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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삿 1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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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사기 13장 15-18절
제  목 :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삼손은 사사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어머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하는 은혜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잉태치 못한 여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기에
삼손의 부모들은 여기에 대한 증표로서 다시 한번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주길 기도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나타났고,
감격스러워 이름을 묻는 삼손의 부친께 「나의 이름은 기묘니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묘」라는 이름을 지닌 이 분은 누구인가요?
인류 역사상 가장 신비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존재의 신비

어느 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당시 삼십대의 젊은이가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까마득한 옛날의 인물이요 자신들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비롭게도 예수님은 사실 그때도 계셨으며 그 백성들 속에서 활동하셨던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때를 연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이삭을 드릴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다급하여 부르면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하셨고,
오늘 삼손의 출생을 말씀하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세대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에도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이를 반증합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옛날 하루살이와 매미가 함께 잘 놀았습니다.
이제 해가 져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매미가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인사말을 건넵니다.
「하루살이야 우리 내일 또 만나자」
하루살이는 내일을 알 수가 없었기에
「내일이 뭔데?」하고 물었답니다.

한 세대에 국한된 삶을 사는 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재성이
예수님의 신성을 웅변하며 그 신비함이 더욱 「믿음의 주」가 되심을 돈독히 합니다.

2) 출생의 신비

신비로우신 예수님은 출생도 신비롭습니다.
①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일반적으로
태어날 때는 자기 땅, 자기 백성이 없습니다.
혹시 이 세상 태어날 때 무엇이든 손에 쥐고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내어난 후에
그의 삶이 성공하면 자기 땅이 있을 수 있고,
그의 삶이 아름다우면 자기 백성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신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부터 신약으로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생물학적 잉태는 모든 동식물의 암수가 결합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러한 결합의 과정을 생략한 체 마리아 여인의 몸만 빌어서 오셨습니다.
이 일은, 죄성 없는 인성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3) 생애의 신비

예수님의 생애는 짧지만 온통 신비로 가득 찼습니다.
◦ 수가성의 혼인집에서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고
◦ 물위를 걸으셨으며
◦ 오병이어를 이룩하셨고
◦ 각종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신비한 생애에 사람들의 반응도 제 각기 였습니다.
◦ 더러는 놀라기도 하고
◦ 더러는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기도 하고
◦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을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였고
◦ 베드로의 경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무릎을 꿇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신비로운 것은,
민망히 여기시고, 피곤하시고, 목이 마르시기도 하시면서
◦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을 지라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으며
◦ 죄 많은 세대 속에서 죄인들과 함께 사시면서 죄 짓지 않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감동된 성경은,
히브리서 4장 「죄가 없는 예수」
고린도전서 5장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
베드로전서 2장 「죄를 범하지도 아니한 예수」로 기록하였습니다.

왜요?
사람으로 오셨지만, 실상은 하나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 죽음의 신비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기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신비하고 이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신비로운 것은,
◦ 어떻게 죽으셨는가? 혹은
◦ 어디서 죽으셨는가? 가 아닌
◦ 왜 죽으셨는가? 에 있습니다.

① 자신의 잘못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팔은 가롯 유다조차도

  마 27:4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했습니다.

  마 27:19 “총독의 아내는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마옵소서」” 했습니다.

  요 23:4 “빌라도 역시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했습니다.

② 힘이 부족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붙잡힐 때도 붙잡으러 온 하졸들과 군병들을 향해서 「내로라」하는 말씀의 권위로써 굴복시켰고,

십자가 위에서 조차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③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발적인 죽으심입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까지 보면 특이한 공통된 점을 발견합니다.
◦ 구약에 예언된 것이 성취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요 19:24 “군병들아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의 신비는 의미에서 찾습니다.
◦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함이요
◦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함이며,
◦ 십자가의 자신을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입니다.

즉 자신이나 죄의 후유증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고 영화롭게 하며
죄인을 의인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죽으셨던 것입니다.

5) 이름으로 증명

이토록 신비로우신 예수님은 이름으로도 자신을 증명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아십니까?
① 예수님 자신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선한 목자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이다.
나는 생수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산 자라 하셨습니다.

② 세례요한의 경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③ 베드로의 경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④ 요한계시록은
아멘이시오 충성이시다

세상에서 이름이 많다는 것은 위장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그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함을 얻으리라」
하물며 그분을 알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을 따르면
누구든지 신비한 인격자와 신비한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기묘자를 만남으로 신비한 잉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기묘자를 뵈옴으로 그의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삼손은 그 분을 의지할 때 큰 능력으로 백성을 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신비의 신앙입니다.
기독교 주체이신 예수님이 신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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