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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예수께서 부활하셨나?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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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왜 예수께서 부활하셨나?
구    절 : 마태복음 28:1-10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한번 죽어야 합니다. 이는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준엄한 법칙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별이 없고, 가진 자나 못 가진 자의 차별도 없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왕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집트의 카이로 서쪽에 있는 기제에는 고대 바로들의 무덤인 피라밋이 세 개 서 있습니다.

페트리라는 고고학자는 피라밋을 만드는 데 평균 2톤 반의 돌이 230만개나 사용되었다고 계산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에 사막 한 가운데 이와 같은 거대한 피라밋을 세우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웅장한 피라밋을 보면서 고대 이집트의 제왕들의 막강한 권력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피라밋은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의 실상을 증언하는 물증에 불과합니다. 만일 죽음이 없었다면 피라밋을 만드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위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현대의학이 디엔에이의 비밀을 풀고 불로장생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것은 허망한 기대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동이나 철로써 금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나 중국의 도교(道敎)의 도사들이 단전호흡을 하고 선단을 만들어 먹음으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현대의학의 노력은 연금술이나 도교의 비술보다 과학적인 점이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원인을 잘못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을 잘못 파악하면 해결 방법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을 정복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인데 돌무덤의 서늘한 기운에 의해서 소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는, 그것은 로마인들의 십자가형에 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방치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형수가 아직 살아있을 경우에 로마 군병들은 만일에 대비해서 망치로 내리쳐서 사형수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2절에 보면, 실제로 군병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린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현장을 지켜본 바를 정확하게 증언한 것입니다. 옆구리를 찌른 것은 곧 심장을 겨냥해서 찔렀다는 말이요, 피와 물이 나왔다 함은 운명하신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 혈액이 물로 된 혈장과 붉은 빛을 띤 혈구로 분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오백 여 성도들이 그 증인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았고, 말을 주고받았으며,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적들에게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겁을 먹고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처럼 약하고 겁 많던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이 없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왜 예수께서 부활하셨는지’에 관해서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인정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한 몸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구세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평소에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도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요한과 몇 몇 여인들에 의해 돌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말하기를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말하기를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고 하니 저희가 무덤의 돌문을 인봉하고 군병들을 세워 지키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자들은 최강의 정예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제압하고 예수님의 시체를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이 지나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사방이 어둑어둑한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걸어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은 돌이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와 보니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증언하기를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음질하는데 예수께서 길에서 여인들을 만나 “평안하뇨”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편인데, 8절 이하에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전에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한 일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잡히시던 날 밤에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미리 예언한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당위성에 관해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나사렛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하셨으며, 그가 말씀하신 대로 죽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되 풍성히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를 믿는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고 진실한 것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께서 죽고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토대를 잃고 허공에 떠있는 신기루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는다는 가르침도 거짓말이 되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도 지어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이 세워진 견고한 반석과 같습니다.

만일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왜 예수만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느냐?”고 묻는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다”고 했습니다. 절간에 가면 죽은 자들의 혼령이 극락에 가도록 염불을 외웁니다. 그런가하면 유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들이 하는 가장 큰 일입니다. 이는 한국의 민속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치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런 종교들은 부활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으니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더니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인해 여자들이 근심하는데 문득 눈부신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나타났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땅에 엎드리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야 맞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십자가의 죽으심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살아서 그를 믿는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언제나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를 믿는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입니다.

몸의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몸을 일컬어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몸을 무시하는 사상입니다. 불교 역시 몸을 나쁜 것으로 봅니다.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직 윤회의 사슬에 매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행복한 상태를 존재가 소멸되는 상태 곧 적멸이라고 합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촛불이 꺼지듯 생명의 기운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정욕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몸 자체를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할 때 완전한 상태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몸의 부활을 가르치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때는 영혼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부활한 몸을 입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아무나 갖지 못하며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다음에 어떻게 살아날 수 있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 한줌 흙이 되거나 화장을 해서 가루를 만들어 뿌렸는데 어떻게 부활이 가능하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신이십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제로 할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아시기 바랍니다(롬 4:17). 그리고 우리가 알아둘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장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죽었고 단 한 사람도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면 맨 먼저 거둔 곡식단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을 거두었다는 것은 본격적인 추수철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은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앞으로 대대적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을 예고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언제 성도들의 부활이 있는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5장 51절로 52절에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재림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지 않고 잠잔다고 말합니다. 잠자는 사람은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자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입니다. 주 예수 강림하실 때 믿는 자뿐 아니라 불신자도 부활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고 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악한 일을 행한 자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만, 불신자들은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습니다. 따라서 전자는 영생이요, 후자는 영벌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사망이 횡횡하는 곳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많은 생명이 죽어갑니다. 전쟁뿐 아니라 기근으로 인해 매년 수천만 이상이 굶어서 죽어갑니다. 그 외에도 온갖 질병이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교통사고와 지진과 같은 재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적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는 이 세상이 사망의 세력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 56절에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사망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죄에서 나오며, 죄의 권능은 율법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에 인간들은 죄인인 것이 드러났고, 죄인들 위에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앤다면 율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덩달아 사망은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양식이나 의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생명이 임하면 사망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으며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기에 그를 믿는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으며, 예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 마다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누리시며, 사망의 권세 아래서 죽어가는 불신 이웃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위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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