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죽음 (갈 2:20-21)

  • 잡초 잡초
  • 223
  • 0

첨부 1



그리스도의 죽음 (갈라디아서 2:20-21)


지난 24일(현지 시간), 자살폭탄공격을 시도하려다가 이스라엘군에 붙잡힌 팔레스타인 16살 소년, 후삼 압도. 왜 그 어린나이에 자살폭탄공격을 시도하려 했을까?

그 소년은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답니다. 압도는 “학교에서 못 생긴 난쟁이라고 놀림 받고, 죽고 싶었다고 하면서, 23일 밤, 자폭공격을 결심했으며, 친구들이 폭탄을 설치해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죽으면 천국에 가서 72명의 처녀들이 자신을 대접해 준다는 기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왕따, 집단 따돌림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어떨까?
제자들이 새끼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들 그 등에 걸쳐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이 많은 생나무가지들(요한복음은 종려나무)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 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러분 상상이 되세요? 그림이 그려집니까? 이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때했을 것 같습니까? 흐뭇했을까요? 감개무량 했을까요? “이 사람들이 이재야 나를 제대로 알아보는구나” 그렇게 생각 했을까요?
왕따의 의미가 집단 따돌림이라면, 예수님도 이 날 왕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환호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의도가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환호성은,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 왕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기만 하면, 이제 이 나라는 로마의 앞 제에서 해방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날, 기억에도 까마득한 다윗의 나라가 실현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으니, 이제 틀림없이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당신의 이 길이 어떠한 길인지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며 죽음의 길인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저렇게 환호하는 사람들이 몇 날이 못 되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될 것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쓸쓸한 길입니다. 천만가지의 생각들이 얽히고 얽힌 그런 순간입니다.
사실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치고 고통을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역시 십자가 고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될 수만 있으며 이 잔이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죽음의 길인 줄 뻔히 알면서 왜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을까?

요즈음 읽고 있는 책 중, 미국 스캇스데일 가정교회 원로 목사이신 앨린 넬슨의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은 리더십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책 제목은 ‘시대가 원하는 영성 리더십’입니다. 영성과 리더십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넬슨목사님은 빌립보서 2장 3-9절을 인용합니다. 5절부터 9절까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넬슨 목사님은 예수께서는 자기 권리를 계속 스스로 포기하는 삶을 사셨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 곧 바로 자기 자신이 될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유전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똑 같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포기하셨습니다. 포기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시작인 겁니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 포기하신 것은 존경 받을 권리입니다.
왕궁에 태어나, 흰 마차를 타고 자기 왕국을 돌아보아 될 분이, 슬그머니 뒷문을 열고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더욱이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기 원하셨으나 권세를 휘두르면서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길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생명의 창조자 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 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죽지 않으셨다면, 구원 계획 같은 건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권리를 포기 하셨음을 말하는 빌립보서 2장 3-9절의 본문을 흔히 ‘케노시스’ 본문이라 하는데, 그것은 ‘포기’ 또는 ‘비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비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독과 포기, 비움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그 길은 곧 드림의 길이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제물로 삼기 위해 속죄의 제물을 성소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죽을 자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요,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사도들이 맨 처음 설교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과 그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께서 전해들은 중요한 것이요, 또한 모든 사람에게 전해 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입니까?
수많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 값으로 달려 죽은 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치욕이요,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자랑이 십자가 입니까?
그것은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달려 죽으신 곳이 십자가 입니다. 죄인들이 자기의 죽을 죄 값을 치루기 위해달려 죽은 곳이 십자가였는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과 저의 죽을 죄 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신 곳이 십자가 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성 밖 갈보리라고 하는 언덕 위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중앙에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달려서 죽어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있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머리엔 가시 면류관을 씌워 찢어져 피가 흐릅니다. 매와 채찍에 맞은 온 몸은 상처요, 피투성이 입니다. 굵은 통나무에 큰 못으로 박힌 두 손과 발, 거기에선 뚝뚝 피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라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에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바로 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그리스도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은요, 누구나 다 똑 같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다를 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사 53:6) 그분은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 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때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입니다.(사 53:12)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20:2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 중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고자 하는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성인군자나 그렇지 못한 사람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버림 받은 자의 비참함과 영원한 죽음에 빠져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런 우리를 살려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지만, 죄인이지만, 이미 그 영혼은 죽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으신 겁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가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 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고난 주일입니다. 이 한 주간이 고난 주간 입니다. 그래서 말들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 그런데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이 한 주간만이라도 매일 금식할까요? 웃지도 말고, 늘 고통스러운 얼굴, 슬픈 얼굴을 하고 지낼까요? 올해도 어디서 십자가 만들어 매달렸다는 소식이 들려 올 겁니다. 십자가 만들어 지고 교대로 걸었다는 그런 이야기도 나올 겁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까?
보세요. 십자가는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 뭔가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이미 다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분이 죽으셨고, 그래서 인류의 구원은 완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고난 주간에만 슬픔기색으로 살다가, 다른 날에는 예수님의 고난 같은 거 생각지도 않고 사는 그런 거 아닙니다. 다른 날에는 제 멋대로, 자기의 삶을 살다가, 고난주간에나 겨우 경건의 모습으로 사는 그런 거 아닙니다.
소개 드린 넬슨 목사님의 책, ‘시대가 원하는 영성과 리더십’에서 넬슨목사님은 빌립보서 2장 3-9절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곧 바로 자기 자신이 될 권리를 포기하셨다고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존경받을 권리를 포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길 권리를 포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빌립보서 2장5절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며, 그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며,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넬슨목사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곧 바로 자기 자신이 될 권리를 포기하여야 합니다. “내가 누군데.” “나도 인간이다.” “나도 그럴 권리 있다.” “난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아.” “나는 뭐 자존심이 없나?” 이 내가 되려고 하는, 나의 나됨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그 본질이 하나님이셨지만, 그 본질을 물려받은 존재, 곧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길 포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내 자존심이 살아 있는 한, 내가 누군데 하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쓰시지 않으십니다.
존경 받을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참된 존경심은 지위나 직함, 사무실 크기, 앞자리나 높은 자리에 앉는 일, 남의 대접 받거나 인사 받는 일 따위와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슬그머니 뒷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 존경 받는 것입니다.
이길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누구하고 논쟁합니다. 끝까지 우겨서 내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사람하고 관계는 끝장 난 겁니다. 자존심만 챙기다 보면 사람을 잃을 수 있습니다. 눈앞의 목표에만 급급하다 보면, 장기적인 목표를 그르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절,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문제가 뭡니까? 자기를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역시 자기를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거기 14절,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내 뭐 어쨌다는 게 자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십시오.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곧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실 때 나도 죽었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죽은 겁니다.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뿐입니다.

여러분의 과거, 어제, 아니, 조금 전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래서 그분으로 인해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 이 순간부터, 이 몸은 이제 내 몸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이제 내 생명이 아닙니다. 이 산다고 하는 것 또한 이젠 내 삶이 아닙니다. 이제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 곧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랑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카돌릭 문학가 앤도 슈사꾸의 명작소설 “침묵”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포루투칼, 로마, 일본의 사료를 정확히 조사한 실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크리스토프 페레라 신부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보고가 포루투칼에 들려옵니다. 페레라신부는 신앙 면에서, 또 신학자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제적 인물입니다. 그가 배교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일본의 도쿠가와 정권의 고문이 심했다고 해도, 페레라 신부가 예수님을 부인 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놀랍고 큰 충격을 주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격분한 그의 제자 세 명의 청년 신부들이 그 뉴스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자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숨어들어 갑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 합니다.
그 세 명의 청년신부 중 하나, 제바스티안 로드리고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뒤에 그도 역시 체포되어 후미에 앞으로 끌려갑니다. 후미에란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인 것인데,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가사키의 영주 이노우에가 고안한 것인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을 살려주려는 취지로 만들었답니다. 검사관 이외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짧은 시간에 슬쩍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해가 가장 심했던 도쿠가와 이애야스(덕천가강)시대에도, 이토록 쉬운 형식도 거부하고 사형당한 순교자가 수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도 후미에 앞에 섰습니다. 후미에. 그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얼른 밟고 지나가면 살고 거절하면 그는 죽음을 당합니다.
로드리고는 그 앞에서 후미에를 내려다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기에 동판에 새겨진 예수님의 상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이 울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몹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같이도 보였습니다. 적어도 유럽, 그들의 땅에서 보던, 왕관을 쓴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함께 고통 받는 예수님, 함께 울고 함께 괴로워하는 예수님 이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후미애의 예수님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너의 마음은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 신부가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 신부가 예수님의 상을 밟는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가야바 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며, 괴로워하신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눈동자에는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님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 합니다.”
그것이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목음이 우리에게 증인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거둘 수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동요되지 않고, 죽음의 면전에서 웃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히 설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