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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고난의 본 (벧전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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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고난의 본
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신약성경의 베드로전ㆍ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지역에서 박해를 받으면 다른 지역으로 피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 받고 있는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에는 가장 포악한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로, 그 당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가 바로 “쿼바디스”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는 로마의 도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를 새롭게 건설할 목적으로 사람들을 시켜 일부러 멀쩡한 도시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내심 즐기던 네로는 예상 외로 큰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불로 집과 재산을 잃은 시민들의 아우성이 극에 달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는 예수쟁이들이 평소에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고 외치더니 그 말 그대로 그들이 불을 질렀다고 하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시민들은 닥치는 대로 기독교인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도 순교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박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변함없이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라 아니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환’은 집에서 부리는 종으로 노예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일꾼들입니다.
그 당시에도 노예나 사환들이 많았으며, 선하고 너그러운 집주인도 있었으나 매사에 까다로운 집주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인이 너그럽든지 까다롭든지 상관없이 범사에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교훈하면서 19절 이하에서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난의 자세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니고 실수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를 들면, 옆집에서 불이 나서 우리 집까지 번진 것이라든지 갑자기 인도로 뛰어든 음주 운전자의 돌발적인 사고로 인해 몸을 다치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지금 알 수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애매함이 없기 때문에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그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은혜롭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믿고, 지금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그 슬픔을 잘 참으면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에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의 죄값입니다. 자신이 알고 범했든지 모르고 범했든지 죄에 대한 보상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법칙을 따라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많이 하면서도 모르고 살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도 하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피눈물을 나게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남의 말을 듣고 너무 억울해서 밤잠을 못자고 괴로워하며 애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고 어떤 고난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마십시오. 
모든 고난은 내 죄값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 오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죄 가운데 살아도 고난이 없다고 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담대히 죄를 범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하겠습니까? 이 세상은 그야말로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도 그대로 내버려둬야 되겠습니까? 따끔하게 매를 때려서라도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축복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죄 가운데 사는 인생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3을 보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그만큼 죄를 지었으면 되었으니 이제는 죄를 그치고 우리의 남은 여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든지 죄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의 99%는 자신의 실수와 허물로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혹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또는 잘못된 짓을 많이 해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1. 죄가 있어서 받게 된 고난이 아닙니다.
2. 애매한 고난이 아닙니다.
3. 오직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받으신 고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목적이 분명한 고난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모든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선을 행함으로 받으신 고난으로 가장 값진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사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십자가에서의 고난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으며, 헤롯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만 하는 그야말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실 정도로 출생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까지 일평생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신 것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중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잡으려고 왔을 때,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쳐서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마태복음 26:52~54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시고 말고의 귀를 붙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못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때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셔도 되었고,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하여 원수들을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야가 와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다 거짓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능히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능력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기쁨으로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보면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들이 욕한다고 해서 욕하지 않으시고 때리고 침을 뱉는 저들을 향해 ‘두고 보자’라고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잠잠히 고난을 받으시고,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특히 24절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53:5~7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칠 백여 년 전에, 마치 환상으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고난받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듯이 이와 같이 정확히 기록하고 예언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 묵묵히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사랑은 위대한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7~11과 3:16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외쳤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 20~21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고난의 본을 보고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기 위하여 너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범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정작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그 모습을 따라 우리도 선을 행함으로 받는 아름다운 고난의 발자취를 묵묵히 기쁨으로 자원하여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태국에 가서 현지 목사님들을 모아놓고 한 주간 수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태국의 기독교 역사는 200년이나 교회는 이천 개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태반은 교역자가 없는 교회라고 합니다. 지나간 200년 동안 어떻게 하였기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았을까요? 박해가 심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박해가 없었기 때문에 태국에는 순교자가 없습니다. 순교자가 없는 교회는 절대로 부흥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 이유도 순교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일천 명중 네 명 정도가 교인이라고 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정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한국 교회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가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일본 교회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신사참배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난은 받지 않겠다는 사람, 구원은 받아도 절대로 십자가는 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고난을 두려워하고 고난을 피하는 교회, 순교자가 없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만큼 부흥된 것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심지어 순교하면서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해서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픔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에 맞아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보다 더 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어떤 핍박이나 고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담대히 고난을 받으면 우리가 받는 고난보다도 천 배 만 배의 주님이 주시는 큰 기쁨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면류관 상급이 예비되어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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