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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행 10:34~38 (사 43:8~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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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석공 목사 (광야교회)
 
  4.15 총선이 별 탈 없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를 놓고 저마다 다른 해석들을 하고 있지만 제가 볼 때에는 대체로 잘 된 것 같습니다. 아니 아주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적절하게 의석 분배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는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40 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 때문에 좀 더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들을 그만큼이라도 뽑아 준 것은 다시 한 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기 때문에 정말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10 석에 불과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게 된 것도 좋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기성 정치인들로서는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이제 정치권에는 부정, 부패가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좀 아쉬운 것은 이번 총선 결과를 통해서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망국적인 지역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런데 막상 선거 결과를 볼 때 계속해서 지역적으로 표가 갈리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입으로는 지역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떠들어 대면서도 오히려 지역 감정을 조장해서 한 표라도 더 얻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좀 더 깊이 분석, 연구해 봐야 하겠지만 그들은 지역과 상관없이도 고르게 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지 않았습니까?

  사실 고질적인 지역 감정만 문제는 아닙니다. 이번에 드러난 것처럼 세대 차이도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갈등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코드 인사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은 동호회로 충분합니다. 뭔가 함께 즐기는 것은 몰라도 국정 운영을 동호회 수준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요즈음 세계화 시대를 맞아 대학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각 대학마다 중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서울대 출신은 대체로 서울대 교수로 가고, 연대나 고대 출신도 모교 교수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하버드 대학 출신은 하버드 대학 교수로 가지 않습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때 탁월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 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기록은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이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른 보면 그의 경건한 삶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은혜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본 환상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에게 구원이 임한 것은 오직 깨끗하지 않은 것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고넬료처럼 경건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윤리적인 교훈이 메시지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일에 베드로를 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고넬료가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도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유대인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높은 담을 헐고 그 둘로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그 어떤 부정한 존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이방인은 구원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방인도 얼마든지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인식의 대전환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교회는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그릇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그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던 고정 관념의 장벽까지도 허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이런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확신을 가지고 설교했던 그 설교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유대인들은 외면적인 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성령을 체험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런 범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 번씩이나 보여 주신 환상을 통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생각이 아주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베드로의 말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갖고 있던 선민 사상을 비롯한 그릇된 고정 관념을 깨뜨리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울러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라고 하는 제한된 지역을 벗어나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이방인을 대표하는 고넬료를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먼저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시라고 말한 후 그 의미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합니다. 뭐라고 그가 말합니까? 사도행전 10장 36절부터 43절까지의 그의 설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과 능력이 충만한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람들은 나무에 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그 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우리가 바로 그 증인이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부분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앞에서 말한 깨달음의 연장인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있던 그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을 통해서 그 편견에서 벗어나 이방인을 향해서 확신에 찬 어조로 진리를 선포합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0장 44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베드로의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베드로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아주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6)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 명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셨던 것과 아주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사건을 가리켜서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이 그렇게 급하게 임하셨습니까? 이방 선교의 당위성, 즉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속히 전파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이 그와 같은 성령의 강림으로 나타났을 것 아니겠습니까?

  10 퍼센트 미만의 백인들이 인구의 90 퍼센트가 넘는 흑인들을 지배하던 시절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요한네스버그 시내에 있는 한 흑인 교회에서 세족식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백인 남성이 나타나서 한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씻겨 주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던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백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올리브 판사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가 발을 씻겨 주려는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집에서 20 년 동안 일했던 하녀였습니다. 그녀가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습니다. “주인님, 제가 어떻게 주인님에게 발을 내밀 수 있습니까? 어떻게 백인이 흑인의 발을 씻겨 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올리브 판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도 그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흑인과 백인이 무슨 차이가 있으며, 또 주인과 하녀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는 그녀의 발을 정성껏 씻겨 주었습니다. 그 당시 백인들에게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에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는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영의 세력은 우리를 분열과 대립, 시기와 질투, 반목과 다툼, 그리고 마침내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기쁘고 즐겁고 삶을 살고 싶습니까? 동, 서가 화합하고 남, 북이 하나가 되어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는 행복한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 주님이 더욱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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