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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목마르다 (요 19: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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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마르다’       
요19:28-29 -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은 부활주일 전 주일로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더 깊이 새겨보는 주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마디 말씀은 가상칠언이라고 하는데 고난주일마다 이 말씀을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말씀인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가상칠언 가운데 가장 짧은 말씀입니다. 헬라어 글자로 네 글자, 단어로 한 단어, 우리말 음역으로 두 글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육체와 신체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짧고 간단하며 이해하기 힘들지 않은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며 비극적인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목이 말라 입술이 타고 있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아닙니까?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시는 자가 목마르다고 외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인 말씀이 아닙니까? 오늘은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 모습을 역역히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성품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는 인간의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 심오해서 받아들여 믿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우리의 이성으로 파고들어 사색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한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의 양면이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말했습니다. 딤전3:16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가운데 올리우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가 하나님의 신분을 그만 두셨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빌2:6-7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갓난아이로 태어나 어린이로, 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와 꼭같은 인성을 가진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위에서 목이 타고 입이 타서 “내가 목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영화의 몸으로 변화된 영체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거기에는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 죄악의 갈보리에 서 계셨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서 계셨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과 갈증을 심하게 느꼈습니다. 인간이기에 당하신 고통이었습니다.

  2. 이것은 예수님의 고통의 모습을 역역히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목마르다는 이 말씀은 고통의 말씀이며 아픔과 괴로움의 절규입니다. 예수님은 사정없이 내려쬐는 햇볕을 받으며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여섯시간동안 처절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신음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습니다. 남을 원망하는 말씀이나 자비를 구하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침묵 속에 견디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의 전신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그의 입술이 타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목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목마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의 영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을 더 크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에 두 강도와 같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했습니다. 진통제를 맞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감각기관이 마비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모든 기능들을 통제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통, 우리의 궁핍, 우리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수술을 할 때는 마취를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그 고통을 참으셨고, 완전한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감정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을 다 당하셨고,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탁상공론식으로 이론적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영혼이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만큼이나 큰 고통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3. 이것은 예수님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모습을 역역히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무서운 고통과 아픔 가운데서도 여전히 성경말씀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육체는 고통과 아픔과 갈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주님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쏠려있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의 중심점이었고, 마음과 생각의 등불이었고, 예수님의 나아갈 방향의 좌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시편69편입니다. 시편 69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메시야 시편입니다. 21절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를 성경은 요19:29에 너무도 분명하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얼마나 침착하셨으며 정신이 또렷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여부를 완전히 분별하고 계셨습니다. 나의 갈증을 대신하여 육체와 영혼의 갈증을 겪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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