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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명하여 불렀나니 (사 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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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오늘 이 복된 날에 하나님의 집에 나오셔서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하늘로부터 나리는 은혜와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시거나 오랫만에 나오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뜰을 밟는 이 귀한 발걸음이 영원까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느 기관에서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하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를 보니 첫째가 항상 즐겁게 사는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살아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애정과 믿음을  가지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요소가 건강이나 소유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을 주면서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죽도록 하면서도, 그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일로 여긴다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꿈과 미래와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 꼭 필요한 것,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흔히 생활의 3대 요소 또는 3대 덕목이라고 불리워집니다. 빨강 파랑 노랑 이 3가지 색깔이 섞여서 수많은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 내듯이, 믿음 소망 사랑은 인간 생활의 3원색이 되어서 ‘아름다운 생활’이란 삶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합니다.또 어떤 이는 마치 삼각형의 세 모서리처럼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 생활의 모든 내용을 함축성있게 요약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에게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돈의 가치를 믿기 때문에 종이 조각 한 장의 화폐가치를 인정하고 물건을 교환합니다. 네거리의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의 신호등을 믿고 따르며 차들이 질서를 지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있기에 가정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날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우리 사회의 믿음, 신뢰가 무너졌기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과 신뢰가 무너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 믿음이 부족하니 일이 잘 안 풀립니다. 국제간에 신뢰가 무너져 미움과 증오로 가득하고 전쟁의 소문이 들립니다.

이렇게 믿음이 참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내 자신에게로 향할 때 우리는 확신, 신념, 소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이웃에게로 향할 때 우리는 신용, 신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시작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이 믿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 믿음과 더불어 둘째로 소망이 중요합니다. 소망은 희망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소망 가운데 출생하고 소망 가운데 살다가 소망 가운데 죽습니다.

사람은 소망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산다는 것은 소망, 희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 생활의 원동력이요,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요,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생활의 비타민입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소망의 태양이 빛날 때 우리는 기쁜 얼굴과 밝은 마음으로 힘차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 속에 온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넋두리를 합니다. “지옥이 이보다 더 참혹할까?” 주인공이 응답합니다. “지옥이라는 것은 말일세, 사람이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아직 소망, 희망이 있는한 내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소망의 반대는 절망이요, 절망은 곧 정신의 죽음이며 생의 포기입니다. 우리는 항상 소망,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소망의 별을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소망은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갖는 것이요, 불안 속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며,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일으켜 세우는 힘과 능력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길에서 5천원짜리 돈을 주웠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또 이런 일이 있을까해서 땅만 쳐다보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것이 생활이 되어 수많은 동전, 단추, 머리핀 그 외 자질구레한 것을 많이 주웠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아름다운 꽃이나 새와 나비를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 일생이 결국 쓰레기 줍는 일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보며 사는 사람은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은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기대와 꿈과 소망 가운데 살 것입니다.

사람이 소망, 희망을 가지고 살되 영원과 이어지는 소망이 참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누리는 소망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죽음 이후에 있을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세워 나가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영원과 이어지는 소망이 주는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 모두 이 영원한 소망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이 귀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하라면 우리는 사랑을 말합니다. 슬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랑이 담겨있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받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닫힌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 사랑은 상한 마음을 치료해 주는 묘약입니다. 사랑이란 냄새도 모양도 없지만, 그 길이도 알 수 없고, 크기도 헤아릴 수 없지만, 그 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 없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의 본질적 타락이 문제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행하기도 하고, 사랑때문이라며 죄를 짓고 사랑의 이름으로 갖가지 불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표현 방법이 서툴러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부모라도 “내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하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인 내 사랑의 방법이 잘못되었고, 그러기에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있으나 사랑의 표현이 잘못되었기에 진정한 사랑이라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198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영국의 방송기자들과 만나서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당신은 평생을 길거리 노숙자와 함께 했으며,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단 몇 시간만이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참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말입니다. 버림받지 않다는 것,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있는 단 몇 시간만이라도, 죽기 전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살릴 능력도 없고 도와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베풀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랑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알고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 안에서 만족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유대인의 지혜의 책인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셋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하루도 못 보면 안될 친구입니다. 두 번째는 그저 덤덤한 친구입니다. 세 번째는 별로 달갑지 않은 친구입니다.

이렇게 세 친구를 둔 사람이 하루는 왕으로부터 궁궐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자기에게는 죄가 많은데, 왕이 자기를 재판하려고 부르는 것 같아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덤덤한 친구에게 말하지 같이 가기는 가겠는데, 궁궐 대문 앞까지만 가겠다고 합니다. 할 수없이 별로 반갑지 않은 친구에게 말하지 흔쾌하게 같이 가 주겠다고 말하면서, 왕에게 자네는 참 좋은 사람이라고 변호해 주겠네 합니다.

첫 번째 친구는 바로 돈입니다. 돈은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를 돕지 못합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척입니다. 아무리 정들었어도 장례식 날까지 따라오면 그만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사랑은 끝까지 나와 동행합니다. 거절도 중단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사랑하며 살았느냐 하는 것만이 영원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신이란 우주의 법칙이다, 절대 진리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이렇게 모든 지혜를 동원해 신의 본질을 논합니다. 다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 사랑이 이 우주에 차고 넙칩니다.

사람의 사랑은 제한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잠간 뜨겁다가 식어집니다만,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해 영원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조건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기에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기에 나도 당신을 미워합니다. 꽃은 아름답기에 사랑하고 당신도 아름답기에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나는 죄인, 죄인, 교회에 나오면 그저 죄인 취급을 해서, 기분 나빠서 교회에 안 나간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 “기독교는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나서, 이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 병 주고 약주고 하는 엉터리 종교다.”

일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한 고등학생이 부모님과 말다툼을 하다가 “엄마는 도대체 나를 이해하지 못해!” 하면서 집을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엄마는 가출한 그 아이를 찾아다니다가 그만 병들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10년 동안 이 아들은 나쁜 짓 안하고 구두닦이를 하고 신문 배달하면서 성실히 생활해 마침내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사람은 그의 부모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집을 뛰쳐나가서 산 10년 동안의 하루하루 생활 전부가 부모님 앞에서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바로 이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안고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 나는 과연 영원하신 하나님 품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뭔가 영혼이 고독하고 허전한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먼저 나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나를 먼저 찾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나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와 죽음과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과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 딸을 가슴에 품고 ‘너는 내 아들, 내 딸이다. 너희는 내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좋은 것을 고릅니다. 과일 하나를 사면서도 싱싱한 것, 빛깔 좋은 것, 큰 것을 골라 가집니다. 좀 더 나아가서 배우자를 선택해 가정을 이루려고 할 때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아들, 딸이다, 내 자녀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각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랑을 더 이상 배반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우리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이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거하는 축복된 존재들 모두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제 아름다운 봄이 왔습니다. 포근한 생명의 계절입니다. 왜 이렇게 봄은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북반구가 태양과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겨울은 왜 춥습니까?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태양과 가까워지면 따뜻하고, 멀어지면 추워집니다. 이유는 이것 하나입니다.

우리 마음이 왜 사랑이 식고 냉냉해 집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과 생활을 이 찬란한 봄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게 하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하시고,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참 사랑으로 사람됨의 길을 걸어가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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