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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격의 완성 (눅 23: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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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32-49                                 
“인격의 완성”                                                 

오늘날 우리들이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논란이 많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정리가 되기는 주후 451년 칼케돈(Chalcedon)이란 곳에서 모인 교회 회의에서였습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정리가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에 두 본성을 지니고 있다(Jesus Christ is One Person, Two Natures,). 두 본성은 인성(人性, vere Homo)과 신성(神性, vere Deus)인데, 이 둘은 서로 바뀌어 질 수 없고(without change), 나뉘어 질 수 없으며(without division), 혼동될 수 없고(without confusion), 구분되지 않는다(without separate).” 이러한 신앙고백은 그 후,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설명하는 가장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 인격 안에 인성과 신성을 같이 가지고 계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고백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그저 몇 사람의 학자들이 책상에 앉아서 만든 이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와 의견들이 우리들이 사는 시대를 통해서 걸러져 내려오면서 결국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데에는 그 근거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까 말씀드린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에 두 본성을 지니고 있다. 두 본성은 인성과 신성인데, 이 둘은 서로 바뀌어 질 수 없고, 나뉘어 질 수 없으며), 혼동될 수 없고, 구분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비록 성경에는 없지만, 이렇게 표현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장면을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최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최후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인격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인격이란 국어사전에 의하면, 두 가지로 정의되는데, 하나는 “(말이나 행동 등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품격”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행위를 함에 있어) 스스로 책임을 질 자격을 가진 독립된 개인의 모습”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격자의 모습을 살펴봄으로 우리들의 인격과 비교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았으면 싶습니다.

그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보통 인격이라 하면 우리는 인간의 품격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요소만을 염두에 두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인간의 품격은 하나님의 품격에 영향을 받을 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인격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신성에 영향을 받는 인격이 될 때에 진정한 인격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품격은 하나님의 품격에 영향을 받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인격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격을 신앙인의 인격, 혹은 신앙인격이라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같이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표현이 됩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이렇게 하나님의 품성에 영향을 받았기에 온전한 인격으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인격의 온전한 모습을 살피도록 하십시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격을 살피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도 이러한 온전한 인격을 갖추는 데에로 향하기 위하여 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을 의연히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격의 온전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당하는 고난이란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옛말에도 “사람됨됨이는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나타난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고난을 어떻게 당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코리 텐 붐이라는 사람은 “사람이 어려움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 사람의 천사는 재빨리 하늘 하나님께로 날아간다. 그 사람이 그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보고하려고...”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난 자체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하고자 했는가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란 고난의 현실을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보십시다. 한마디로 보면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현실 속에서도 어떤 의연함과 여유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해 침 밷으며 조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겉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려주나 보자고 하면서 희롱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들의 앞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자기에게 손가락질 하며 조롱하고 침 밷는 그리고 자기 겉옷을 차지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올린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의연함과 어떤 여유 있는 참 인격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데에서 예수님의 의연함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데에서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경우인 듯싶습니다. 하나는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길 때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가능성을 기대할 때입니다. 둘 다 믿음의 자세요 모습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어떤 제한적인 조건을 둡니다. 즉, “언제까지는...”이라는 시간적 제한을 두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제한 시간이 지나도록 해결이 안 된다든지 하면 “하나님께 맡기고자 한 우리의 자세”는 변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그렇게까지 기도했는데요, 하나님, 제가 그렇게 참았는데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습니까?” 하고 해결되지 못한 모습에 울분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러한 모습 역시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의 소유자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봅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에서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의 모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의 공통점에서 온전한 인격자의 세 번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모습 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향해 침 밷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습이나,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모습이나 다 기도의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구조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표현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곧 신앙인격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품격에 영향을 받고자 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최종적인 자세와 모습을 기도라는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러한 모습이 곧 신앙인격자의 자세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모습이나 성품을 지닌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신앙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신앙 인격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격의 온전함을 갖춘 자의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온전하고, 진실 된 인격은 감동을 주는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그 주변에 있던 몇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발견합니다. 만일 우리들도 우리들의 이러한 신앙 인격적인 모습이 주변에 보여진다면 거기에 따르는 감동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보십시다.

1. 구원받은 강도가 감화를 받습니다.
두 강도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한 사람의 강도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향해 “너도 살고, 나도 살려 달라”고 진실 되지 못한 요청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강도는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는가가 이래서 중요하다고 봅니다. 골프 좋아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골프장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고스톱 좋아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그리로 향하기 쉽습니다. 저는 신시내티에 와서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게 되니까 클래식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을 좇아가게 되니까 말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의 기도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당장 나타납니다. 그것은 자기 동료의 잘못된 자세를 꾸짖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 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이렇게 자기와 평생을 같이 지낸 동료지만 그의 잘못을 꾸짖을 수 있는 용기는 이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진정 감화를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감화는 이렇게 용기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의 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의 영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요 16: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감화를 받는 사람은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꾸짖을 수 있는 권세와 용기를 지니게 됨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의 죽음을 의탁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하는 이 모습은 예수님에게 인격의 감화를 받은 사람이 그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거기에 대한 다짐을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루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감화 받는 사람을 원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즐겨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중대장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이는 진정 의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로마 백부장으로서 이 사람은 예수님과 하등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의 죽어가는 순간의 모습에서 인격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혹은 “진정한 의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본문은 전해줍니다. 이는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인격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이 얼마나 귀한 삶이 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진정한 신앙의 인격이 배일 수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3. 하늘의 감동을 봅니다.
45절에 보면 성전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 예수님은 죽어가는데, 산 밑의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사람이 찢었다면 아래에서 위로 찢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늘이 감동하는 것을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인격자의 모습은 하늘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훌륭한 사람이나 일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라고 고백하며 감탄합니다. 사람이 한 일이지만, 그 일이 너무 훌륭하고 충격적이라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 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늘을 감동시킨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향한 마음이 열려진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다 못된 줄 알았는데, 안 그런 사람도 있구나”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탄복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열려진 의미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 사람 사는 세상에 희망이 더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다면 우리의 인격이 망가지는 일이 됩니다. 히 6:6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하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신앙 인격을 지닌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키지 못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이민자들은 본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깨지기 쉬운 그릇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 조심도 해야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말이나 행동에 특별히 조심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망가지는 것 뿐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이 망가지는 것을 우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더욱 기대치가 높은 곳입니다. 실망하는 일이 생겨도 교회에서 생기면 더욱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진실되게 우리의 삶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신앙 인격은 성숙하고 온전해질 것입니다.

2. 진정한 인격자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닮고 배우고자 하는가? 하는 질문은 곧 우리는 무엇을 부러워하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고 봅니다. 우리는 오늘 고난 중의 예수를 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한 우리의 열린 마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넘김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물귀신 작전”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하라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아픔은 나 한사람으로 족하다는 자세로 의연하고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신앙 인격은 성숙하고 온전해질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이러한 인격의 모습은 십자가상에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루하루의 삶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로 이루어나갈 때에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지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신앙 인격은 성숙하고 온전해질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둡니까?  그것은 나 한 사람의 인격의 온전한 성장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데 있다고 여기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인간상의 한 모습이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다 이러한 사람들이 되자고 굳이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고, 그러한 모습이 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요청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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