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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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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요 20:19-23)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루시느라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죽음의 권세를 엎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성도들 위에 부활의 능력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 당하실 때에 뿔뿔히 흩어져서 제각기 피신했습니다. 모여 있었지마는 문을 잠그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일 저녁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베드로도 그 장소에 있었고,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대화까지 한 두 제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들을 다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셔서 못박히신 손을 보이시고 찔림받은 옆구리의 창(槍)자국을 보여주실 때 정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구나, 마치 잃어버렸던 어머니를 다시 찾은 아이들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네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첫 번 째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당시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습니다.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서 혹시라도 잡혀 죽지는 않을까 두려워서 떨고있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 자살하고, 절망하고, 노숙하고, 해외로 떠나는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라고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명을 주셨습니다. 정말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없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사명을 주셔서 <가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세 번 째는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번 째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그대로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사죄의 권세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누구의 죄를 사한다, 못 사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죄가 사해지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짧은 시간에 다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오늘 두 번 째 명령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받은 자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늘 생각하고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보냄받았다>는 원어가 <사도>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말합니다만 특별히 12제자를 가리켜서 <사도>라고 부릅니다. ‘제자’라는 말은 ‘배우는 자, 따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당히 광의적(廣義的)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벌써 복음서에서부터 12제자 외에 예수님을 잘 따르는 사람을 제자라고 불렀고 사도행전에 오면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다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2제자만은 특별히 <사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실제로 예수님을 <사도>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직접 예수님을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하고 이유를 밝힙니다. 4장 34절에 보면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6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8장 42절에 보면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9장 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11장 4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12장 44절에 보면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다섯 장만 보낸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서 내가 왔다는 말이 없습니다. 1장과 2장, 18장과 19장, 21장만 이 다섯 장만 내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서 왔다는 말이 없지, 열 여섯 장에서는 한 장에도 계속해서 여러 번 씩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서 왔다, 보내서 왔다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였습니다. 사명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늘 인식하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냄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에도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2장 47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18장 37절에 보면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는가, 보냄받은 사명이 무언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악한 사탄에 매여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원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더 풍성하게 살도록,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

이렇게 세상을 구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
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이런 목적으로 보내셨던 것처럼 나도 너희를 이런 목적을 가지고 보낸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신 분이 누굽니까?

나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되 정말 처참하리만큼 채찍에 맞으신 주님,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의 징계를 받으신 주님, 나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못박히시고 창을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주님, 그 분도 우리와 동질의 인간이 아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비교하면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위해 못박혀 달려 돌아가신 주님,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해서, 나를 천국백성 삼기 위해서 그렇게 돌아가신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나의 죄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명령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 시간 나시면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의 모습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영화를 보다가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그 영화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명령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이 나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라고 믿어진다면, 나 때문에 맞으신 채찍이라고 믿어진다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모욕이 나 때문에 당한 모욕이고, 나  때문에 당한 침뱉음이고, 나 때문에 당한 조롱이라고 믿어진다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 때문에 죽으신 죽음이라고 믿어진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명령하시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피곤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확신이 없습니다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아니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우리가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들은체 만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이 안 믿어지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믿어진다고 하면서 그 명령을 받았을 때에 우리가 그 명령을 들은체 만체 한다고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정말 그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가고 또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주님의 명령을 듣고난 다음에 팔레스타인에서 로마까지가 몇 천리 입니까?  그 길을 달려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습니까?
의심많은 도마라고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그는 수 천리나 되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해서 지금도 성(聖)도마 교회가 있고 그 도마교회는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가 다 그렇게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한 외에는 다 그렇게 나가서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2천 년 전에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오늘도 성경말씀을 통하여서, 설교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이라고 믿어진다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안 믿어지면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믿어진다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더라도 기어서라도 가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명령하셨는데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인류구원을 이루라>고 보내셨는데 예수님이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시지 않으셨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겟습니까? 모든 인류는 죄와 사탄의 종이 되어 사탄이 이끄는대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오셔서 간증하실 박에녹 집사님의 간증집인 <Why Jesus?>, <왜 예수냐?>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는 신기(神氣)가 있는 무당이었습니다. 그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정보훈이라는 무당이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법사(法師)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중이었습니다.

일평생동안 중으로 살던 그 사람이 암에 걸려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문병 온 박에녹 집사 (물론 그 때는 박에녹이 아니었습니다)를 불러서 이야기 합니다. “동생, 동생도 이젠 예수 믿게. 나도 이제 며칠 뒤에 세례받기로 했네. 곧 죽을 내가 이제와서 웬 예수냐고 하겠지마는 귀신 믿어 득(得)본게 뭐가 있느냐, 귀신들이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더냐, 무당들도 지금 속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귀신들은 툭하면 굿하라, 고사 지내라, 기도비를 달라, 초하루 보름에 쌀과 돈들고 오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득을 준 것은 없다는 것을 동생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도 내 욕심으로 무조건 점보러 오는 사람들을 엮어서 굿을 하라고 엄청나게 많이 굿을 시킨 것 자네도 알지 않은가, 그들의 생활 어려운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고 전세들어 사는 사람들도 전세금까지 빼오라는 것이 귀신들의 말 아닌가, 전세금 몇 백배나 벌어 줄테니까 그것 빼서 바치라고 뻥을 치면서 귀신들은 하지 않던가, 그러니 동생, 예수믿게.”그러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에녹 집사님은 그 분이 일생동안 무당으로 살다가 간 그 사람의 마지막 유언을 듣고 예수 믿어서 그의 삶이 달라져서 180도로 축복의 인생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도 순종하여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고 하면 우리도 귀신에게 매여 속고 살다가,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살다가 결국에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순종했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오늘 전 인류의 3분의 1인 20억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따라가지 않습니까?

3.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가 보내셔서 내가 이 땅에 왔는데, 인류 구원을 이루었는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제 가거라, 가서 네 주변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라, 네 가족을 구원하라, 네 이웃을 구원하라, 네가 알고 있는 네 주변의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보내시는데, 가라고 하시는데, 안 가면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 오셨을 때에  모든 인류는 지금도 죄 가운데 있을 그와 같은 이 비극적인 처참한 환경이 내가 가라고 할 때에 안 갔을 때에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너무 컸기에, 채찍에 맞는 고통이 너무 컸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 지는 것을 생각하고 깜짝 깜짝 놀랐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민하여서 내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제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되겠습니까? 십자가 지지 않고 인류를 구원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애원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고통을 나를 살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하여, 나를 지옥의 고통과 사탄의 손에서 끌어내시기 위하여 이런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 주님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가겠습니다.” 해야 할 우리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가겠습니다.”하고 나서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복음을 들고 전했기 때문에 우리같은 사람까지 예수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아닙니까?

호주 가까이에 있는 뉴 헤볼리시스라는 제도(諸島)가 있습니다. 한 30여 개의 섬으로 이루너진 곳인데 백인이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에 영국선교사이며 학자인 존 윌리암즈라는 사람이 1839년 11월 20일에 상륙을 했습니다. 그러나 상륙하지마자 원주민들이 나와서 살해(殺害)해 버렸습니다.
두 번 째로 해리스 목사님이 그 뒤를 이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도 상륙한지 3일 만에 살해 당했습니다. 그러면 아, 거기 가면 죽는다, 가면 안되겠다 하고 안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세 번 째로 존 골든이라는 목사님 부부가 같이 들어가서 원주민과 사귀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오래지 않아서 백인을 증오하는 토인에게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네 번 째로 맥 네이슨 선교사가 들어갔습니다. 그도 1년도 못되어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섯 번째로 골든 목사가 들어갔는데 그는 세 번 째 들어갔다가 살해된 존 골든의 동생이었습니다. 골든 목사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 들어 갔습니다. 자기 형수도 죽었고, 자기 형님도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안들어가야 되는데 뻔히 알면서 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받아 들여졌습니다. 현지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괴한이 침입해서 도끼로 처참하게 찍어 죽였습니다. 그의 피가 번역하고 있던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순교 장면의 원고를 적셨습니다. 그 후 일곱 번 째 선교사인 로버슨 목사님이 상륙했습니다. 비로소 그에 의하여서 30개 섬의 모든 주민들이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독교화 되어 졌습니다. 

왜 이 선교사들이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자기도 들어가고, 부부가 같이 들어가고, 형이 죽은 그 장소, 형수가 죽은 그 장소에 동생이 따라 들어갔습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신 이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 말씀 듣고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순종하여서 일어나서 갔던 것입니다.

토마스 목사는 영국 웨일즈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런던대학을 졸업했습니다. 24살의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중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아서 중국에 왔습니다. 선교사업을 시작하는 그 때에 같이 왔던 아내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기후와 식사와 생활환경이 맞지 않아서 몸이 점점 쇠약해 지더니, 선교여행을 하고 돌아오니까 혼자서 앓다가 죽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아기를 가진 채로 죽었습니다. 실망에 빠진 토마스는 한국에서 온 천주교인 김자평이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에 가서 선교를 해야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님은 당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윌리암슨 목사님의 권고와 후원으로 한문성경과 전도지를 공급받고 김자평의 안내로 백령도에 가서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고 전도를 하고 갔습니다.

다음해 토마스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만호를 타고 한강으로 들어 온다는 것이 그만 잘못들어가서 대동강으로 들어갔습니다. 만경대에 상륙을 해서 100여 권의 성경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조선정부에서는 퇴각하라고, 물러가라고 명령했지만는 이 선원들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조선정부에서는 배에다 불을 질러서 여러 배를 띄우니까 그만 셔만호에 불이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토마스도 헤엄을 쳐 나왔습니다. 가지고 있던 성경 한 권을 평양성 수비대원 김충권이라는 사람에게 주면서 “예수 믿으라, 예수 믿으라”고 외치면서 대동변에서 참수 당했습니다. 목이 잘려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6살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우리 아이들 26살 짜리 한번 보세요. 철이 있습니까? 만약에 결혼했다면 신혼살림에 한창 기뻐할 그때에 아기 낳아서 재롱 볼 그때에 선교를 위해서,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죽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아내를 묻어야하는 아픔을 경험했으면 돌아갈 것 아닙니까?
그래도 선교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는 참수(斬首) 당했습니다. 지금도 양화진(楊花津)에 가 보세요. 수많은 외국선교사들이 와서 거기 묻혀있지 않습니까? 아무 연고도 없는, 피도 섞이지 않은, 얼굴도 다른, 말도 다른, 생활습관도 다른, 오히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하는, 이런 민족에게까지 왜 와서는 그들이 자기의 귀한 생명을 초 개와 같이 버릴 수가 있었습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서 그렇게 이 땅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우리가 사력을 다하여 살려 주었다고 하십시다. 그러고는 우리는 힘이 빠져서 물에 빠져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혼수상태가 되어 한 10년 쯤 그렇게 있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다가 겨우 회복되어서 눈을 뜨고 살살 걷고 있는데 나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찾아왔는데 부탁을 한다고 이 약을 해운대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을 해야겠는데 해 주겠느냐고 부탁할 때 내가 살려준 그 사람이 “아, 오늘 내가 몸이 지뿌둥해서 못가겠다, 귀찮다, 그런걸 왜 나한테 부탁하느냐. 내가 길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가겠느냐,”고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의 감정이 어떻겠습니까?
10년 혼수상태가 아니라 우리하고 동질(同質)도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어주시고, 나를 위해서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신 그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께서 우리를 보낼 때 거저 보냅니까? 전갈과 뱀을 밟으며 원수마귀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까지 주어서 보내는데 왜 보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과 같이 사람 구원하라고, 죽을 사람 구원하라고, 그것도 너의 형제, 자매, 이웃, 친구들, 많은 사람을 구원하라고, 구원받은 사람이 더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축복된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목적으로 내 주변에 구원받지 못한 자, 사탄에게 매여있는 자, 지옥 갈 자를 향해 너도 가라고 명령하고 보내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가야될 내 주변의 사람이 참으로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도 가라고 했을 때 가서 우리가 예수 믿었는데 우리는 참으로 사랑하는, 내 생명과도 같은 가족들, 그들에게 가서 생명을 구하라고 하는데, 내 이웃에게, 내 민족에게 가라고 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명령을 등한시하고 못들은체 하고, 귀찮다고 하고, 가기 싫다고하고, 얼마나 우리는 많이 거부해 왔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사도들처럼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처럼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혼을 추수하여서 주님 앞에 드리는,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 지금 와 계십니다. 오늘 저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가거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데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서 세상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가정을 행해서, 피묻은 복음을 들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와 줄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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