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게 뭐 이상합니까? (행 3:11-15)

  • 잡초 잡초
  • 228
  • 0

첨부 1


사도행전 3:11-15              2004년 4월 11일
이게 뭐 이상합니까?

세상에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 과학문명이 너무 많이 발달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이란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필름 없는 사진기(디지털 카메라)를 어떻게 상상했겠습니까? 엠피쓰리(mp3)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외에 우리 집에 있는 가전제품이 몇 십년 전만해도 꿈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현실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 하도 세상이 빠르게 변하니 이젠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오늘 이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갑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메고 성전 문 앞에 두었습니다.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문의 단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우리를 보라.” 했습니다. 그는 몇 푼의 돈을 얻을까 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오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사람이 놀라워했습니다.

때에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하면서 설교했습니다. 너희가 죄 없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도리어 살인강도를 놓아주었다. 너희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도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런 어느 날 마귀가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하와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했습니다. 여자가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고 했습니다. 때에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각종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6-17)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거짓말 했습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특징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욕심이 문제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자 마음이 변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는 이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먹고 말았습니다. 이 죄를 우리는 원죄(Original sin)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무섭습니다. 성욕 정말 겁이 납니다. 명예욕을 자제 못해서 패가망신 하는 사람 많이 봅니다. 아담부부는 인류역사에 가장 행복했습니다. 건강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어느 하나 불편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비탈길로 미끄러진 것입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해 두었더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프고 우울하고 죽는 것 다 아담 하와가 지은 죄값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불행한 무덤을 판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버리셔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이십니다. 우리에게 살 길을 주신 것 입니다. 이 죄값을 하나님의 이들이 치르시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이러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신 이가 예수님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십자가는 생성원리의 기본입니다. 시간은 가로로 흐릅니다. 공간은 세로로 뻗힙니다. 옷을 짜도 가로주과 세로줄이 합쳐야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해는 십자가 뿐 이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는 기독교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주 무서운 사형 틀 이었습니다. 흉악범이나 정치범에게 집행하는 사형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심으로 생명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우리의 심벌이고 자랑입니다. 영광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 기둥이 서 있습니다. 성물마다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삽자가 메달, 목걸이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고통을 말해 뭘 합니까? 이보다 더 아프고 힘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이 삽자가의 은혜를 모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소개 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중략....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 시의 배경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그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교원주의자들의 희생 제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조금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비겁한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너희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아 죽였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봅니다. 물론 사람이 죽었다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큼 확실한 일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인 것입니다.

부활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활절에 대한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부활절이 되면 한 달도 더 전부터 부활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부활을 확실 한 때가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정말 이것만은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 합니다. 일어 날 수 없는 일이니까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나심. 그 행하신일. 부활. 어느 하나도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유명한 탤런트(강석우)씨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는 모태신앙이랍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활절을 앞두고 특별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답니다. 그게 결혼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답니다. 그는 집을 지어 분양이 되지 않았답니다. 그는 새벽강단에 무릎을 꿇었답니다. 그러자 곧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답니다. 그는 3년 전부터 교회예배위원으로 안내를 한다고 합니다. 서울 음대 김인혜 교수님은 늘 자신의 부족과 실수를 부활의 주님 보며 의지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길이며 진리입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을 비웃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부활이 잘 이해되시지 않으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알려고 하시지 마십시오. 믿으려고 하십시오. 우리 이 세상 다 압니까? 모르는 것이 아는 것 보다 몇 만 배가 넘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목회자 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합니다.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습니다. 그래도 목회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실수투성입니다. 과연 내가 이래서 되겠나!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부활에 대해이러니 저러니 말 할 수 있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부활의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 역사에 영원한 쓰레기였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맺는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사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남다를 데가 많은 뛰어난 사도였습니다. 그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비겁한 제가가 되고 맙니다. 그는 이어도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남달리 비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닭이 울자 통곡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 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로마 장교의 창과 칼이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의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게 뭐 이상하냐? 나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내가 이 일의 증인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믿음이 강하고 담대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일의 증인 되셔서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