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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신앙으로 변화된 모습 (고전 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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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으로 변화된 모습
고전 15:1-19, 57-58 (킹제임스 번역)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았고 그 안에 선 것이라. 2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4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 5 게바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는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도 살아 있으나 더러는 잠들었느니라.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그 후에는 모든 사도에게 8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요, 사도라 불리기도 적합치 못한 자니, 이는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이라. 10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또 내게 주신 그 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들 모두보다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은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우리가 그렇게 전파하니, 너희가 그렇게 믿었느니라. 1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이 전파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 13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 또한 헛것이라. 15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로 밝혀지리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라. 만일 죽은 자들이 정녕 살아나지 아니한다면, 그 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지 못하셨으리라.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 18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한 것이라.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오직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 15:57~58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 아멘.

☆ 어느 부활절 무렵, 영국의 한 마을에 목사가 새로 부임을 해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새로운 목사의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하나 둘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어머니를 여읜 소년과 그 소년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지요. 어느 날, 소년은 소년의 친구와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에 둘이 타고 있던 배에 금세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등대지기였습니다.

등대에서 바라보다가 아들이 탄 배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가까운 곳에 매어둔 보트에 몸을 싣고 아들이 있는 쪽으로 힘껏 노를 저었습니다. 아들에게로 갔지만 아버지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아들이 탔던 배는 뒤집혀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자기가 탄 보트에는 한 명 밖에 더 태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을 모두 태운다면 배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아들의 친구는 포기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미안하다... 너는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네 친구는 아직 주님을 안 믿잖니..."

아들은 아버지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띄었습니다. "그래요.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아버지는 배에 아들의 친구를 태우고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있는 힘껏 육지까지 노를 저어왔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끝이 났고, 그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찬송가가 시작되는데 교회 뒤쪽에 앉은 동네 불량배 몇 명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습니다. "뭐야, 저런 이야기. 다 지어낸 거잖아." "누가 믿어." 그때 그들의 뒤에 앉아서 그윽한 눈으로 설교를 듣던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나직히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젊은이들. 내가 그 아버지고, 저기 서 있는 목사가 바로 내가 구한 아들의 친구라네." 그랬다는 것이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고난 주간으로서 경건하게 또는 근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시며 보내신 줄 압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오늘은 최고의 기쁨의 날이요, 축복의 날이 아닐 수 없다. 구약에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있는데 유월절은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말한다.1.14일, 무교절은 예수님이 무덤에 내려가신 것을 말한다. 1,15일에 무덤에 계셨다. 초실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가리키는데 1,16일 새벽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금요일 오후 3시쯤 운명하심으로 눈을 감으셨다. 그날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불과 3시간 정도의 여유라 하겠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 시신을 장례 해야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굉장히 촉박했습니다.

유대나라도 매장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보통 사람인 경우 그냥 땅을 파서 묻어버리면 끝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파 놓았던 동굴 무덤을 기증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동굴에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선반을 달아서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마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무덤에 장사하기를 원하여 이제 급히 장례 절차를 밟고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경건한 사람이 찾아와 마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우하듯 많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수위를 싸고 두건을 씌워 정중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례 지냈습니다. 이 일에 여인들이 와서 함께 거들었습니다. 그리고는 10~20명 되는 장정들이 매달려야 겨우 굴릴 수 있는 큰 돌로 동굴 무덤 아귀를 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하게 장례를 끝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장례 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무덤을 막은 돌을 굴리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자 건, 여자 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장례와 함께 예수님의 시대는 끝이 났고 예수님의 생애도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되던 날 아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실제로 무덤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무덤으로 급히 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비어있는 무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위와 두건만이 고스란히 누웠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자기가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입증해주셨고, 여인들 중 몇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만나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사울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20여 년이 지나고 난 후,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본문 15장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25년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신 것을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등, 전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한번에 오백 여명이 될 때도 있었는데, 아직 그들 가운데서 반이나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이 안 믿어지면 앞서 생존해 있는 그 목격자들을 만나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오늘 15장의 내용을 가지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안 믿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온 천하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삭막한 분위기에서 바울로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들이 다 세례를 받고, 고린도교인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안에서 조차 예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부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부활은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답답해가지고, 바울이 지금 고린도전서 15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날조된 학설 내지는 종교적인 맹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학자들 중에는 평생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운 인생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실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학자의 생활을 했다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거짓말로 증명하려고 평생 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 머리를 싸매고 달려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 연구해서 박사나 교수,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것으로 증명하여 세상적으로 학자, 박사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정말 그들이야말로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제각기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입을 맞추어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려고 하면 그런 식으로 기록해서는 안 됩니다. 어설프기 끝이 없는 기록들을 복음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을 보면 사복음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간 시간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곳는 새벽 일찍이 갔다고 하고, 어떤 곳은 해가 돋아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만났다는 천사의 숫자도 틀립니다. 어떤 기록에는 천사 한 명을 만났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두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천사가 있던 위치도 다릅니다. 어떤 기록은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천사가 굴러낸 돌 위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하려고 조작했다면 이렇게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증명하려고 하는데 여자를 앞세워서 되

겠습니까? 요즘 같이 여권이 큰 소리를 치는 때는 여자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여자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정에서도 여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여자 말은 안 듣기로 작심을 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여자들을 내세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날조됐거나 조작됐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하나도 꾸밈없이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서로의 말들은 좀 틀려도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소문이 난 것은 예수님이 처형 당한 지 사흘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현장이 예루살렘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갈릴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 곳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예수님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만들어낸 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만에, 그것도 예수님이 처형당한 예루살렘 현장에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 말을 겁없이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직도 형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있습니다. 빌라도와 대제사장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무덤가에는 병정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함부로 떠들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방안에 틀어 앉아 자기들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끌려가지 않을까 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판국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합니까?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여인들이 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그런 소문을 듣고도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군인들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도 여인들과 제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서 뒤집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변명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날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된 사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물론 학적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에 있는 학자들의 이야기이므로 쉽게 읽을 수는 없지만 한번 읽어보면 우스워서 못 읽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려면 그럴 듯한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지고 똑똑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도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을 생명 걸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뭉쳐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앙은 교회가 세월과 함께 만들어낸 신앙이 아닙니다.

C. H. 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렇게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막연히 생긴 믿음이 아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존재하게 만든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이 지상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부활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예수

님의 부활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다만 아내의 권유에 밀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약간 믿기는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이겠어? 그냥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러리라고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 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논증을 인용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쓸데없는 것이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변화된 삶을 가져야 합니다. 끝으로 본문 57~58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부활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으며 목격한 사람들이 "우리가 그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류역사상 예수님 부활사건처럼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일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을 발견한 그리스도인은 현실적인 부활능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예수의 부활능력 안에서 보므로 이 세상이 마지막이 아니며 시간적 여유가 있으므로 결코 초조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높은 망대위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큰 유혹도 "별 것 아니다"며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의 생명도 그를 따라 부활하게 되는 사실이 믿는 자의 소망이며, 신앙의 뿌리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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