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버지의 마음 (눅 15: 17-24)

  • 잡초 잡초
  • 279
  • 0

첨부 1


설교자 : 임경택 목사 (종로교회) 

본문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라는 말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아버지에게 다 기대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아버지’ 하면 ‘힘’ 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밥줄로 생각했습니다.
엄한 아버지의 말씀에는 온 식구가 순종했습니다. 무서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버지’ 에 대한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오늘의 현대 산업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를 돈버는 기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힘이 빠지면 버려버립니다. 아버지를 얼마나 혹사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불황과 조기퇴직 물결로 실의에 빠진 아버지들이 많이 양산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렇게도 씩씩했던 아버지들이 요즘은 45세만 지나도 ‘사오정’ 신세가 되는 경우들 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사고방식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이제 아버지들을 살려야 할 줄 믿습니다.
아버지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전통적인 권위를 버리고 자신을 관리하는 아버지들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아버지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데만 열심이어서는 안되고, 자기 계발과 충실을 기 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입니다.
아버지는 힘과 사랑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어떤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 잘하는 아들입니다. 그런 데
그런데 둘째아들이 아버지를 속 썩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나중에 주실 유산을 아예 지 금 당겨서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규례와 법도에 의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이 둘일 경우에는 형이 유 산의 3/2를 갖고, 동생이 1/3을 갖습니다.
본문의 둘째 아들은 그 몫을 미리 나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니 부모가 키워주고, 결혼까지 시켜주었는데,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 유산으로 받게 될 재산의 몫을 미리 달라는 것입니다.
동생은 자기 분깃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거지가 되어 그제서야 아버지가 생각나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04년 4월16일 새벽 1시 40분쯤 아버지 82살 이 모씨의 집에 찾아가 50만원과 쌀을 달라고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아버지를 넘어뜨려 숨지게 한아들이 있었습니다. 82세 된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면서 아버지를 밀어 숨지게 한 혐의로 40살 이 모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도봉경찰서)
여러해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노란 손수건”이라는 이야기가 수록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맥 을 같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 아름다운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1. 아버지의 마음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는 기다리는 마음을 가진자입니다. 좋은 아버지는 닥달하지 않습니다. 고전13: 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너무 서두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닦달하기 시작합니다.
남들보다 점수가 떨어지면 못 참습니다. 남들보다 키가 좀 작아도 못참습니다.
좀 기다려 보지도 않고. . . .부모의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부친 모친 할 때 쓰는 “親”자는 설립자 밑에 나무목을 쓰고 옆에 볼 견자를 씁니다.
멀리 떠난 자식을 동구밖 나무에 올라가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참 부모라면 자식이 모자라도, 부족해도 기다립니다. ‘앞으로 잘 되겠지. . .’
본문의 아버지는 참으로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미래의 회복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현재만 보고 그 자녀를 포기합니다.
부모도 자녀도 서로를 포기하고, 서로를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죄의 모습이 아니라 마귀의 종의 모습이 아니라, 병들고 추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아들이 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 끊을 것을 끊고, 버릴 것은 버리고 주님을 위해서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의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으로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흑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흑 잘못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 변화 받아 새 사람 이 될 때까지,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아 말씀대로 살아갈 때까지,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고, 은혜주시고, 힘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
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흑시 잊을짜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혹 자식을 잊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힘주십니다. 능력 주십니다. 기다라십니다.
여러분 이번 태신자 1,2차 작정을 통하여 103명이 태신자를 작정했습니다.
250명을 작정 했습나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작정한 태신자들을 우리교회의 일원으로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교회 식구들입니다. 아기를 임신하면 벌써 우리 식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생명들을 우리교회의 식구로 알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며 . . . .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가 많고 죄가 많지만 기다리십니다.
아버지의 기다림과 같이 기도하며 소망중에 사랑을 베풀며 여러분들의 태신자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2. 아버지의 마음에는 사랑과 용서가 있습니다.

20절에 “달려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은 주저하며 기웃거립니다. 아버지가 맞이해 주실 것인가? 그러나 먼저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달려오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선재적 은총이라 합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에는 용서가 깔려있는 기다림입니다.
아들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와도 아버지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모든 죄를 철저하게 용서하셨습니다.
아들은 스스로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죄를 많이 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아버지께도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아버 지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저 종으로, 품꾼으로만 여겨주옵소서" (눅15: 21)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둘째를 아들로서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이미 다 용서 해 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삐뚫어지고 망가진 아들의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은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삽지가의 사랑으로 . . . 믿기만 하면 되도록. . .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나의 결단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갈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14:6)”
하나님이 우리기 나아 갈 수 있는 길을 내어 주시지 않으면 하니님께로 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직 먼데 눈이 잘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시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고 먼저 달렸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아들이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사막에 비행기 한 대가 추락했습니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부자의 아들이 탄 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 강한 모래바람을 만나 그만 사고가 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추락사고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수색대를 조직해 사막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불행히도 아들의 생존 여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끈질긴 수색 끝에 비행기 추락지점은 발견한 것은 며칠 뒤였습니다.
아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계속 찾아나섰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은 아버지는 간절히 기도했어요.
“제발, 제 아들을 지켜주옵소서" 기도를 마친 뒤, 아버지는 수백만 장의 전단지를 사막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써야할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 ‘음 . 사막에서의 생존법? . . . . 아니야, 아니야. . . .”
한참을 고심하던 아버지가 결국 전단지에 적은 글은 단 한마디였습니다.
“나의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의 그 외마디 절규는 사막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수색대는 사막 한 가운데서 거친 숨을 헐떡이며 스러져 있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사막의 열기와 굶주림, 그리고 절망감으로 죽어가던 아들을 살린 건,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은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바쁩니다. 부지런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데이트 하기 위해서 몸단장하고 나가야 되기 때문에 . .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부지런합니다. 새벽기도하랴, 성경읽으랴, 기도하랴, 전도하랴. .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부지런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러 올 때 게으러 며 핑계를 대는 사람은 뭔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성도는 금요일부터 바쁩니다. 주일날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주일 아침에 전화하면 벌써 놀러가고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주 5일 근무를 하는 곳이 있기 때문에 금요일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 마자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며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린 것이 돈맛을 알아가지고는 . . . . 돌아오기만 하면 내 돈을 찾을 거야 어떻게 번돈인데. . ’ 라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용서한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 다.
아버지의 눈은 한없는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잃어버린 자녀들을 긍휼의 눈으로 불쌍히 여기 시며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긍휼의 눈으로 먼 나라에서 방황하는 아들의 걸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아 돌아오기만 해라. 모든 것이 다 준비 되었단다.’ 아버지는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20절에 “입을 맞추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입맞춤은 아들의 과거에 대한 넉넉한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21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목을 안고 웁니다. 그 때 아버지는 “괜찮다, 아들아, 내가 네 마음을 다 알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용서 해 놓고 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때 태신자 전도운동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들의 미래를 준비함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아들이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신분을 회복시켜 줍니다.
만약 아버지가 아버지의 정의만 주장 한다면 이 아들은 이 마을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불효자요, 재산을 탕진한 자입니다. 완전히 죄인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매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일을 제일 먼저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2절 아버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1)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힙니다 - 좋은 옷은 더 이상 종의 옷이 아니라
주인의 아들의 옷을 말합니다. 아들의 신분을 회복 시킵니다.
2) 손에 가락지를 끼었습니다- 상속자임을 나타냅니다.
3) 살진 송아지를 잡고 이웃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 한 사랑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축제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죽었던 기를 다시 살려 줍니다. 아버지와 단절 된 관계를 다시 이어 줍니다.
비로소 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교회 나와서 위로받게 하시는 것의 차원을 뛰어 넘어서 잃어버린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조금의 흠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 이와 같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당당하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 17)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 라" (요10:28)

하나님은 지금도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메고 있는 이 시대의 탕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 때움에 우리에게 구원과 은총이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 있게 된 것을 . .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태신자를 주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