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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십시다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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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십시다
요한복음 20:11-18  2004. 4. 11.

희망에 넘치는 이 부활 주일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20-21장을 보면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4차례에 걸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①슬픔에 잠겨 있던 마라아를 만나주시고, ②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③의심만은 도마를 만나주시고, ④실망과 실패를 거듭하던 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힘을 주셨습니다. 확신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의심이 믿음으로, 낙심이 소망으로, 비겁하던 자가 담대한 자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십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죄의 값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일하십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탐구로 구원에 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재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수난이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더구나 위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렇게 감격 속에 지키는 부활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 위에 죽으셨다가 우리 위해 다시 사신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독 두려움과 의심 절망의 자리에서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그때 기쁨과 담대함, 확신과 소망의 밝은 빛이 여러분의 마음을 비쳐 줄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1. 첫째 슬픔에 잠겨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20:11-18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광경을 보고, 무덤에 묻는 것을 지켜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로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의 대상이 되던, 말하자면 인간 폐물이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주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 중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망이요 생명이던 예수님이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슬픔과 고독은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던 분이, 믿고 의지하던 분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오는 슬픔과 공허감은 엄습하였습니다.
사실 마리아에겐 예수님이 친구요, 선생이요, 부모요, 애인 같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마리아는 빌라도의 궁전에서 심판 받으실 때도 마리아는 울었고, 연약하신 몸의 예수님이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도 마리아는 울고, 가시다가 쓰러지시고 꺼 꾸러 지실 때에 울고, 무자비한 로마 군인의 채찍이 가해질 때에 울고, 종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실 때에 울고,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내고 나서 이틀 동안이나 밤을 세워 울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예수님의 시체가 있는 곳에라도 가보고 싶어서 새벽 일찍이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의 시신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무덤 옆에 서서 또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시 사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조용하고도 인자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
①여기 <왜 울고 있느냐>라는 말은 울 만한 이유가 이제 없는데 왜 우느냐? 하시는 뜻입니다.
②<누구를 찾느냐?> 이 말씀은 이미 죽은 예수를 다시 찾을 필요가 없고 죽었던 예수는 다시 살아 네 앞에 있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가까운 사람의 이별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보다도 더 큰 슬픔은 고독입니다. 외로움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그때에 그때부터 찾아 드는 고독이란 무서운 병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병은 고독이란 병입니다.

여러분 슬픔과 고독에 붙잡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다시 사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서서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슬픔과 고독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기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뻐 뛰어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오늘도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슬픔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여러분을 찾아 오셨습니다.
여기 오실 때에는 직장 때문에, 사업 때문에, 경제 문제 때문에, 자녀 문제 때문에, 명퇴 때문에, 부도 때문에, 질병 때문에, 슬픔과 고독 속에서 오셨지 만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시므로 기쁨으로 돌아가셔서 이 부활의 주님을 전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 둘째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본문 19-23절의 사건은 주일 저녁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되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제자들에게 유대사람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인 집의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①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를 내 놓고는 평시에도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시게 되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예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②그렇게 큰소리치며 장담하던 베드로! <다른 사람은 다 선생님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저만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맹세하던 베드로가! 얼마 동안 멀리서 따라 가다가 예수님께서 가야바 뜰에서 심문 받으시는 광경을 보고 겁이 나서 어린 계집  종에게까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③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게 되니까 다음 차례는 자기들에게 어떤 화가 미칠 것인가 예감하면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면서 예루살렘 어떤 동지의 집에 모여 문을 다 잠그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계단에 오르는 발자국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산헤드린 칙사가 올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꺼멓게 되어서 숨을 죽여 가며 있었을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사실 빌라도의 정치적 권력이 두려웠습니다. 가야바를 대표하는 유대교 신봉자들도 무서웠습니다.
더구나 3년 간이나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세상에 일에 어두워지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 따르던 사람들이라고 하면 누가 받아 줄까 하는 불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긴박한 상황 가운데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방에 문을 잠그고 있는 그 자리에 갑자가 다시 사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히 있을 지어다>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육신 적인 평안히 아니라 두려운 생각을 없이 하는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용기와 함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참 사는 길이 어떤 길인 것을 알면서, 의와 불의를 분명히 판가름하면서도 주위를 가만히 살핀 후 용기를 잃어버리고 겁에 질려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할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의 골방의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떠는 분은 안 계십니까?
더욱이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한파로 먹는 것, 입는 것, 회사 문제, 사업 문제, 직장 문제, 진로 문제, 달러 문제에 억눌려서 신음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 두려움을 평안으로 바꾸신 주님! 나의 빈궁을 풍요로 바꾸시는 주님! 나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주님, 나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주님! 나의 좌절을 재기로 바꾸시는 주님께서! 이 시간에 찾아 오셔서 공포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우리에게 참 평안과 용기를 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시간에 여기 오실 때까지는 불안을 마음에 품고 오셨는지는 무르지만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시므로 참 평안과 성령의 능력과 힘을 받아 용기를 얻고, 기쁨을 얻고, 성공과 풍성한 삶을 받고,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셋째 의심에 잠긴 도마를 찾아 오셨습니다

24-29절까지 보면 열두 제자 중에 도마라는 분이 나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무슨 일로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다시 사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났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증거하면 할수록 의심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은 일찍이 없었기 대문입니다. <사람이 죽더라도 다시 살았으면>하는 막연한 기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으나 살아나는 일은 도무지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구의 말이라고 해도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실증을 구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신 예수님이 불안과 불신하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전과 같이 도마에게도 <평안이 있을 찌어다>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에 주는 평안입니다.
왜요? 불신 불안 의심하는 사람의 마음엔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제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기쁨에 충만하여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평안이 없는 현대인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회의 시대, 불안과 불신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한 마음에 평안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네가 나를 믿지 못하는 대서 불안이 생깁니다.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반듯이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잘되고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때는 악하고 불의한 자가 땅위에서 잘되고 번영하는가 하면, 의로운 자가 까닭 모를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때에 우리 마음에는 풀리지 아니하는 의심이 가득하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을 이렇게 내어버릴 수 있을까?> 하고 불안과 불신과 회의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인 롱펠로우의 말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매우 천천히 돌아가나 아주 부드럽게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의 섭리와 경륜을 이루어 가시지만 어떤 때는 의심을 품을 정도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의 불신과 의심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나를 보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사랑이 언제까지나 미움에게 배신당할 수가 없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언제까지나 삼켜 있을 수 없습니다.
정의가 불의에 언제까지나 눌려 있을 수도 없습니다.
진리가 거짓에게 언제까지나 조롱만 당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이 사망에게 패배할 수는 절대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빛과 정의와 진리와 생명은 필연적으로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를 위하여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정의가 불의를 이기기 위하여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판명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사기꾼이 아님을 만천하에 증거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의심을 품고 이 자리에 오신 분이 계시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시므로 확신과 평안을 소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4. 넷째는 다시 사신 예수님은 실망을 안고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21:1-14절에 보면 베드로를 위시하여 여섯 명이 갈릴리 바다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베드로는 <3년 후에 얻은 것이 이것뿐이구나> 실망한 나머지 옛 직장인 갈리리 바다로 갔습니다.

다른 어부 출신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3년이나 놨던 그물을 다시 배에 싣고 노를 저어 고기잡이하러 나아가 밤이 맞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실망 속에서 그물을 들었으니 손에 걸리지 않으려니와 정신도 별로 없습니다.

날이 밝아 동이 트기를 시작할 때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먹을 음식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실패를 거듭하던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조반을 먹인 후에 제자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가장 존귀한 사명을 버리고 떠났던 베드로를 불러 인간의 영혼들을 기르는 대 사명을 맡기는 엄숙한 임명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두 번,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엄숙한 임명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 생활에 실패로 말미암아 쓴잔을 마시고 있는 사람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오셔서 새 힘을 주시며, 다시 일어날 기회를 허락하시며, 더 좋은 삶의 목적을 위해 살도록 희망을 안겨 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실수를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을 따지지 아니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과거를 묻지 안으십니다.
지금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실수와, 죄악을 다 용서하시고 새롭게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사명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 생활에 실패하고, 직장 생활에 실패하고 실망하여 맥없이 사시는 분계십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셔서 새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을, 부활의 생명을, 부활의 권세를 받아!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가 다시 살아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살아나고
부부의 애정도 다시 살아나고
형제 우애도 다시 살아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뿐만 아니라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임금님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선한 일에 전진하십시다. 주의 일을 부흥시키는 일에, 새성전 건축하여 봉헌하는 일에, 영혼 구원하는 일, 천국 일군 키우는 일, 민족 복음화 하는 일, 세계에 선교하는 일, 치료하는 일, 기독교 문화운동에 전진하십시다.

나를 그토록 감동시켰던 다시 사신 예수!
내게 그토록 풍성한 삶을 축복으로 주셨던 그 예수!
나를 뜨겁게 성령으로 역사 하셨던 그 예수!
그토록 나를 한순간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내 곁에 계셔서 내가 외로울 때나, 슬픈 때나 답답할 때나, 즐거워 할 때에 나와 같이 사시던 그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책임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스승은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사장은 자기 회사 사원들에게
학생은 자기 친구들에게
가계 하는 자들은 가계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일지 하는 사람은 세일지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예수를 만났습니다 전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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