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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마에게 나타난 예수님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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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2004.4.11 / 도마에게 나타난 예수님 (요 20:24-29) 

(서론)

부활사건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동료 제자들의 증거(25절)에 대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고 직접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고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마에게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一) 도마의 회의도 신앙성장에 필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24-25절에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자신이 직접 예수를 만져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은 공동체에서 이탈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른 제자들처럼 그도 역시 충격을 받아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혼자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한결같이 증거하므로 부인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져보고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도마에게는 '회의주의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물론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 16:21)
죽은자의 부활이 비록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긴 해도 그가 주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했더라면 제자들의 증거를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의심하는 태도만으로 그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전하는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고 믿지 않았습니다. (눅 24:22-23) 이러한 불신은 부활 당시 제자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도마와 같이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의 태도를 지나치게 혹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도마가 보인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의 표현일수도 있고. 또한 이러한 인간적인 회의가 있음으로 신앙이 바르게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이나 능력의 역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도마가 보인 태도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영을 다 믿는다고 참된 믿음이 아니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분별은 언제나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성경)은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사람의 말은 그 진위여부를 분별해야 합니다.

(二) 주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26-27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을 때에 제자들에게 말했는데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의 말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든지 주님은 모두 들으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두 번째 나타나심은 그분이 언제든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신다는 사실도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시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신의 도움 없이는 결코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마 9:12-13)
주님은 오늘도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나 어느 곳에나 찾아오십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찾기만 하면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있지 않고 가까이 계십니다. (사 55:6-7)
도마의 회의적인 반응에 다른 제자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비난했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를 돕고자 찾아오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약한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할때에도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 하기만 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신을 가지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도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매사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비난하거나 상처주지 말고 위로하며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좋아하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 10:43-45)

(三) 진실한 제자의 삶

28절 보면 도마는 자기 앞에 서신 주님에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그분으로 하여금 임의로 주장하시도록 전적 위임한다는 뜻입니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자신의 인생이 주님의 것이오니 그분이 원하는대로 사용하라"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마는 이제 무엇이든지 주께서 결정하시는대로 온전히 따르고자 결심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신실한 제자의 삶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요 1:12-13)
'영접'이라는 말은 단순히 손님으로 맞아들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으로 모셔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가질 수 있는 합당한 관계는 우리에게 그분이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종의 위치에 서서 그분을 만나고 대해야 올바른 제자 입니다.
Paul 사도는 자기를 쳐서 예수님께 복종시켰는데 (고전 9:27) 이것이 우리가 주인되신 예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나는 죽고 언제든지 내 안에서 그리스도만 발견될 때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 안에서 나는 보이지 않고 예수만 발견되는 사람이 우리의 이상적인 자화상이고, 이러한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증가할 때 이 세계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해 갈 수 있습니다.
Paul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 2:20)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또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단지 함께 있거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는 배우고, 훈련받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란 그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물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뜻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주님의 제자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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