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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부활절 (행 17: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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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오늘의 부활절 
본 문 : 사도행전 17장 16~18절

얼마 전 주목할 만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았습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6학년 학생 100명을 대상으로 우리가 지키고 있는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입니다.

4대 국경일인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 그리고 개천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학생은 4%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단지 국경일을 ‘태극기 다는 날’ 정도로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개천절은 ‘사람과 곰이 결혼한 날’로 알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고, 제헌절을 ‘군인들의 명복을 비는 날’로 현충일과 혼동하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와 같은 정체불명의 이벤트데이들에 대해서는 무려 80%의 어린이들이 날자와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는 소위 14days(다이어리데이, 로즈데이, 링데이, 레드데이)들에 대해서도 많은 어린이들이 잘 알고 있더랍니다.

정말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존재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고, 그 의미와 정신을 계승하자고 국경일을 정해놓았습니다. 이것을 잊는다면 “오늘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간 염려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절기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요? 그 사건을 기리고, 그 의미와 정신을 오늘 계승하고 있을까요?

기독교 절기를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어제의 사건으로 기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정성을 다해서 기념합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삶과는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못합니다. 어제의 주님의 부활이 오늘 나의 삶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부활절은 어제의 부활절일 뿐입니다.

둘은 내일의 사건으로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장차 죽은 뒤에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오늘 주 안에서 복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도 주님처럼 부활해서 계속 복된 삶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삶과는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못합니다. 내일 부활할 것은 믿지만 그것이 오늘 나의 삶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부활절은 내일의 부활절일 뿐입니다.

셋은 오늘의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늘의 삶 속에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이들은 삶이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부활절은 오늘의 부활절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절은 오늘의 부활절이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고 알아온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소망 가운데 장차 죽은 뒤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정도여서도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오늘의 부활절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오늘의 부활절을 지킬 수 있을지 그 답을 찾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베뢰아에서 선교하던 중에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뜯고 거기까지 쫓아와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 때 몇몇 믿음의 형제들의 인도를 받아 아덴으로 피했습니다. 아직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있었는데 저들이 올 때까지 아덴에 머물러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한참 선교 여행 중입니다. 박해를 무릎 쓰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원래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교회를 괴롭히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심지어 외국에 까지 쫓아가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180도 변한 것입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행 9장에서 자세하게 그 사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가 기독교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이라는 먼 타국의 도시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가고 있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9:3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 박해자가 전도자로 변하게 된 동기는 예수를 만난 체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는 도대체 어떤 예수인가 하는 점입니다. 시점으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이 땅에서 메시야로 사역하실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덤에서 부활하신 뒤 40일간 이 땅에 계시던 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때는 분명히 예수님은 승천하신 뒤였습니다.

그러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고전 15:8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도들처럼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예수님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자기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정말 놀라운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이지만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일어나신 능력의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놀라운 능력의 주님을 만나 그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바울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폴 틸릭이라는 신학자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우리의 생명의 실낱을 끊는 가위만은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우리의 실존의 의장 속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짜 넣어진 실과도 같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짜 넣어진 실과도 같은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전존재를 시시각각으로 조형하여 가는 세력입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은 그의 생명에 죽음이 현존하고 있다는 자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삶 속에 짜 넣어진 것이어서 우리의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죽음의 세력 안에 살면서 죽음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하며, 좌절과 절망을 느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됩니다. 영생을 얻고 이미 맛보고 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느끼고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부활의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부활절을 지키려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삶에 찾아오셔야 합니다.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아덴이라는 도시 곳곳에 우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는 것입니다.

아덴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본산지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올림포스의 제우스를 비롯한 12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신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제우스를 비롯한 12신을 섬기는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곳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신의 형상을 한 우상들로 가득했습니다. 23절을 보면 그것도 모자라 혹시 자기들이 모르는 신이 있는데 그 신에 대한 숭배가 빠질까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신 20:4-5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분노가 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 바울은 구체적인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금주 15일이 총선입니다. 이번 총선은 그 어느 총선과는 성격이 무척이나 다릅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기준이 과거에는 인물 중심으로 뽑거나, 정책 중심으로 뽑거나, 아니면 지역 중심으로 뽑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코드 중심으로 뽑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전체 분위기가 대통령과 코드가 같은 사람을 뽑을 것이냐 대통령과 코드가 다른 사람을 뽑을 것이냐 라는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친노냐 반노냐 라는 식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아니고 국회의원 선거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코드가 바뀝니다. 세상의 코드에서 하나님의 코드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나도 싫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맞춰지게 됩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부활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자신이 어떻게 새사람이 됐는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제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 제가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으며 제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의 눈에 악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보였으며 선으로 보였던 것이 악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가 변합니다.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금번 부활절에 우리가 더 변화해서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부활절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너무도 소중한 사건입니다.


부활을 전했습니다.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바울이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 특히 에비구레오 철학자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에피쿠르스 학파와 스도이고 철학자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스토아학파에게 예수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라는 전혀 다른 철학적 입장으로 당대 헬라 철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예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웃음거리요 미친소리 취급을 받았지만 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이렇게 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한 것입니다. 그는 고후 5:13-4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큰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주를 위해 미쳤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온통 세상이 꽃 대궐입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철쭉 같은 봄철 꽃들이 만개해서 이 세상을 확 바꿔놓았습니다. 봄철에 피는 꽃들은 거의 대부분 꽃부터 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꽃부터 피고 나서 잎사귀가 돋습니다. 그래서 그 화사함이 극치를 이룹니다.
저는 봄철만 되면 침묵하던 대지가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 봉우리를 터뜨리며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봄이 왔다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저 남쪽에서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면서 이런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봄바람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 그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바람이 심령에 불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예수 부활하셨다고 외치게 됩니다.

즐거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3월 21일 환영을 받으신 유앤미 아파트의 김성하 이지은 부부 이야기입니다. 김성하씨가 지병으로 고생하고 계셨습니다.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셨는데 한 번은 꿈에서 낯선 사람들이 와서 가자고 하더랍니다. 직감으로 뿌리치고 눈을 떠보니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부인 이지은씨에게 성경을 가져다 읽어달라고 하더랍니다. 교회도 다녀보지 않은 분이 무슨 성경인가 싶어서 망설였는데 마침 그 방에 믿는 분이 계셔서 성경을 빌려다가 읽어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우리 전도대원을 만나 전도를 받고 이지은씨가 등록을 했습니다.
김성하씨가 상태가 심각해 져서 병상세례를 청했습니다. 가서 복음을 제시하고 병상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이분이 제일 위독해서 제일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나머지 네 사람은 다 죽었는데 병상세례를 받고 나서 이 분만 호전돼서 일반병실로 올라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구역식구들이 심방을 가보니 이 이지은씨가 일반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더랍니다. 교회라고는 두 번 나온 것이 전부인 생초신자가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전도를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소리쳐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에 일평생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면 입을 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절이 어제의 부활절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단순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자리가 되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내일의 부활절이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장차 부활할 것을 믿음으로 부활사건을 내일로 미뤄서도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부활절은 오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나아가 주님의 부활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부활절을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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