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은 말씀을 믿게 한다 (요 2:13-22)

  • 잡초 잡초
  • 201
  • 0

첨부 1


제목  부활은 말씀을 믿게 한다
본문  요한복음 2:13~22

200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소망과 평안이 성도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옆의 성도와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절기를 맞이할 때 성도들이 갖게 되는 어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주제의 말씀을 여러 번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최근 며칠 집중적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물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대하기가 싫을 만큼 싫증이 나다’는 뜻입니다.
‘나 라면에 물렸어!’ 하면 라면을 많이 먹어 이제는 먹기 싫어졌다는 뜻입니다.
자칫하면 부활절에는 부활이라는 말에 물리고, 성령강림절에는 성령이라는 말에 물리고, 감사절에는 감사라는 말에 물리고, 성탄절에는 성탄이라는 말에 물리기  쉽습니다.
말씀 전하는 이들은 이럴 때 물리지 않게 하려고 부활이나 성탄을 여러 다른 방향에서 조명하고 새로운 해석을 하려고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에 물려서는 안 됩니다.
부활이라는 말을 듣고 또 들어도 좋아져야합니다. 그런 내용이 드라마가 있었지요.
부활이라는 말이 늘 좋아야 하고 늘 감격스러워야합니다.

찬송가 가운데 “또 들려주시오”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송가 236장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 해 주시오”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에는 “또 들려주시오”라는 말이 아홉 번이 나 나오고 “늘 말해 주시오” “늘 들려주시오”라는 말도 서너 번씩 나옵니다.
같은 말이 제일 많이 반복되는 찬송일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또 들려주시오” “늘 들려주시오” “늘 말해 주시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19절은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하신 최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성전을 헐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는 것은 사흘만에 부활하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부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고 요한복음은 ‘제4복음서’ 또는 ‘영적 복음서’라고      해서구분을 하는 데, 성경시험을 칠 때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차이를 말하시오’ 하는 문제가 거의 빠짐없이 나옵니다.
많은 차이들이 있지요. 요한복음서에는 비유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성만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오늘 본문 성전을 깨끗하게 한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는 거의 끝에 나오는데 요한복음서에는 앞부분에 나온다, 문체가 다르다, 그밖에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다소 주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저는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중간 이후에 나오는데 요한복음은 앞에 나온다’ 이것을 넣고 싶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공사를 할 때, 설계도가 있습니다. 건물은 처음부터 그 설계에 의해 지어집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부활이라는 설계도 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까?
17절을 보세요. 요한은 예수님이 성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시편 69편 9절에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우리 주님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구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을 때 그 일이 자기에게 얼마나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쫓겨난 사람들,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돈줄이 끊어지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가서 전도할 때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 사람인데 이제 여종이 멀쩡해져서 수입이 끊어지니까 그 주인이 고발을 해 가지고 바울과 실라가 갇히고 많이 맞지 않았습니까?

이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그 당시 종교권력자들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때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연결되어 있었었습니다.
권력 잡은 이들의 옹호 없이 성전 뜰에서 장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기록들은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가 그 배후에서 엄청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은 일은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열심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단호하게 쫓아내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제사 드리기 위한 제물로 소, 양, 비둘기를 가지고 오는데 성전에는 그것을 검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물로 바치는 동물은 흠 없는 수컷이야 하는데 검사관들은 ‘이것은 안 되오. 여기에 이런 흠이 있소’ 하면서 퇴짜를 놓았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소연하면 ‘저기 저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지 않소? 그 사람들이 파는 것들은 온전한 것이오. 그것을 사 오시오. 그러면 내 통과시켜 드리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휘둘러 그 동물들을 내 쫓았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 -지금 말로 하면 환전상들입니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아주 과격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채찍을 사용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성전이 더렵혀지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보이신 본을 따라 성전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고라 자손들이 성전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84편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자식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편의 10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러분, 이만큼 주의 전을 사랑하기 위해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우리가 또 사모하고 사랑하고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진리를 사랑하는데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처럼 부활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설계도 위에 나의 믿음, 나의 삶을 지어나가시기 바랍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큰 유익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부활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말씀을 깨닫게 하고, 말씀을 믿게 하는 유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했을 때 아무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 기원전 20년경에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해서 짓고 있었습니다.
20절에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하는 것은  성전의 중요한 부분이 그 때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전 전체를 말할 때는 ‘히에론’(14절)이라는 말을 쓰고 성전의 중요한 곳을 말할 때는 ‘나오스’라는 말을 쓰는데 20절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유대인들의 이 말에 나오는 ‘성전’은 ‘나오스’입니다.
성전이 모두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삼십 여 년이 더 흐른 주후 64년의 일입니다.

20절을 보세요.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이 걸려도 완공하지 못하고 있어. 지금도 짓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사흘만에 일으키겠다고 하는 것이야? 무슨 허황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몸은 성전이다’라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16절에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이 있지요.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미쳐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이 말씀은 또한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무대가 된 성전, 부정한 방법으로 일부 계층의 배를 부르게 해 주는 성전,  형식만 남은 성전은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이 간단한 말씀은 교회 개혁의 최초의 선언이고 단호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아, 우리가 스스로 교회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다른 힘에 의해서 무서운 일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유대인들만 못 믿은 것이 아닙니다.
전후 문맥을 보면 제자들도 그 때는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캠벨 모르간(G. Campbell Morgan)이라는 목사님은 이 말씀을 주석하면서 ‘만일 우리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들었다면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였겠는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제 이 말씀을 하나 하나 살펴봅니다.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여러 번 ‘나는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의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고(마16:22) 누가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눅18:34)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왜 죽어?’
‘죽더라도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
여러분 영화 「패션 오브 크리이스트」를 보세요. 예수님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으셨습니까?
제자들은 이랬을 것입니다.
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해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오늘 새벽에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무덤에 갔는데 주의 시체가 보이지 않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때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부활의 사실을 힘써 알렸습니다.(눅24:1~10)

여러분, 기억해야 되는데 잊은 말씀이 있습니까?
부활의 아침에 기억해 내시기 바랍니다.

“성경과”
그 당시 성경은 구약입니다. ‘아, 구약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에 대한 외경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생명보다도 귀하게 여깁니다.
이 분야를 잘 연구한 어느 목사님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한  구약의 두루마리가 유대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우상이 되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 구약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주인공이 모세다, 다윗이다, 이사야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구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 말도 믿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제자들이 그와 같이 힘있게 전도활동을 하고 순교의 잔을 피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재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말씀을 믿게 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통해서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따르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새벽 촛불예배에서 우리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부활의 아침은 지금의 이 혼란을 극복하게 하는 아침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혼란과 고통이 의미 있는 혼란이요 고통으로 인식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혼란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의미도 큰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활의 빛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비춰보면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의 빛으로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지식의 빛, 이성의 빛으로 말씀을 보면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해마다 부활절에 설교를 통해서 특별히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2000년 부활절 예배에서 저는 ‘큰 지진’이라는 제목으로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2001년 부활절 예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2002년 부활절에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부활은 승리 가운데 승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2003년 부활절에서는 ‘부활과 소생’이라는 제목으로 부활과 소생은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은 부활이고 나사로가 다시 사신 것은 소생이지요.

2004년 올해 부활절에서는 부활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처럼 말씀을 믿고 따르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활이 여러분과 저의 믿음과 삶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을 새롭게 하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부활 이후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말씀을 새롭게, 뜨겁게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