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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는 도(道)를 전합시다 (행 4: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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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도(道)를 전합시다
사도행전 4 : 1 - 12
(4월 11일 주일 설교 말씀) 
 
세간에는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흔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essence)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과연 부활이 가능한가라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뜨거운 감자(a hot potato)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무언가 부활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고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부활절과 성탄절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갖은 모욕을 당할 때 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하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할 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하니 베드로가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마 26:60-75).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은 옛날의 연약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적 복음 전파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운동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 부활의 도를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 천이나 되었습니다(행 4:4).

이것을 본 사두개인들이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4장 7절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뉘 이름으로』 라는 말도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했는지를 심문하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기독신자들을 핍박할 목적으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는 그의 생애동안 한번도 주님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그가 핍박자일 때 만난 그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예수 세계화 운동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道)를 가르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Ⅰ. 부활은 믿는 자들의 최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에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들이어서 부활은 믿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부활도 우리의 소망이지만 악한 자의 심판의 부활도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데 불신자들이 죽어서 그 몸과 영혼이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성도와 같이 살아서 그들이 지은 죄악의 보응으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듯이 영벌도 있어야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마 25:26). 이 진리만 믿는다면 악인의 형통이나 그들이 성도에게 하는 핍박이나 무고히 해치는 억울한 일들을 적어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5장 9-10절에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고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2장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Ⅱ. 부활은 복음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행 7:1). 바울의 전도 메시지와 설교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진리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예수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소망을 전하다가 한결같이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까지 했습니다.

Ⅲ. 부활은 성도 구원의 보장이기 때문입 니다.

본문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 믿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2) 의인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3) 구원의 확정이 되었습니다.
본문 4장 9-10절에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Ⅳ. 부활 증거는 성도에게 주어진 필연적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1) 패권문화 중심에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로마는 패권국가로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1절에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하신 말씀이 로마로 보낸다는 것을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당시의 패권국가인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복음 사역이 위험이 따르고 힘든다는 것을 암시하시면서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그리고 과학 문명 전역에 걸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담대하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2) 도취되어 집중력 있게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25절에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옥같은 변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바울을 베스도가 막았습니다. 가이사랴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그가 진지하게 부활을 증거하는 바울을 볼 때 미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베스도는 생각하기를 바울이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조리 있고 논리적 체계와 학적인 술어로 부활을 증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소리를 개의치 아니했습니다. 베스도의 영적 무지함이 바울을 미쳤다고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미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고후 5:13). 예수님께서도 살아 계실 때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요 10:20).

3) 역사적 사실에 힘입어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6절에 『왕께서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그립바 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도 역사적 사실로 공개되었고(눅 22:53) 그의 죽음도 역사의 무대에 공개적이었고(눅 23:2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을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된 것입니다(마 28:9-11).

사실은 언제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가장 능력 있고 효과 있는 언어입니다. 사실을 거짓처럼 전하지 말고 사실을 사실처럼 믿고 전해야 될 것입니다.
세월의 무게가 역사적인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 세계화 운동에 부활신앙을 믿는 자들의 최대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복음 운동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성도 구원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성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패권문화 중심에도, 과학문명의 중심에도 전해야 합니다. 도취되어 집중력 있게 전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힘입어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도 교리적으로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도 잘 정리된 책을 통해서 혹은 신학을 통해서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the first fruits of resurrection; 고전 15:20-23)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spiritual body; 고전 15:44)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육의 몸(natural body)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을 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빈 무덤이 이해가 되십니까? 부활을 믿으십시오. 부활은 우리가 가진 과학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교회는 존재하지 아니 했을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를 따라 가는 이유도 주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empty tomb)은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다고 해서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마 28:6)고 여자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눅 24:8).
Just as he said 예수님은 평소에 말씀하신 그대로,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according to the scriptures ; 고전 15:3-4)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제 1차적 이유입니다.

빈 무덤이나 천사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말씀하셨던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afrid yet filled with joy) 제자들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죽은 몸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입니다. 놀라운 일은 달려가던 여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고 만나주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산히 깨져 버렸던 그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갈릴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의 삶의 지평(horizon)을 한없이 넓혀 주셨습니다. 전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았던 곳입니다. 주님은 그곳 갈릴리에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마 28:19-20).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승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높일 때 주께서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죄 값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모두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기만 하십시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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