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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 우느냐? -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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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1~18


독실한 기독교인이 거리를 지나가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을 보게되었습니다. 억제할 수 없는 감격 속에서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 소년이 옆에 와서 “아저씨,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예수님이시고요, 십자가 밑에서 슬픈 얼굴로 바라보는 분은 예수님의 어머니예요. 저쪽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거구요.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어요. 저 건너편에 있는 것은 예수님을 묻은 무덤이에요” 라고 그림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기독교인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의 신앙을 감탄하며 가던 길을 다시 가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갑자기 옷자락을 잡아당기었습니다. 돌아보니 아까 그 소년입니다. 소년은 헐떡거리면서, “아저씨,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부활사건을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절망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십니다. 답답하고 괴로울 때 위로해주시고 해결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과 다시 삶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울면서 태어나 울리고 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울음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할까하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나지만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나는 인생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를 발라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무덤을 바라보며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어찌하여 우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음의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어찌하여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고 있느냐의 뜻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포구에서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림처럼 떠있는 작은 섬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어 있는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섬이지만 일찍이 이 섬은 중형을 받은 죄수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육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지만, 배를 타고 가도 4-50분은 족히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섬입니다. 그리 멀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죄수들이 감사의 눈을 피해 교도소를 탈출하려고 바다로 뛰어 들어 헤엄쳐 도망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굽이도는 급류 때문에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해변가와 교도소 문에 그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오직 한길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당신 자신이 변화되는 길뿐이다."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 말씀은 마리아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부활신앙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요구였습니다. 힘들고 험한 세상 속에 살아 계셔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 주님을 깊이 사랑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주님 무덤에 올만큼 열심 있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무덤이었고, 죽음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모두가 불신앙적인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불신앙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부활신앙을 가졌을 때 절망과 슬픔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고독하고 외로운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는 길 외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불신앙적인 상황에서 변화되면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 뵙고 철저하게 부활신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육체적인 죽음이 와도 다시 살 것이라는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앞에서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면서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는 모습에서 신앙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 “주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다시 살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 삶은 긍정적인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적인 불신앙의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부활신앙을 언제나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찌하여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느냐의 뜻입니다

남극 탐험대가 추위와 피로로 극한적인 절망에 빠졌을 때 그들은 대원 숫자보다 늘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힘들 때면 언제나 나타나셔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그 분 때문에 그들은 그 어려운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탐험대로부터 직접 들었던 엘리옷 시인이 ‘제 3자’ 라는 시를 썼습니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 3자는 누구요? 세어보면 언제나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네.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서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누구요?"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뒤에 서 계셨는데 무덤만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물으셨을 때도 무덤지기인줄 알고 “내 주를 어디에 갔다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 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바로 뒤에 서 계시면서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찾아오셨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만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산다 하면서 때때로 좌절과 실패를 이유로 무덤만을 쳐다보는 삶을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찌하여 우느냐” 의 질문은 너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세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등지고 서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대하였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심한 슬픔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옳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세상만 바라보게 되면 절망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서서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해결이 있습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마리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무덤을 찾던 신앙이 이제 무덤을 내려가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염려하며, 슬퍼하며 올라가던 모습이 변하여 찬송하며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리아는 비로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하기까지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섬김은 섬김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는 아무런 기쁨도 희열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답답함과 근심과 걱정으로 뒤덮여 있을 뿐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확신할 수 있을 때 바른 믿음 생활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서야 예배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세상의 방향인 무덤을 바라봄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향하는 영적시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찌하여 부활의 주님을 전하지 않느냐의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만 되면 즐거운 낯으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인사의 내용은 "예수 다시 사셨네" 의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도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면 "진실로 부활 하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를 공산당이 혁명으로 완전히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한 공산주의자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수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사기꾼인가를 열심히 입증하면서, "이 중에 누구든지 내 이론을 반대해서 이야기할 사람은 나오시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안나올 줄 알았는데 한 젊은이가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공산주의자는 당황해서 “5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시간제한을 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가 "나는 5분도 필요 없고 5초면 됩니다." 라고 하더니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파됨을 막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른 새벽에 찢어질 듯한 아픔으로 고통과 한숨과 눈물 가운데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 고 하셨습니다.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지금 놀라운 소식이 처음으로 공포되는 소중한 시간에 서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울고만 있는 것이냐?" 하시면서 이제 일어나 부활 소식을 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한 사람은 울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첫 번째 부활의 증인이 되어 달려가고 있습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제자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확인시켜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가서 부활의 소식만 전하면 됩니다. 믿고 전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가시어 확증해 주셨습니다. 확증의 뜻은 우리가 하는 예배, 우리가 드리는 헌신, 우리가 감당하는 사역들은 불완전하나, 주님께 순종하며 감당하면 완전한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더 가까이 계시고, 힘들어할 때 친히 업고 가시면서 부활 중인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며 부활의 소식을 전할 때 우리의 불완전한 부분을 완전한 것으로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고 지쳐서 울고 싶을 때, 여러분 앞에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내 앞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모든 슬픔과 고통이 끝이 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눈물의 근원이 없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인생의 비극이 끝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는 데 왜 울고 있느냐?”고.
이제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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