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 (엡 4:1-6)

  • 잡초 잡초
  • 338
  • 0

첨부 1


- 설교 : 김동호 목사 (높은뜻 숭의교회) 


제가 개인적으로 참 힘들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 종일 말 안하고 혼자 있는 것입니다. 청년 때는 누구와 30분 이야기하게 되면 3시간 쯤 자야만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곤 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사람과 말하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과 한 마음이 되는 것, 그래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행복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함께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육선(肉饍)이란 고기반찬을 의미하는 것이랍니다. 고기반찬이 가득한 부잣집이라고 하여도 밤낮 다투고 산다면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사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 됨’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리고 ‘흩어짐’은 하나님의 저주로 말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던 노아의 후손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은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말이 안 통하게 되자 저들은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서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함께 살지 못하고 각기 뿔뿔이 흩어져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치명적인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정 반대가 되는 사건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노아의 후손들을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즉시 저들에게 복을 주시었는데 그 복은 그때 방언으로 처음 나타났습니다. 방언은 창세기 11장 때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다시 하나로 회복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은 ‘온 지면으로 흩어짐’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2장과 3장은 ‘모이기를 힘씀’과 ‘서로가 다 하나가 됨’의 역사입니다. 저들은 서로 진정한 의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함께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의 공민권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이 늘어만 갔습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는 것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 세상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 천국을 얻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서슴치 않고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의 천국은 교인들과 하나님과의 서로 하나 됨에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이 바로 이 ‘하나 됨’의 축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은 이 하나 됨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진정으로 하나이십니까? 한 마음이십니까? 서로 말이 통하는 일심동체 부부이십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가 언제나 하나이십니까? 벌써부터 말이 통하지 않아 짧은 단문으로만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저 한 집에서 살 뿐 전혀 남과 같은 사이로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하나 됨’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몇 명이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모이느냐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산이 얼마나 되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몇 명이 모이든, 어떠한 사람이 모이든 상관없이 ‘저들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악한 영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요 아무리 그럴 듯 해 보여도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악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 중에 옳지 못한 것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옳지 못한 것에 대한 고발과 비판에도 두 종류의 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비판자와 비판의 대상자가 하나인 경우입니다. 잘못되고 옳지 못한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지만 그 속에는 진정으로 비판의 대상자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그를 잃고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를 찌르고 판단하는 심정으로 하는 비판과 고발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를 보면 잘못과 죄에 대하여서는 예리하고 통렬하나 그 잘못과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인격적이고 예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습니다.


둘째는 비판자와 비판의 대상자가 하나가 아닌 경우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를 보면 잘못과 죄에 대해서만 아니라 비판의 대상자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예리합니다. 그리고 비인격적입니다. 때문에 아주 모욕적인 표현을 자주 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자와 비판의 대상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자기와 하나가 아닌 상태에서 하는 비판과 고발은 아무리 그 내용이 옳다고 하여도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잘못되고 옳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을 할 때 그 내용이 옳으냐 그르냐만 대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 옳고 바르다면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판과 생각이 옳고 바르다고 하여도 비판의 대상자를 자기와 하나로 보아 그 표현이 예의 있고 인격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절대로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옳지 못하고 그른 것만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사탄이 옳고 바른 것을 가지고 역사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죄인이고 허물이 있고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함으로 우리를 정죄하고, 그 정죄를 통하여 하나 됨을 허물어 버리고 우리를 흩어 버리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옳은 이야기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저희 아버님의 경우 제가 어렸을 때 잘못을 하면 꼭 매를 들으셨습니다. 그때 마다 하신 말씀이 ‘하나가 아니라 반쪽이라도 안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외아들이기 때문에 버릇없이 크는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매를 때리실 때마다 해 주신 말씀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네가 잘못을 하여 매를 맞지만 이와 같은 잘못을 너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말씀은 ‘사실은 나는 어렸을 때 너보다 더했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아버님의 말씀을 통하여 매를 맞으면서도 아버지가 언제나 나와 하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잘못에 대한 정확한 지적과 그에 대한 벌을 있었지만 비난과 인격적인 모독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고 교육적인 것이었습니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우리 목회자에 대한 잘못을 비판하는 글들이 참 많습니다. 그와 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글의 내용만을 보면 대개가 사실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글에 힘이 없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먹사’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식으로 표현하시는 분은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여도 절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그와 같은 글을 쓰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잘못하고 옳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하여도 ‘목사’를 ‘먹사’라고 표현하는 순간 비판자와 비판의 대상자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로 원고를 쓰면 자동으로 잘못된 철자와 띄어쓰기를 지적해 줍니다. 잘못된 철자와 띄어쓰기 밑에는 빨간 줄로 표시가 됩니다. 오늘도 원고를 쓰면서 ‘먹사’라는 표현을 하니 컴퓨터가 틀린 철자라고 끊임없이 빨간 줄 사인을 보냅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도 목사를 비판하면서 먹사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정작 보다 중요한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하나 되지 못하고 나빠지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많은 부모들이 자식의 잘못과 옳지 못한 행실을 책망하면서 자녀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인격적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 아이들은 대개 부모를 거스립니다. 그럴 경우 부모들은 대개 아이들을 또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잘못보다 부모의 잘못이 더 큽니다. 저는 다음 주 설교 때 이 문제를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잘못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옳고 그른 문제를 다루다가 상대방의 인격을 건들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만을 생각합니다. 물론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과 같이 하나로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과 같이 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을 자신과 하나로 보지 않고 하는 모든 옳은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언제나 자녀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생각하십니다. 때문에 비판은 하시나 절대로 비난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할 때 그러므로 ‘너와 나는 다르다’ ‘나는 너와 같지 않다’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입장을 더 강조하느라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비판을 통하여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옳으냐 그르냐의 가부(可否)로만 생각하지만 옳고 그른 가부(可否) 보다 중요한 것은 덕과 사랑인 것입니다.

저는 요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4장 3절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의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도 보면 옳고 그른 것만을 생각하다가 사람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상대방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무조건 옳지 않은 것을 덮어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놓으시지 않으십니다. 옳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에 상처가 가지 않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그와 같은 조심성이 부족합니다. 옳고 그른 점만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을 실족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 됨’을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성경은 오늘 그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장2절)

저희 둘째 아들은 지금도 귀걸이를 하고 다닙니다. 저희 둘째가 귀걸이를 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가 제법 됩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 둘째가 귀걸이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둘째가 귀걸이를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거의 밤을 새다시피 생각을 했습니다. 종이를 놓고 책상에 앉아 밤새도록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 정리된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 내가 목사지 지가 목사냐?

· 우리 지열이가 오늘 귀걸이를 하였지만 오늘 생각하고 오늘 그렇게 한 것을 아닐 것이 다. 틀림없이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을 오늘 한 것일 것이다. 둘째가 하고 싶었던 것을 그 동안 참았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때문에 둘째가 다 만 얼마 동안이라도 참았다면 나도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조금 참아 줄 줄 알아야 한 다.

저는 그와 같은 생각의 정리를 통해 일단 참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힘들었던 마음이 정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너그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귀걸이가 예쁜지 어디 한번 보자. 돈이 없어서 별로 좋지 못한 것을 샀을 터이니 한번 올라 오너라. 내가 좋은 것으로 하나 사주마>

참음에서 용납으로 마음이 발전하였습니다. 그 용납이 길어져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귀걸이는 그냥 귀걸이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걱정하고 염려하던 일은 기우였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학교생활 잘하고 교회 생활도 잘합니다. 귀걸이 때문에 아이가 삐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저희 둘째에 대하여, 저희 둘째의 귀걸이 대하여 참음과 용납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둘째와의 하나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우 참지 못함과 용납하지 못함 그리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인해 소중한 자식과의 하나 됨을 잃은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이 잘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것을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너무 극단적이고 대립적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보수는 무조건 꼴통이고 진보는 무조건 빨갱입니다. 물론 보수 중에는 꼴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보수가 다 꼴통은 아닙니다. 물론 진보 중에는 빨갱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보가 다 빨갱이는 아닙니다.

꼴통(?)과 빨갱이(?)는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조심을 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을 꼴통과 빨갱이로 구분하고 세상과 사회를 대립구조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문제는 보수로만 풀 수 없습니다. 진보로만도 풀 수 없습니다.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건전한 갈등 속에서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보수를 꼴통으로 여기고 모든 진보를 빨갱이로 여기게 된다면 세상의 문제는 도저히 풀려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언제나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입니다. 그 교만함에서 오는 거칠음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겸손 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온유 하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서로를 용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평안의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노래하였듯이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세상과 교회 그리고 가정을 평안으로 묶는 하나님의 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세상과 가정과 교회가 평안의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와 가정과 세상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