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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여기에서 살아나신 주님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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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4월11일 말씀 
제목 : 여기에서 살아나신 주님 
본문 : 누가복음 24:1~12   

몇일 전에 의경이 아파트 주변을 순찰하다가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12층 난간에 4살된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때마침 엄마가 밑에서 그 모습을 보고 울면서 급히 뛰어 올라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이는 힘이 빠져서 밑으로 떨아지고 말았다. 아이의 엄마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밑에서는 의경이 아이가 떨어지면 받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 뒤로 넘어져서 아이의 팔이 부러질 정도이었지 생명은 건졌다고 한다.
요즈음에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이의 생명을 건졌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이렇게 어린아이가 난간에 매달려 숨가뿐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 교인 중에 한 분은 공사 현장에서 흙더미에 묻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하루 하루를 넘기듯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며 남은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서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업을 하는 분들도 여러 형편으로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한달 한달을 어렵게 넘어가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난간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 누군가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이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확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 메시지를 본문을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돌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사흘이 되던 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향유를 갖고서 무덤을 찾아갔다. 찾아갔는데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근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을 때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하기를,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전한다. 주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는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마치 난간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살아나셨다고 하였는데 “여기”가 어디를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살아나셨다고 말한 “여기”는 돌무덤이었다. 무덤은 죽은 사람을 두는 곳이다. 주님이 여기에서 살아나셨다는 말씀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살아나셨다는 말씀이다.

어떤 분이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간암일찌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직검사를 하고서 결과를 보러 가서 의사선생님하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분은 의사의 입 만 쳐다보았다고 한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저 입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서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의사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날로 몸이 불편한 곳이 싸악 나았다고 한다. 이렇게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면 그것이 기쁜 일이다.

바울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를 향하여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부활하셨다. 계속해서 바울은 부활을 열매로 비유해서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사과나무에는 계속해서 사과가 열리지 유행 따라 다른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우리도 주님처럼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는다.

바닷가에서 교회의 여름 수련회가 열리고 있었다. 목회자는 참석자들에게 조개껍질을 하나씩 주워오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신이 나서 조개껍질들을 주워왔다. 조개껍질이 생긴 이유를 목회자가 묻자 참석자들의 대답이 쏟아졌다. 갖가지 대답을 들은 후 목회자는 웃으며 말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조개껍질은 분리될 수밖에 없고 여기저기 흩어져 쓸모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같이 주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나셨기에 우리에게도 영생의 길이 열리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보람있고 의미있게 하셨다.
“여기에서 살아나신 주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살아나셨을 뿐만 아니라 “닫힌 자리”에서 살아나셨다. 무덤은 돌문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그리고 밖에는 로마의 병정들이 지키고 있었다. “여기”는 무덤인데, 그 무덤은 닫힌 곳이다. 그러나 주님은 닫힌 무덤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닫혀진 문을 열어주신다. 요셉을 보라. 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을 닫힌 자리에서 열린 자리로 옮겨 놓으셨다.

사랑하는 성도여! 성도들의 가정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뭔가 닫힌 것 같은 불통에서 열려진 형통의 자리로 옮겨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면 그 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문을 닫아 놓으신다.
20년 전에 내가 감신 3학년을 마치고 미국에 유학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꿈만 꿔도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국 꿈을 꾼다. 그런데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4학년을 마치고 비자 신청을 했는데 잘 나와서 갈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는데 내가 만일 3학년까지만 다니고 미국에 왔으면 대학을 다시 다니면서 졸업을 해야 했다. 다행히 대학을 마치고 와서 대학원으로 직접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그 때에 3학년 마치고 비자 신청을 했을 때에 안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조금 지나고 나니 3학년 때에 비자가 거절된 것이 감사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문이 닫혀서 열리지 않을 때 있다. 주님은 왜 닫힌 자리에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도 형통한 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문을 열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은 그 문을 열지 않으신다. 세월이 지나면 닫아 놓으신 문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한다.

국회의원 선거가 몇일 후에 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구로을지역에는 4명의 후보가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하고 계시는데 선거 결과에 대해서 한 가지 예언할 수 있다. 분명히 네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된다. 그 말은 세명은 낙선을 하게 된다. 당선된 분은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셨다고 고백하고, 낙선하게 되는 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문을 닫아 놓으셨다.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문을 닫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고백이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살아나셨다. 굳게 닫힌 자리에서 활짝 열린 자리로 살아나셨다. 내가 지금 뭔가 되는 것 같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닫힌 자리에서 활짝 열린 자리로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살아나셨다. 두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가서 두려운 얼굴을 땅에 대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전한다. 죽음의 자리는 두려운 곳이다. 영안실을 가보라. 누가 기분 좋게 가는가? 죽음의 자리는 두려운 자리이다. 문이 꽉 막힌 곳에 있어보라. 얼마나 두려운가?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본 경험이 있는가? 움직이지 않고 갇혀있으면 처음에는 히죽 히죽 웃는다. 그러다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은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는 순간이다. 닫혀있는 자리는 두려움이 가득한 자리이다.

주님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한 패이기에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괴롭히거나 해할까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한 곳에 모여서 그들은 문을 닫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평안의 자리로 살아나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많은 두려움의 요소들이 많다. 마치 난간에 매어달려 두려움에 가득 찬 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 자리에서 주님은 부활하셔서 두려움의 자리에서 평안의 자리로 살아나셨다.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은 부활하셨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어 주셨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리에서 평안의 자리로 살아나셨다.
양달 토끼와 응달 토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토끼의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 다른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양달 토끼는 양지바른 굴에, 응달 토끼는 그늘진 굴에 사는 토끼이다. 그런데 왜 눈 온 산의 양달 토끼는 굶어 죽어도 응달 토끼는 산다는 것인가? 바라보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양달 토끼는 허구한 날 맞은편 응달만을 발보고, 응달토끼는 허구한 날 맞은편 양달만을 바라본다. 양달 토끼는 아직 눈이 안 녹은 응달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응달 토끼는 눈이 다 녹은 양달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와 먹이를 구한다.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죽음의 자리, 닫힌 것 같은 답답한 자리, 내일이 불안하고 두려움의 자리이라고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 주시는 생명이, 주님 주시는 형통의 길이, 주님 주시는 평안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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