 논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2절에 보면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난 하나님은 “그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좋은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교회”라고 주제를 정했습니다.

  다윗 모델

  다윗의 모델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시고 메시야 나라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이 합한 사람이 된 것과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람이 된 것은 오늘 우리의 모형이고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는 우리의 모범이고, 그가 세운 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 교회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은 신약에 많이 인용되고 있지만, 특히 구약에서는 그의 삶의 행적이 길게 소개 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과 삶을 담은 시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아주 감동적입니다. 다윗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시편 고백에서 확고하게 드러납니다. 시편 12편6절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전하며 흙 도가니에 일곱 번 연단한 은 같도다.” 8절에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 처처에 횡행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두 구절을 가지고 보면 다윗이 살던 그 시대에 악인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비루한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 우굴거리던 시대에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붙잡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연단받은 은과 같다, 불변하신 그 확고한 말씀을 붙잡고 다윗은 악인들을 대항하고 환난과 핍박을 극복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전에 듣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야 하고, 믿는 대로 실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은 설교 때마다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쉬운 원리입니다. 믿음은 연구소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실험실로 가야 합니다. 믿음은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에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26절에 보면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렇게 믿음은 행함과 함께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집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는 쉽게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지고, 증명이 되고,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간단한 원리를 다윗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실제로 말씀을 가감없이 믿었고 말씀을 붙잡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측면에서 오늘도 우리 믿음의 삶을 철저하게 반성을 해야 합니다.

  벨기에 여왕이 폴란드가 공산화 되어 있을 때, 폴란드를 국빈방문 했습니다. 벨기에 여왕은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경호하던 공산당 간부가 함께 여왕과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왕이 물었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공산당원인가요?” “나는 공산당의 이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천은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공산당원의 말은 모순논리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했고, 공산당의 이론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의 이론을 따라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 다 모순논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모순논리가 오늘 우리 안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죄합니다.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의 질서는 신앙과 배치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따라갑니다. 이 공산당 간부의 모순논리가 바로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모순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정상인 줄로 착각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과 삶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순종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물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과 싸우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싸웠습니다. 그는 장애물이 없어서 말씀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장애물들과 싸워서 주의 말씀이 말씀됨을 증거했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무우씨, 배추씨, 양파씨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 까맣고 좁쌀처럼 작습니다. 그러나 심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우씨에서는 무우가 나고, 배추씨에서는 배추가 납니다. 오늘 예배당을 찾은 여러분은 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은 얼마나 순수한지, 우리 믿음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합당한 믿음인지 사람의 눈으로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심어질 때 우리의 믿음은 믿은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믿음이 말씀으로 하나 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실험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실천되고 있는 실험실이 되기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 인생의 표지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목동이었습니다. 목동생활을 하는 그 때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했습니다. 형들이 사무엘을 만나러 간 사이 혼자 들판에서 양들을 지켰습니다. 사자와 곰들이 오면 물매로 물리치고, 양들을 지켰습니다.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훌륭한 목동으로서 일했습니다. 다윗은 그 중심이 언제나 하나님께 잡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에 그의 믿음은 확고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이것이 시편에 나와 있는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시편은 여호와를 높이고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형통함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련이 많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날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백전백승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흥왕할 때 그는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간음을 했고 살인을 했습니다. 위기입니다.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 그는 궁중을 떠나서 피난길에 오를 만큼 위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보면 다윗의 믿음은 사울 왕에게 쫓길 때 빛났고 그가 범죄하여 위기를 만났을 때 그의 믿음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위기를 당할 때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정면으로 돌파했습니다. 그가 범죄했을 때 정면으로 여호와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그가 위기를 만나고 생명의 위협이 올 때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돌파했습니다.

  다윗이 우리 앞에 보여주는 것은 사람이 겪는 어떤 환난과 위기와 범죄와 절망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능가하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능가하는 고난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스릴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을 다윗은 의지했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는 실패합니다. 내게 당한 고난이 하나님 보다 더 커 보입니다. 내가 당한 실패가 하나님 보다 더 커 보입니다. 거기서 우리 믿음은 방황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주권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권입니다. 헤롯을 다스리며, 바로 왕을 다스리며, 바벨탑, 노아 홍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날개 짓

  우리는 길 위에 길을 보고, 보이는 것 위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에 것을 생각하라.”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기에 하나님 백성을 가리켜 독수리에 비유했습니다.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독수리는 날개가 상징입니다. 독수리는 몸체를 자랑하는 짐승이 아닙니다. 날개를 자랑합니다. 독수리의 날개는 그 몸의 비중이 아주 큽니다. 만약에 독수리의 날개가 상해서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은 독수리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독수리가 땅에서 기면서 살아가는 독수리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능한 독수리가 되겠습니까? 독수리가 날개를 접고 기어 봤자 쥐새끼도 못 잡습니다. 독수리는 창공을 날라야 합니다. 그래야 독수리는 짐승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날개가 상한 독수리는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독수리라고 했습니다. 독수리라면 날개 짓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날개 짓을 하기 바랍니다. 성도가 믿음을 접고 살면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믿음의 날개를 접어 버리면 우리보다 날고뛰는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믿음의 날개를 접고 어떻게 이 땅을 살고자 합니까? 성도들은 믿음의 날개를 펼쳐야 합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그 무한한 믿음의 세계,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믿음의 세계를 맘껏 날개 짓을 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날개 짓을 거두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여행해 보면 내가 가는 길은 꽉 막혀 있는데 반대편 길은 뻥 뚫려서 생생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대도 그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갈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막혀도 이 길로 가야 내가 갈 목적지에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은 조금 막힌다고 그만 쉽게 옆길로 가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세상과 타협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날개 짓이 꺾여 버리는 것입니다.

  요즘 한나라당 천막당사, 열린우리당 폐건물당사가 TV에 자주 등장합니다. 정당의 당사 빌딩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권세의 극치입니다. 제가 전에 한나라당사, 민주당사도 가 보았습니다. 여의도에서 양쪽으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국회의사당이 보입니다. 그 당사에 들어가서 국회의원들을 만나보니 금뺏지 달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마치 하늘에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신분이었습니다.

  누가 대한민국의 여, 야당 당사가 천막에 가고 폐건물에 가기를 원합니까?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까? 정당 당사는 당사다운 빌딩에서 당사로서 존재해야지 천막, 폐건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의리의리한 빌딩에 당사가 있다 하더라도 중심이 국민에게 있었다면 천막에 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문제는 중심입니다. 오늘 시국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집에서 사느냐? 어떤 옷을 입는 외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중심이 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이것은 다윗의 외형이 아닙니다. 다윗의 믿음의 중심입니다. 여호와 앞에 합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과학을 믿는다면 여기 나와 예배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과학을 믿으면 됩니다. 지식을 따라가면 됩니다. 권력이 전부라면 권력을 찾아가세요. 물질이 전부라면 돈 벌러 가야지, 여기 나와 예배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권력, 물질, 지식을 좇아 거기에 목표가 있고, 행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의 삶 속에서 대가를 치룬 사람입니다. 다윗의 영광은 이 땅위의 영광 가운데 최고의 영광입니다. 다윗의 영광은 그저 얻은 영광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값을 치루었습니다. 그 대가에 의해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여호와의 뜻을 이루는 메시야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성숙해 가는 삶

  사람을 세 부류로 분류합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없어도 될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되지 말고, 없어도 될 사람 되지 말고,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해석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 교회, 사회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있으나마나 한 사람도 꼭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있으나마나 한 이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고 잘 키워야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발전합니다. 지금 있으나마나 하다고 무시해 버리고, 제거해 버릴 수 없습니다. 있으나마나 한 사람도 교회에 꼭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항상 있으나마나 한 사람으로 머물면 안 됩니다. 거기서 한 단계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없어도 되는 사람을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처음부터 없어도 될 사람은 안 됩니다. 처음부터 없어도 될 사람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없어도 될 사람은 대단히 귀합니다. 이 사람은 누가 되는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나중에는 없어도 될 사람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교회 앞에 충성, 희생하고 내 몫을 바로 감당하면 훗날에는 내가  없어도 이 교회는 발전할 줄로 믿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항상 짐을 져야 하고, 내가 늙어서도 내 가정을 붙잡아야 하는 그런 집 보다는 후손들이 키워져서 이제는 내가 직업이 없어도,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그 가정이 발전해 가는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교회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현재는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사셔야 합니다. 내 몫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훗날에는 내가 없어도 이 교회는 만세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로 발전할 것입니다.

  내가 없어도 되는 사람의 경지로 가십시오. 은퇴하고 나서 후세대가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내가 내 몫을 다해주고 가면 그 이상은 없습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는 성전건축은 하지 않았지만 성전건축의 설계도 까지 다 내 놓고 솔로몬에게 이스라엘 왕국을 넘겨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람의 가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립니다.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다윗의 모델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재산을 축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메시야 조상으로서의 희생을 우리 앞에 보여 주었습니다. 메시야 나라는 말씀으로 사는 그 아름다운 삶의 대가가 그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느 왕이 있었습니다. 공주가 병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주의 병을 낫게 해 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을 뿐 아니라 왕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큰형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든 볼 수 있는 망원경입니다. 둘째 형은 양탄자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만 타면 어디든지 삽시간에 갑니다. 셋째는 사과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과는 누구든 먹으면 죽을병도 낫는 신비로운 사과입니다. 어느 날 큰 형이 망원경으로 보니 공주가 병들어 죽어갑니다. 양탄자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과를 먹여 공주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왕이 고민했습니다. 삼형제가 와서 공주를 살렸기 때문에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고민을 하자 지혜로운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은 분명합니다. 망원경은 도로 가져가면 되고, 양탄자도 도로 가져가면 되지만, 사과는 먹어 없어졌기 때문에 사과를 준 사람을 사위로 맞아야 합니다.” “아, 그 말이 옳도다.” 셋째를 사위로 삼아서 왕의 후계자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희생한 것만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도로 가져 갈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애 속에 하나님께로 받은 것이 내 손에 남아 있다면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귀신도 믿고 있다, 그러나 귀신은 말씀을 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고 행하지 않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다.’ 그만큼 야고보는 믿음의 행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그리고 또 하나 강조합니다. 야고보서 4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왜 멀어집니까? 내가 하나님과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가셔서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떠나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론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수중에 잡혀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위기를 만나도 하나님이 즉각 개입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멀어진 인간관계가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의 파괴가 심각한 위기입니다. 한 가족이면서도 먼 가족이 많습니다. 우리의 우정이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공연히 무관심해지고, 미워지고, 시기, 질투로 멀어진 우리의 인간관계가 가까워지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가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의 부동자금, 투기로 돌아다니는 자금이 400조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400조원과 가까워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이웃을 가까이 하고, 돈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400조원 붙잡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합시다. 그 많은 돈이 빙빙 돌아다니는데 왜 나에게는 잡히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무리 돈을 가까이 해도 탈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이 돈을 가질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웃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돈을 가질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입니다. 다윗만큼 믿음 좋은 사람이 없고, 다윗만큼 부자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그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맺는 말

  우리가 깨닫고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사는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사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자기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늘 함께 하시고, 교회를 주목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에 헌신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일에 수고해야 합니다. 진실로 좋은 교회의 모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윗의 모델은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좋은 교회로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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