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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국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 행 2: 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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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본문: 행2:44- 47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외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이 되는 문제는 시인 하이네가 말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황금빛 아는 별 저편에 누가 사는가?”하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과 사상이 생겼고 예술이 전해졌지만 그 누구도 근본적인 해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으로 인류에게 인생의 근본 문제인 삶에 목적과 의미를 밝혀주셨고 영원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총체적 위기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에서 많은 문제가 나왔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그저 제도적 구조적인 면만 바뀌면 될 것 같으나 사람의 강퍅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해결은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에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또 윗사람을 인정하지 않아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어른을 공경할 줄 모릅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린 현대인들은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신적 경련 속에서 일을 저지릅니다. 최근 청소년들이 자살사이트를 보고 직접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문제가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교회는 부패한 사회도덕성과 아울러 민족갱신을 통한 국민 의식개혁에 중차대한 사명과 책임을 통감하면서 교회가 어떻게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해야 할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십자가가 많은 나라도 없을 텐데 이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보면 스스로 부끄럽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교회가 스스로 새로워지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이 사회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교회일치운동, 사랑의 운동, 회개의 운동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 민족의 등불이 되기를 힘쓰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 젊은이들은 미래 사회를 여는 기둥입니다. 민족에게 정신적 이벤트가 되어 세계 속에 한국을 빛내줄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을 위해 평안과 소망을 가져다주십니다 그 시대의 종교는 바로 그 시대의 수준을 재는 척도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배워온 교훈입니다. 사회가 병들고 흔들릴 때 그 사회를 살려내는 것은 정치도 경제도 군사도 교육도 아닙니다. 사회가 파멸로 치달을 때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영적 대각성의 파도를 일으켜 한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시키는 사회개혁에 앞장 서왔습니다. 100여 년 전 이 땅 위에 흑암이 짙었을 때에 복음의 빛으로 역사의 새벽을 일깨웠던 신앙의 선배들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순교의 피와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진리 가운데 민족을 영도했던 우리 신앙의 선열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앞서가신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토양 위에서 한국 교회는 성장했고 짧은 역사 속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세속문화의 오염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점차로 신앙의 본질마저 위협 당하는 시점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면에서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왕성하여 민족사에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어느 덧 교회 내부 뿐이요 사회와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사회는 부표처럼 비전을 잃고 정도와 원칙을 벗어나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지탱해야 할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울인 것입니다. 이 겨레의 마지막 진실이어야 할 한국교회는 민족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아픔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회는 깨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불 꺼진 등처럼, 맛 잃은 소금처럼 걷기를 포기해야 할 때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회개의 열쇠를 다시금 손에 쥐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상처를 반복하지 말고 이 세상에 영원한 하늘의 생명력과 피묻은 십자가 복음으로 채워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 속에서 진실과 정의를 지켜야 할 양심의 보루가 되도록 거듭 자신을 정화시키는 개혁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진실에로의 회귀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가 된 것을 돌이켜 진실한 열매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숫자가 적어도, 가난해도, 무식해도, 진실해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해방직후 38선을 넘어 월남하려던 작은 배가 밤새도록 노를 저었건만 아침에 보니 어젯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닻줄을 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세상줄을 끊어야 합니다. 허수의 줄, 허세의 줄, 욕심과 교만의 줄, 죄악의 쇠사슬을 말씀과 성령의 검으로 잘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교회의 갱신은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며 세계를 이끌고 나갈 핵심 윈리이며 동시에 이 민족 겨레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할 원동력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함께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엎드려 울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느헤미야가 애통해 하며 기도함으로써 성벽을 재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너진 것을 아파하는 사람이 결국 보수하는 자가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너무 성급한 것일까?
1988년 7월 스코틀랜드 근해 북해유전에서 석유 시추선이 폭발하여 168명이 죽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에서 앤디 모칸이란 사람이 유일한 생존자로 남게 됩니다. 그는 자는 도중 폭발음을 듣고 갑판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주위 바다도 새어나온 기름으로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뛰어내려도 30분 이내에 구조되지 않는다면 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더욱이 배의 갑판에서 수면까지는 50m의 높이였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꽃이 일렁이는 북해의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배에 끝까지 남아 있다가 목숨을 잃은 168명은 왜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을까? 그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 불타는 갑판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것은 선택이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으로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교회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것인가? 불타는 갑판 위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만 있어도 좋겠습니다. 아니면 느헤미야처럼 무너진 소식에 반응할 수 있는 가슴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종교개혁일을 기념하여 지켜왔지만 루터의 결단은 잊은 지 퍽 오랜 듯싶습니다. 전통과 형식에 다시 길들여진 우리는 사단과의 전쟁을 유보한 채 아군끼리 상처를 내며 교회를 벼랑끝으로 몰고 왔다면 너무도 잔인한 평가일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다 할지라도, 느보산 꼭대기에 홀로 죽어간다 할지라도 그 방향으로 가다가 죽는다면 여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인 듯합니다. 눈을 들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차례입니다. 무너진 성벽을 보고 울었던 느헤미야 처럼 마음의 성전이 무너진 한국교회를 부둥켜안고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개혁은 껍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속을 바꾸는 것입니다. 정신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개혁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눈물 없는 개혁의 종말에 식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한 사람, 그런 이들이 걸어가는 행보에 기대를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길을 걸어가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다시 볼 수 있다고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성전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가슴을 찢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는 교회들을 꿈꾸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 앞에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꿈을 위하여 한국교회를 부둥켜안고 부르짖는 은밀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아직 소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개혁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신앙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들은 거대한 변화가 일고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급변이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기업이나 모든 조직들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 때문입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도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많은 기관들과 조직체들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학교 병원 대학 봉사기관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파간의 경쟁과 대립, 성장과 업적주의의 옛 패러다임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새 술은 마련돼 있는데 새 술을 담을 그릇이 준비돼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서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내몰았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지 말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으로 내리치셨습니다.
당대의 성전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채찍을 높이 드신 것입니다. 이 썩어 냄새나는 부패의 상징,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을 완전히 개혁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자들은 바로 이 성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을 독차지하고 있는 저들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일반 백성들 속으로 전파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 성전을 타고 앉아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시려고 예수님은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낡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던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패러다임 변혁운동은 성전체제의 정화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바리새, 에세네, 열심당 운동 등과는 달리 세계변혁운동의 목표를 권력구조의 개혁이나 사회경제구조의 변혁에 두지 않고 성전체제의 정화에 두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살롬이 파괴된 근본적인 원인을 하나님을 섬겨야 할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굴로 변질된 데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참된 정의와 자유를 보장하는 평화를 이루는 첩경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서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완공하기 위해 헤롯에게 온갖 아첨을 다 떨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물질공세를 통한 정치목적과 종교목적이 혼합된 타락의 온상이었습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극에 달한 대제사장 세습과 유대교의 교권주의는 잘못된 권력구조와 상업주의로 나아간 나머지 진정한 예배는 온데 간데 없고 형식주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운동은 종국에는 정치·경제·종교·사회를 움직이는 특권층의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했습니다 또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이어진 이스라엘 민중들의 대변혁운동으로 발전돼 낡은 권력구조와 사회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르시고 그 제자들이 다른 제자를 낳고 그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를 낳아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를 원하건만 삯꾼 목자들은 하나님의 양을 자기 양으로 만들기 위해 교회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놓고 평생을 그 교회만을 위해 충성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교회 주의 사상은 교회의 본질을 흐리게 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이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할 교회들이 이 세속 세계의 권력과 결탁하고 상업주의의 온상이 돼 버린 데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회복하신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교회에 침투한 세상 가치와 맘몬의 지배를 물리치고 성장주의와 공적주의로 얼룩진 과거의 낡은 모습을 청산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은 부패한 교회, 경직된 종교, 변질된 신앙을 썩지 않고 부드럽게 열린 종교, 영원토록 변치 않는 신앙으로 개조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고 바른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요4:23-24)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어떤 집에서 술을 팔면 술집이 되고, 빵을 팔면 빵집이 되고, 예배를 보면 예배당이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배우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훈련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교역자들의 사업장이나, 교인들의 친교장소나 지식을 전하는 강연장이 아니며 더욱이 결혼식장이나 구제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입니다.
둘째,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마21:13) 예수님이 교회를 가르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거나 "강도의 굴혈"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주일 아침마다 온 성도가 모였을 때, 기도소리로 성전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많은 죽어 가는 영혼이 모여들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기도로 채웁시다. 기도가 있는 곳에 능력이 있고, 기도가 있는 곳에 모든 악한 영의 세력은 물러갑니다.
셋째, 교회는 병든 자를 고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마21:14)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는 병든 자의 치유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영육간의 질병으로 시달립니다. 머리 아픈 자, 실직의 아픔, 실연의 아픔, 인간관계의 고독의 아픔, 사랑 받지 못한 자의 아픔 등등, 교회는 이런 것들을 치유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런 치유가 나타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능력"입니다. 성도에게는 이미 이런 능력이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졌습니다. 마가복음16장17절 의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성도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역을 이상한 일로 보았습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살리는 일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무력한 자들이 이것저것 따지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영육의 치유와 죄인을 살리는 사역은 '이상한 사역'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찬양케 해야합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21:16)라는 말씀처럼 성도들의 입에서 참된 찬양이 흘러나오게 해야 합니다. 성도는 찬송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43장21절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천국의 모습은 찬양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여호사밧은 찬송으로 모압을 물리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찬송으로 옥문을 열었습니다. 찬송은 성도의 무기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를 찬송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찬송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짐바브웨 출신의 니프라이스라는 골프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골프를 치다가 슬럼프가 오면 항상 휘파람을 분다. 왜?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어려서부터 "어려움이 있을 때는 휘파람을 불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을 불러라. 기쁠 때에든지, 슬플 때에든지 찬송을 불러라. 힘찬 찬송은 마귀를 물리치며, 막힌 곳을 뚫으며,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니라"
다섯째, 교회는 선교하고 봉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열매입니다. 선교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등 불우한 이웃을 돌봐주고, 착한 일을 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고전19:31, 엡1:3-14) 교회의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그냥 내버려두면 이 땅의 수많은 가정과 학교와 교회는 손쓸 수 없는 심각한 영적 공황에 빠질 것입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교회가 본질과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추운 겨울밤 넓고 큰그릇에 고슴도치 떼를 담아 밖에 내어놓았습니다. 영하 20도 혹한 속에 찬바람이 불어오자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따뜻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마다의 침이 상대방을 찌르자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피를 흘립니다. 고슴도치들은 아파서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흩어지면 춥습니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날이 밝아왔습니다. 아침에 나가 보았더니 다 죽어 있었습니다. 절반은 얼어서 죽었고 절반은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공동체들이 급속히 깨어져 가고있습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저마다 혼자 살아가겠다고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립습니다. 용서와 용납의 자리가 그립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교제의 자리가 그립기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아쉽고 외로워서 모여 봅니다. 서로들 의지해 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연습이 안되어 있기에 갈등을 느끼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문제를 극복할 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흩어져갑니다. 흩어지면 다시 외로움을 느낍니다. 춥습니다. 추위에 떨어 봅니다. 세상이 혹독하기만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그립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그립습니다. 다시 몰려옵니다. 그러나, 몰려와서는 또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증오심만 키워갑니다.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 교회 문을 열고 보았더니 절반은 피를 너무 흘려 죽어있고 절반은 추위에 얼어서 죽어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 받고 사랑 나눌 공동체가 없어서, 상처가 치유되고 쓰러진 자아가 회복될 삶의 자리가 없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벅찬 감격과 은혜를 경험할 자리가 없어서 부둥켜안고 씨름하다 죽어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면류관 쓰는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픕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받은 은혜와 감격을 나누기 위해, 받은 상처와 약점을 내어놓고 회복하며 치유받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수고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음을 인해 아프기만 합니다. 오히려 저마다 썩을 세상만을 위하여 일하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웠던 영광스러운 성도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위에 떨고만 있는 것입니다.
참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한가족이요 함께 삶을 나눈 하나된 공동체였습니다. 로마의 창칼과 핍박, 콜로세움과 십자가에서의 순교 앞에서도 성도들은 매일 카타콤에서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대그룹으로 함께 모여 주님의 피와 살을 나누며 감격하고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치유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 불타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였다’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공동체,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일을 감당할 동역자들, 성도들,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오늘날 타락하고 훼파된 교회를 다시 재건합시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성전재건(교회개혁)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학개는 성전재건을 미루면 무서운 삶의 시련이 닥칠 것을 예언했습니다.(학1:2-11) 잠자는 성도여 이제 깨어 일어납시다. 주의 일에 전심코자 하는 형제여 함께 모입시다. 내가 하는 일을 당신은 할 수 없고, 당신이 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힘을 합하면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처럼 모여 예수의 큰 강을 이룹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마9:17, 눅5:37-38)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라 기드온의 300명 용사(삿7장)처럼 교회개혁의 횃불을 높이들 성도여 모입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며(롬14:17), 초대교회와 같이 나눔과 사랑과 성령충만한 교회를 이룩합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눈이 내리면 온 누리가 눈으로 덮입니다. 소복이 쌓인 눈은 시골길을 분간할 수 없게 합니다. 가장 먼저 길을 나서는 사람은 길을 만들며 걸어가야 합니다. 발이 눈 속에 빠지는 고통을 겪지만 그 길을 따라 몇 사람이 가다보면 좁다란 길이 생깁니다. 앞사람이 고생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길을 편하게 갈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신앙의 바른길을 만든다는 희생정신과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함께 모입시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만 쫓아가면 됩니다.
*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 헌신, 봉사하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한 태 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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