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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의 희망을 소유하십시오 (렘 3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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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희망을 소유하십시오
예레미야 32장 6-15절

< 자신을 격려하며 사십시오 >

살다 보면 가끔 자신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한 존재라도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역사적인 존재들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격려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격려하며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1908년, 독일에 살던 한 청년이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을 매려고 혁대를 뽑아 목욕탕 고리에 걸고, 의자 위에 올라가 목을 매단 후 의자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런데 혁대가 낡아서 끊어지는 바람에 죽지도 못하고 그냥 바닥에 처박혔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생각이 변하면서 죽음 직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가 죽다 살아났구나! 다행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보니 조금 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희망차 보였습니다. "그래,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결심하고 노력해서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는데, 그가 바로 쇼팽 음악의 최고 권위자인 루빈스타인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자살을 생각하게 되지만 똑같은 사람이 희망을 가지면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이 있다면 무인도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고, 감옥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도 연꽃처럼 아름답게 꽃을 피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희망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모습을 통해 희망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본문이 주는 3가지 교훈 >

오늘 본문 바로 앞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10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졌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다가 그 예언 때문에 유다 왕의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벌어진 일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어느 날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촌 하나멜이 와서 기업을 무를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아나돗에 있는 자기 밭을 사라고 할 것이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기업을 무를 권리가 있다"는 말은 "땅의 상속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사촌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밭의 상속권이 예레미야에게 있으니 그 땅을 사라고 했습니다.

그 제의를 받고 예레미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본문 9절 말씀에서 은 17세겔을 주어 그 밭을 삽니다. 그리고 매매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본문 12절 말씀대로 인봉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바룩에게 부치며 그 매매 증서를 토기에 담아 오래도록 보존하게 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계산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하나멜은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의 밭을 사라고 했을까요? 예레미야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하면서 왔지만 곧 멸망당할 나라의 땅보다는 현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낫겠다는 얄팍한 생각 때문입니다. 예레미아는 그런 하나멜의 속셈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의 밭을 사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어렵게 사는 사촌 하나멜을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예레미야도 참 어지간합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최선을 다해 남을 도우려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모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요새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어렵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힘써 돌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렵다! 어렵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더 어렵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중에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어려움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전남 영암의 한 시골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먼저 저의 웹사이트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감사를 표시하시고, 그분도 시골교회 담임목사라서 넉넉한 형편이 아니지만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어버리고 슬픔에 빠진 목진훈 목사님을 돕겠다고 매달 10만원씩을 후원하겠다는 전화를 주셨습니다. 얘기를 듣고 감사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소중한 목사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보시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무엇이 축복의 길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축복의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내 것을 힘써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 찾아올 것이고, 내 것을 움켜쥐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도 그를 외면할 것입니다.

교회도 보면 나눌 줄 아는 교회가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게 됩니다. 열심히 선교하고 구제하면 성도들도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와 선교헌금에 동참합니다. "내 것을 교회에서 소중하게 쓰고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드리니까 드리면서도 기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는 재정이 오히려 더 튼튼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선교와 구제에는 쥐꼬리만큼 하면서 교회건축에만 신경 쓰고, 자기 교회와 관련된 사업에만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자기 교회의 몸집 유지와 몸집 불리기에만 신경 쓰는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내 헌금이 이렇게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사용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드리니까 헌금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헌신에 점차 관심이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오히려 더 재정이 열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은혜를 나눠주시고,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축복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계산을 가지고 살면 사람을 '실망'시키게 되지만 나누며 살면 사람의 '신망'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명예'만 탐내지 말고, 먼저 '멍에'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내게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멜의 삶을 살지 말고 예레미야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밭을 사준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8절 하반부 말씀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 6절 말씀과 14-15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는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앞세우며 살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말씀이 있고,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절망은 어느새 희망으로 바뀌고, 고난은 어느새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내 처지에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그때 말씀은 내게 능력이 되고, 체험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망한다고 하면서 땅을 사라고 하실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사람들의 오해도 받을 각오를 하고 그 땅을 삽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 바다와 초록 물고기 이야기 >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본 글입니다. 대학을 나와 큰 뜻을 품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외모나 성격이나 별로 나무랄 데 없었는데 문제는 아무도 농촌으로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인터넷 카페에서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닉네임은 '바다'였고 여자의 닉네임은 '초록물고기'였는데, 이 여자는 마음씨도 아름답고 농촌도 잘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청년은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년은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여자는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전에는 하루에 열 통씩 오가던 메일이, 프로포즈 후에는 뜸하게 왔고, 그마저도 늘 한 두 줄이었습니다. 청년은 절망했습니다. "역시 별 수 없구나! 누가 농촌으로 시집을 오겠나? 잊어버리자!"

그런데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도무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절박한 마음과 그리운 마음을 담아 메일을 띄웠습니다.

얼마 후에 메일이 왔습니다. 그 메일에는 그녀가 자신을 멀리한 사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소아마비이고 얼굴에 화상으로 생긴 흉터 때문에 프로포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인터넷을 통해 몇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자기의 처지를 알고 나서는 다들 돌아서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누가 호감을 보이면 자기가 상처 입고 싶지 않아서 먼저 돌아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잊어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청년은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그녀의 결점을 알고 나니 몹시 혼란했고, 부모님의 실망하시는 모습이 떠오르자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다고 그때 마음이 돌아서면 그녀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자신에게도 큰 상처가 될 것 같았고, 육체보다는 영혼이 중요하다고 자부하던 청년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동정으로 결혼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청년은 마음을 굳히고 그녀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초록물고기님! 이제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님을 사랑합니다. 지난 며칠간 님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님에게는 건강한 몸을 가진 내가 필요하고, 또한 저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님의 결점은 오히려 나에겐 기쁨과 보람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초록물고기가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나기로 했습니다. 청년은 여자의 불편한 몸이 걱정되어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지만 여자는 청년이 사는 걸 직접 보고싶다고 해서 청년이 사는 곳 근처의 폐교된 한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 청년은 한 시간이나 먼저 나가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약속 시간보다 20분쯤 지난 후에 교문에서 웬 날씬한 여자가 나타나더니 점차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가까이 보니까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물었습니다. "혹시 바다님 아니세요?" 청년이 실망되어 물었습니다. "네 맞는데요. 초록물고기님이 못 나오게 되었나요?"

그때 그녀는 자기가 바로 초록물고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의 외모가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잠시 말을 꾸며냈다고 합니다. 지난 3월 14일 둘이 만났다고 하는데, 저는 그 얘기가 실화인지, 만든 얘기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도 마음의 중심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한 마디라도 더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내일의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밭을 사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금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있는데 이 세상에 누가 곧 망할 나라에서 땅을 사겠습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 참 이상하다! 나라가 망한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땅을 산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합니까?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그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주고 내일의 희망을 산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이라도 절망하지 말고, 힘써 내일의 희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난관을 맞이하면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만 죽지 않으면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꿈과 희망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복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희망만은 사야 합니다. 희망만 있으면 살만 합니다. 과거의 어려웠던 기억, 실패했던 기억 때문에 하나멜처럼 "역시 현찰이 최고야!" 하고 살면 안됩니다.

어떤 분은 기억력이 좋습니다. 그런데 기억력이 좋다보니까 몇 년 전의 불행과 상처까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반대로 어떤 분은 참 기억력이 나쁩니다. 그런데 기억력이 나쁘니까 과거의 불행과 상처를 잘 잊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와 불행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강하면 도전정신은 사라지고 희망에 투자를 하지 못하고 오늘만 붙들고 살게 됩니다. 그것은 더 큰 불행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오늘 나의 땀과 물질과 눈물을 투자하여 오늘의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 시련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

여러분! 축복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축복이 조금 멀리 있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우리 인생의 보약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은 멀리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처럼 축복이 바로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시련의 기간이 있는 것이 나중에 보면 오히려 축복입니다. 눈앞의 축복만이 진짜 축복은 아닙니다.

어느 날, 두 개의 소나무 씨앗이 하나는 바위틈에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흙에 떨어졌습니다. 흙에 떨어진 소나무 씨앗은 곧 싹을 내고 쑥쑥 자랐지만 바위틈에 떨어진 씨는 살아남으려고 바위틈에서 안간힘을 쓰고 뿌리를 깊이 박고 어렵게 살아남았습니다. 흙에서 자란 소나무는 열심히 부흥회와 세미나를 다니며 "나는 이렇게 성장했다"고 했지만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그 태풍에 흙 속에서 자라던 소나무는 쓰러졌지만 바위틈에 있던 소나무는 꿋꿋이 서 있었습니다. 바위틈에서 자라면서 모진 아픔을 견뎌내며 튼튼한 뿌리를 길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람에게는 때로 시련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과 신앙의 튼튼한 뿌리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있어도 그것은 뿌리를 깊이 내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있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미완성으로 남아있기에 더욱 자신을 독려하게 됩니다. 그 꿈이 다 이루어졌다면 그 다음 단계는 나태와 게으름이 될 가능성이 많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분발하게 되고, 나중에 보면 결국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얻지 못한 것이 도리어 축복의 기회이고,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성장의 기회입니다. 왜 재벌 2세가 불행합니까? 왜 가진 것은 그렇게 많아도 만족과 행복감이 그렇게 적습니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신선한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무엇이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만듭니까? 희망입니다. 지금 공부를 잘하는 사람보다 앞으로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까? 역시 희망입니다. 현재 돈을 많이 가진 사람보다 앞으로 돈을 많이 벌고 선한 일에 많이 쓰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땀흘리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꿈과 희망은 사람의 영혼을 높게 끌어 올려주는 영혼의 날개와 같습니다. 그 꿈과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어려움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유를 대고, 어떤 변명을 해도 결코 꿈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 꿈과 희망의 대가를 치르십시오 >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꿈과 희망은 거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을 이루려면 반드시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를 치를 줄 알아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면서 꿈나무를 잘 가꾸면 언젠가 반드시 그 꿈은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과 희망을 이루려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과감히 게으름을 척결하고, 낭비벽도 척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 어떤 분의 글을 봤습니다. "오늘 나는 내게 있던 신용카드 다섯 놈을 사형시켰다. 그 동안 신용이라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내 인생을 어둠의 늪으로 밀어 넣은 녀석들에게 난 사형을 집행했다. 큰 가위 사이로 잘려나가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쾌감이 온 몸을 타고 온다. 그 동안 이 녀석들에게 속박되어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친다. 하지만 지금 이 녀석들을 사형시켜도 이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려면 얼마간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 고통을 그 동안의 나의 어리석었던 삶의 대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 이 마음 흔들리지 말고 또 다른 천사의 얼굴에 속지 않고 살기로 다짐하면서 이 봄을 맞이하고 싶다." 저는 그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 그분을 격려해 드렸습니다.

우리는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과감히 대가를 치르려고 해야 합니다. 꼭 끊어야 할 것이라면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어느 꿈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넘치는 희망을 가지고 땀을 흘림으로 활기차게 인생을 살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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