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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기 좋은 나라 (삼하 8: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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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삼하8:15-9:8
제목: 살기 좋은 나라

  교회적으로 지난 3월에 우리는 30주년을 맞이하여 귀한 행사들을 은혜롭게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사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십자가로, 주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국가적으로는 지난 3월 12일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탄핵’이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와 같은 공무원의 위법행위에 대하여 국회의 소추(訴追)에 따라 처벌하거나 파면하는 특별한 제도입니다. 사전에 이렇게 나왔습니다만 실제로 세계 어디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건국이래 3명의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7대 앤드류 존슨은 상원에서 1표 차로 부결됐고, 37대 리처드 닉슨은 표결 전 탄핵의 벼랑에서 스스로 사임했습니다. 그리고 42대 클린턴은 역시 상원에서 탄핵이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의 종주국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성립된 역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이 있은 뒤, 어지러운 상황에서 지난 주 국회의원선거가 있었습 니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보면서 사람들은 국민의 여론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이 잘못해도 결국 탄핵은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여론이 여당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거대여당도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바램이 야당에 표를 줌으로서, 정치인보다 국민이 더 현명하게 판단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뜻을 받들어 지혜롭게 판단하여 하루 속히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 우리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나라가 있어서 교회도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신앙생활도 힘듭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나라안정이 곧 신앙안정입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때 더욱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보면서,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과거보다 오늘이, 그리고 다음세대가 더욱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오늘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개인을 넘어 민족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공과 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은 다윗 왕국의 정치이념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 시대만큼 번영을 누렸던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다윗의 시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2대 왕으로 오른 뒤,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번영을 누렸습니다. 다윗의 시대가 살기 좋은 나라였던 것을 본문은 잘 소개합니다. 15절에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이 짧은 한 문장으로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 왕도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 시대에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든 우선적인 이유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뒤, 나라를 공과 의로 다스렸습니다. 한마디로 부정부패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억울한 사람의 눈물이 한이 되지 않는 나라, 혹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호소할 때 반드시 정의롭게 해결되는 나라, 바로 그런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다윗 시대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부패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사무엘서 처음을 보면,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때에도 부정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이 사사로 있을 때 그들은 돈을 탐내어 뇌물을 받고 재판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삼상8:2) 청렴했던 아버지에 비해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아들들이 지도자가 되어 권력을 쥐었을 때, 그들은 재물이 탐난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과 가정과 나라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는 부정부패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끊임없이 욕망과 사리사욕을 채우다가 하나님과 백성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던 분열왕국시대에는 더욱 부패가 심했습니다. 왕부터 관료와 지도자들, 심지어는 종교지도자까지 부패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했습니다. 그들은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돈을 들고 오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뒷거래가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런 부패를 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가 있으리라” (사5:8)

  이런 암울한 역사에 비해 다윗의 시대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공과 의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부터 철저히 공과 사를 구별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재물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을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공과 의가 다윗 왕국의 건국이념이자 정치철학이었습니다.

  이런 다윗 시대를 보면서 우리 한국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다윗과 같은 정치지도자, 신뢰할 수 있는 정부를 갈망했습니까? 그러나 지난 많은 세월 속에 부패가 잠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부패가 마치 한국의 고유 문화처럼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 정치의 어지러움이 부패의 고리를 끊는 과정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공과 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정부패가 사라지도록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부터 헌신해야 합니다. 종종 부정부패자의 명단에 우리의 이름들이 거론됩니다. 기독교는 그때부터 힘을 잃는 것입니다. 이제 바르게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이젠 행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살기 좋은 나라는 공과 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꿈꾸면서 모두 부패가 사라지기를 기도하면서, 실천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둘째는 질서가 잘 잡힌 나라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사람들이 살기에 편하고, 질서가 잡힌 나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회구조나 제도가 능률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적인 행정체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위험이나 불편이나 시달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뛰어난 행정가입니다. 무엇보다도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시키고, 잘 활용하였습니다. 나라의 번영을 위해 체계와 질서를 잘 세워 나간 것입니다. 다윗의 뛰어남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시면, 다윗 시대의 행정가와 그들의 자리배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요압은 군대장관으로,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었습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으로, 스라야는 서기관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을 대신으로 세웠습니다.

  다윗 정부의 조직이나 행정에 관한 말씀은 역대상 27장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다윗은 모든 체계를 조직화했습니다. 군대조직도 피라밋 형태로 세우고, 병사들을 1년에 한달씩 교대해 가면서 근무하게 함으로서 병역기피자가 생기지 않도록 공평하게 배려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각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조직도 질서 있게 만들었습니다. 각 지역을 총괄하는 행정관을 지파별로 임명하여 이들이 권한을 갖고 민심을 챙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백성들의 애로사항과 불편사항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는 나라인 것을 온 백성과 열방에 심어주기 위한 신앙조직도 질서와 체계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모든 백성이 절기를 잘 지키게 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소홀하지 않도록 제사장의 역할을 강화시켰습니다. 흩어진 백성들이 사는 곳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처소를 만들어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나라를 질서와 체계로 잘 세워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의 탁월함은 공정한 인사정책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사람만 옆에 두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다윗이 망명생활 중에 아둘람 굴에서 함께 했던 동지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 부류는 자기와 피가 섞인 가족이고, 또 다른 부류는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어느 한쪽만 우대하지 않았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사람, 자기 가족을 선별하여 두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능력위주로 행정체계를 만들어 갔다는 것이 놀라울 일입니다.

  공동체의 발전에 암적 요소가 바로 권력자의 친인척비리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시대가 타락할 때 그랬습니다. 지금도 제3세계의 국가의 부패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혈연, 지연, 학연에 편중한 인사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얼마나 우리는 대통령의 친인척의 비리로 시달려야 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질서가 세워진 나라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갈등과 반목이 없는 나라입니다. 계층간에, 세대간에, 지역간에 갭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 이런 공동체가 살기 좋은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도 고질적인 병인 지역간의 대립이 뚜렷했습니다. 게다가 세대간의 문제도 지적이 되었습니다. 계층간의 대립도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믿는 자부터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주인이나 모두 하나입니다. 언제나 이 진리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부터 이런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가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자연도 질서를 따라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우주도 질서를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몸의 구조도 질서를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원하십니다. 질서가 세워지면 안정이 오고, 파괴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질서에 바로 힘이 있고, 안정이 있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는 질서가 잘 잡힌 나라입니다. 좋은 교회는 바로 질서가 세워진 교회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질서가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나의 위치에서 질서를 따라 가면서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사람대접 받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이 8장에서 그치지 않고 9장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9장에 아주 귀한 사건이 앞부분과 연결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국이 부강해 지고 번영과 안정을 누릴 때 사회와 공동체에서 영원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한 사람에게 왕자와 같은 대접을 하는 것을 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가족 중에, 남은 자를 찾습니다. 그 중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그를 찾아 궁궐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그를 궁궐에서, 그것도 다윗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살게 합니다. 이것이 9장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이야기에서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사울 왕가는 몰락했습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사울왕은 백성의 마음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울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백성의 마음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 사울의 가족들은 모두 처형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분이 드러나기만 하면 여지없이 몰아내어 어느 마을에도 발붙이고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냉정한 현실 앞에 사울 왕가의 후손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신분을 노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장 8절에 다윗의 은혜를 받은 므비보셋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런 사람들에게 다윗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사울의 직계인 므비보셋을 궁궐로 불렀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행동은 사랑, 그 이상인 것입니다.

  이후에도 다윗은 늘 소외된 사람을 찾았습니다. 고아나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려운 사람을 위한 관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향한 섬세한 배려, 그야말로 다윗 시대의 복지정책은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파격적이었고, 모범적이었습니다. 다윗의 시대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람 대접받고, 어떤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존귀한 자로 대해 준 것, 바로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을 주고, 사람대접 하지 않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고, 왕자처럼 대우해 주는 다윗의 마음, 그의 신앙을 통해 그는 어쩌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는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마땅히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주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갈보리에서 물과 피를 쏟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아들로 대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기십니다. 바로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체험하고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운데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저 구석에서 외로움과 서러움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없다고 괄시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 곳, 바로 그곳이 머물고 싶고 가고 싶은 곳입니다. 사람으로 대접받고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사회, 나라, 공동체, 바로 그곳이 살기 좋은 곳입니다.

  감옥이 살기가 힘든 것은 많은 이유가 있지만, 사람대접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사람은 사람인데 죄수입니다. 죄인이기에 사람처럼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은 살기가 힘듭니다.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으니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 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까?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 사람이 마치 동물처럼 취급받는 곳이 있습니다. 고귀한 인격이 훼손되고, 인권이 유린되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그런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나라, 그런 공동체가 살기 좋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는 이런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공과 의가 실현되고, 질서가 세워지고, 사람대접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주는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한 주간도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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