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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신앙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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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1-12
부활의 신앙

할렐루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죄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주님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땅 위에는 아직도 전쟁의 소문이 들리고, 질병과 고통과 갈등과 많은 문제가 우리 인류를 괴롭히고 있지만, 2004년 부활의 밝은 빛이 온 누리에 찬란히 비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이 말씀이 부활의 첫 소식입니다. 주님이 누우셨던 빈 무덤, 이것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2004년 부활절을 맞이하신 우리 성도님들!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승리와 축복이 우리 모든 평화교회 성도님들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그리고 이 나라 한반도와 온 세상에 가득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수많은 신비들이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에 의해 하나 둘 씩 벗겨지고 있습니다. 달과 별에도 인간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체 기관도 서로 이식 수술을 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세계가 작은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컴퓨터 기술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놀라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과학으로도, 권력으로도, 무력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인간의 공포의 근본에는 이 죽음에 대한 그림자가 깔려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수십억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평균 1초에 3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이 숨을 거두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과 저도 그 죽음의 숫자에 포함되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결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먼 미래 어느 때의 일이 아닙니다. 실제적이요, 현실적인 문제이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세계가 어떻고, 인류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이번 선거가 어떻고, 이런 이야기 다 쓸데없습니다. 자녀들 공부하는 이야기, 잘 사는 이야기, 흔히 말하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음일 뿐입니다. 또 생명의 문제일 뿐입니다.  어느 성도님 한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돌이켜 보니, 내게 가장 필요한 말씀은 내가 흘려버린 말씀, ‘예수의 보혈이 나를 모든 죄에서부터 깨끗케 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믿기에 또한 영생을 믿습니다.”

성경은 생명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오래 사느냐, 일찍 죽느냐 하는 것은 다음다음 문제입니다. 생명 자체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생명 문제를 부활로 답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풀 수 없는 생명의 신비가 바로 이 부활 사건에서 해답되고 있습니다.

진정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죽음은 죄에서 시작되었고, 죄로 인하여 인간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에 생명이 삼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죽여 버렸으며, 생명의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죽음의 세력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사실 죽음의 요소 이외에 의미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의, 진리, 자유, 평등, 선, 사랑, 화해 등등 무슨 이야기를 해도 부활이 없으면 참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가 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진리를 붙들고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까? 빼앗아도 부족한 세상에서 남에게 주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속고 속이며 거짓과 허위로 성공이란 바벨탑을 쌓기도 바쁜 세상인데, 왜 남을 생각해야 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부활이 없이는 이런 삶의 자세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의와 진리 등 바른 가치의 길은 부활의 조명 없이는 그 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주님이 그 첫 열매이시며 우리도 이 선한 싸움의 참여자입니다. 부활은 진리가 거짓을, 정의가 불의를 이긴 것입니다. 사랑이 미움을, 빛이 어둠을, 화해가 분열을 이긴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죄악을, 생명이 마귀 권세를 이긴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주님의 승리를 우리 등에 짊어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때론 우리도 실망과 좌절과 역경 속에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생명의 길을 걷게 됨은 바로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심판입니다. 흔히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은 아닙니다. 호화롭게 장식된 무덤이 그 사람에 대한 최종 평가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그 무덤이 열리게 될 것이며, 그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악한 사람의 영원한 도피처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요,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의인의 초라한 죽음 앞에서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유도 우리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빈 무덤은 오늘도 선언하고 있습니다.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말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위세 떨치지만 악령의 세력이 꼭 무너지고, 초라하게 보이던 진리가 승리하는 그 날을 바라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심판을 내다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대한 생명의 심판을 꼭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부활은 과거 2000년 전 골고다 언덕 근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의 돌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 무덤은 육중한 돌문이 막혀 있었고, 거기에는 황제의 허가 없이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봉인이 찍혀 있었으며, 로마 군인들이 겹겹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째 되던 부활의 아침, 바로 오늘 이 아침, 육중한 돌문이 굴려지고 황제의 봉인은 사정없이 찢어졌으며, 군인들의 창과 칼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어떤 물질로도, 어떤 권력으로도, 어떤 무력으로도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부활이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사실이냐, 아니냐, 그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등등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부활을 증거 할 뿐입니다. 선언할 뿐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여기 무덤에 계시지 않다, 이것은 천사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선포입니다. “내 손을 만져 보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이 창조적인 개입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이나 확신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의 사실이요, 알거나 모르거나 실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사실 만을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권고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을, 정의가 불의를 이겼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을, 빛이 어둠을 물리쳤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정 복음이 죄악을, 생명이 마귀 권세를 이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순교를 각오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겁쟁이였고,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쳤으며,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재능도 자격요건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새로운 용기와 담력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 하는 날부터 우리 기독교는 탄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오늘 우리 믿음이 있으며,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활은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장래 되어질 일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이미 부활 하셨음과 같이,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인류의 큰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이 부활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부활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부활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으리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래 우리 믿는 이들의 부활과 이미 얻은 생명이 길이 계속될, 곧 불멸의 생에 대한 예표이며 확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 모든 잠자는 성도의 장래 부활과 또 내세의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의심 없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할 때 한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저쪽에서 사자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어린 아이가 벌벌 떨면서 무서워서 어쩔줄 몰라하며 울었습니다. 이 때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면서 “얘야, 잠깐만 참아라, 이제 곧 밝아질것이다”라고 하며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의 아침을 보면서 아이를 위로하며 함께 순교합니다.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을 확신했기에, 오늘의 고난도 순교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힘과 능력으로 임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 믿습니다. 미래에 우리 모두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동시에 현재의 체험으로 우리가 부활의 내용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 여러 교훈들은, 우리 신앙인들은 현재 지금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에 죽고 영에 살아야 합니다. 죄에 장사하고 의에 다시 살아야 합니다.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은 죽은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작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참으로 예수를 믿어 중생한 사람은 이미 그 사망에서 나와 생명과 영생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부활의 생명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의 보증으로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따라서 나는 오늘 그리스도와 동행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셔서 나와 더불어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는 사망의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과 죄의 노예 된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합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 능력의 실제입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환란을 이기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들이 부활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가? 어리석고 미개한 과거 인류는 그런 터무니없는 논리를 주장한다지만, 이 과학의 시대에 그런 일을 주장할 수 있는가, 이렇게 토론을 하고 있는데 한 신앙인이 그 자리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활은 비과학적인 사건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은 비이성적인 일이 아니라, 이성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믿고 따라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는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아침 나는 예배를 드리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입니다. 부활 주일 이 아침은 바로 이 기쁨과 감격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복된 시간을 우리가 갖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부활주일인 이 아침에 우리 모두 부활 신앙을 가지고 무덤에서 뛰쳐  나옵시다. 죽음과 좌절과 아픔 속에서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누리십시다. 그리고 위대한 부활의 승리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창조적인 새 생명을 누리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생애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영원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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