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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노래 (마 28: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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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부활의 노래
성경본문 마태복음 28:7-15

  본문을 보면 7절에서 10절과 11절에서 15절은 마치 연극의 1막과 2막처럼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28장 7-10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시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한마디로 주제를 정한다면 ‘환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전해주는 이 말씀을 들은 그 여인, 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그 모습,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전해줄 말, 갈릴리로 가라 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들이 그냥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환호를 하면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환희의 모습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1절부터 15절까지는 전혀 다른 장면이 벌어집니다. “여자들이 갈 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들은 대제사장들, 군병들의 반응인데 이들의 반응을 한마디로 주제를 정하면 ‘두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을 들은 여인들과 제자들은 환희의 소식으로 받아들이는데 군병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그 소식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묘한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부활의 반응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있고, 오늘날 이 지구촌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이 두 반응은 그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부활의 순간에 아마도 천사들은 찬양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날에도 하늘의 찬양이 있었다고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순간에는 천사의 찬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이 우주적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찬양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늘의 찬양이 있었겠지만 그 찬양의 내용은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어났던 이 두 가지 반응은 찬양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환희의 사건이고 우리가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면 환희를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두려움과 근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활의 이설들

  본문에 나타난 데로 장로들과 함께 모여서 대제사장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매수를 했습니다. “너희는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이렇게 돈으로 입단속을 해서 막으려고 하는 제사장들과 군병들의 이 어리석은 행동들이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도적설이 여기서 기인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도적설이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또 어떤 학설이 나왔느냐 하면 타묘설, 즉 이 여자들이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갔다, 그래서 다른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했다 이렇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러나 이런 도적설, 기절설, 타묘설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하는데 부인하는 논리로 절대로 먹혀들어가지가 않습니다. 그러다가 훗날에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들고 나왔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신화설로 돌려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것은 제자들의 사기이지 실제가 아니다 라고 까지 뒤집어 씌웠던 것입니다. 왜 그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못마땅해 하고, 예수님이 살아난 사실이 왜 두렵고, 왜 그것을 돈으로 매수하여 입단속을 할 만큼 중대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살아나신다고 예언을 했고, 그가 살아남으로서 그는 하나님으로서 완전히 확정이 될 뿐 아니라, 입지를 가지게 되고, 로마의 권위도 무너지고,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의 권위도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부활은 막아야 된다, 그래서 돈으로 매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 죄 많은 인간들의 끝없는 불신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어코 라도 심판하고야 마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그 부활을 기뻐하고 영접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이 양면의 인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다 같은 사람인데 왜 그 부활을 그렇게 양쪽으로 반응을 하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연합성

  물고기는 신비로운 동물입니다. 수압은 물이 깊을수록 그 압력이 높아갑니다. 수압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하면 한 때 ‘스피어스’라는 잠수함이 수압에 못 견뎌서 파열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물밑의 수압은 수심 100m, 200m, 300m 이렇게 내려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압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깊은 바다 밑에 사는 그 물고기들은 어떻게 수압을 견디느냐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쇠도 견디지 못하는 수압인데 어떻게 물고기들은 거기서 그렇게 유유히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고기 몸 안에 있는 압력과 수압이 동일하게 때문에 아무런 저항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지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물고기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도 똑같은 원리로 하나님이 적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그 부활을 기뻐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의 상태가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코드와 하나님의 영계의 코드가 같기 때문에 그것은 부담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지 않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욥의 신앙생활을 보면 첫 번째로 그가 물질을 잃어버립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7남3녀를 잃어버립니다. 부인은 죽지 않았지만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여자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잃어버리면 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잃고, 가정을 잃고, 건강을 잃고, 친구를 잃어버리면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욥은 그런 고난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보면 욥의 고통은 그와 같은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힘든 고통을 우리 앞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질을 잃고 고통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가족이 겪는 불행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 하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고통 하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욥이 더 힘들어하는 고통이 무엇이냐 하면 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고통을 당할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왔느냐, 의에 대한 고난입니다. 그 영적인 고난에 대해서 욥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사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어찌하여’ 라는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합니까? 죄 없는 나를 왜 버리십니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죄 없이 고난을 당한 모든 의인들의 그 고난을 다 포함하는 주님의 부르짖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이 고난당하는 사람이 다 부르짖었던 그 고통의 절규가 ‘여호와여 어찌하여 내가 주님을 향하여 의를 행하며 말씀으로 살았건만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라는 것인데 욥이 그 지경에서 아주 힘들어 합니다. 그가 물질을 잃고 자식을 잃은 그 때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라고 그는 육신의 것을 잃어버린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고 친구들이 와서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정죄를 하고 나오니까 내가 이렇게 고통 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줍니까? 하는 주님의 부르짖음을 욥이 이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이 끝까지 견디는 것은 하나님과 욥의 영적 코드가 맞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욥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 관계가 바로 이런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그 생각과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도 우리를 성령으로 품으시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15절 이하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믿게 되고 순종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부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의 신비성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는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오도다케 히로타 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성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다리길이가 10㎝밖에 안 되는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의사가 이 아이를 받아들고 차마 산모에게 보여줄 수가 없어서 한 달 동안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라고 난 게 무슨 나무를 잘라놓은 것 같으니까 의사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산모한테 보여주느냐는 것입니다. 산모가 충격 받을 것을 생각해서 한 달 동안 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안 보줄 수 없습니다. 한 달 만에 이 아기를 산모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이 모자가 상봉을 하기 전 놀라지 말라고 당부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기를 보자 이런 말로 첫 말을 했습니다. “어머나, 내 귀여운 아기!” 하고 그 아기를 안고 귀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그 사람 같지 않는 아기를 얼마나 잘 키웠는지 이 오도다케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 장애인인 줄을 느끼지 못했다. 집에서 조금도 나를 별나게 취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정신적으로 하나도 격의가 없이 그대로 대해주어 길렀습니다. 이 오도다케는 달리기도 합니다. 야구도 합니다. 농구도 합니다. 수영도 합니다. 컴퓨터, 붓글씨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도다케에게는 최고의 장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울해본 적이 없답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자란 적도 없고,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고민을 해본 적도 없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정신건강이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지가 멀쩡한 사람 중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이 오도다케를 만나서 상담을 하고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치유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정신건강미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글에서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장애는 특별한 개성일 뿐이다. 마음을 열고 보면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친구가 더 많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한다. 내가 할 일을 하는 그것이 내 보람이다.”

  이 오체불만족에서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와 이 오도다케와의 관계입니다. 그 어머니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지선이의 어머니도 위대한 엄마입니다. 또 이희야, 손가락 세 개를 가지고 피아니스트가 된 그 아이의 어머니도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와 오도다케는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오도다케는 그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고 이제는 몸이 성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치료해줄 만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명랑함에 전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운동경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시종일관 웃으면서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준 그 용기와 가능성은 대단히 큽니다. 지금도 온 세계 희망의 메신저로 그는 세계를 순방하고 있습니다. 인격과 환경이 맞아갈 때 이런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으로만 이 부활을 믿을 수 있고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을 수 있고 부활의 환희를 나의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이 여인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이 여인들이 모습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노래를 부를 때 환희의 주제로 이 부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돈으로 상대방을 매수해서 부활의 소식을 막으려 하는 이런 인간들의 반응은 역사 속에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좋은 학문을 했던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진리를 부정하면서 이 부활도 신화로 돌리는 망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아지지도 않고 부정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자산이고 우리의 신앙이고 근본이고 완성입니다. 새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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