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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 (롬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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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복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기에 복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목적을 알 때 오늘이 의미 있음을 알고, 어려움이나 위기 앞에서도 목적을 이룰 힘을 얻습니다. 환경을 분석함과 동시에 자신을 조절하기에 목적을 향해 현재 어떻게 노력해야 하고 성장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의 목적을 이룰 때에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찾아옵니다. 이는 단순한 성취감 이상의 놀라운 축복이자 이웃에게까지 나누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사람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조차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삶의 유형을 세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는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장 앞에 주어지는 문제들을 환경과 문화의 영향 속에서 순간순간 해결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중학교 갈 때 중학교 가고 대학 갈 때 대학 가고, 남들 하는 때 즈음해서 결혼도 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뭔가 이룬 것 같고 뭔가 소유한 것 같지만, 스스로 자기 삶을 돌아볼 때 의문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득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목적의식 없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주어진 삶에는 충실히 살았을지 몰라도 목적의식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수동적인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두고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일이 생길 때 마다 허겁지겁 쫓기며 지금 여기에 이르게 되셨습니까?
 
목적이 없을 때는 여러 다른 것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갑니다. 그 중 하나가 ‘죄의식’입니다. 타락 후에 인간의 마음에는 죄의식이 생겼습니다. 죄의식은 수치심을 동반하는데, 죄의식에 이끌려 살게 되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일생을 방어하면서 소비합니다. 죄의식 외에도 상처로 인한 쓴 뿌리, 원한, 분노 등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사건의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성격과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나를 주장합니다.

한 청년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습니다. 청년은 무척 행복 했지만 때때로 불안해졌습니다. 자매를 만나면 왠지 마음이 추워지고 어려워져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형제와 대화를 해보았는데, 알고 보니 형제에게 유년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부부싸움을 하시는 부모님을 피해 동생과 떨면서 밖에 나와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데, 자신은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상처가 되고, 죄책감이 되어 청년의 일부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장성한 후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기억이 여인을 대하는데 불안감과 공포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한 인생을 끌고 다닌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슴속의 분노를 따라 삽니다. 분노를 다 쏟아내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행동을 책망하지만 곧 반복하며 삶을 그렇게 소비하고 낭비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습니다. 두려움은 어떤 충격적인 경험이나 심각한 좌절 혹은 엄격한 가정환경으로 인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안전한 방향으로 가고자 모험을 피하고 현재 상태에 머물려고 합니다. 따라서 좋은 기회들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질도 삶의 목적이 없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것 중에 주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유가 많을수록 행복하고, 존재 가치도 올라가리라 믿습니다. 소유의 정도를 존재 가치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바른 목적이 없는 소유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 요구하게 되고 현실에 대한 싫증과 함께 불만 속에 살아가도록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 받는 인정과 사랑이 목적 없는 삶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사람 내면에 감추어진 큰 욕구 중의 하나가 ‘인정 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다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면 마음이 풀립니다. 대체로 가정마다 장남들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점잖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남이나 막내는 다릅니다. 장남이 이미 소유한 부모의 사랑이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큰아들은 매를 들어도 잘 항복하지 않지만, 작은 녀석은 매를 들기도 전에 잘못하지도 않은 것을 고백합니다. 재빨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인정받는 삶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마스크(가면)를 쓰기 십상입니다. 진짜 자기 모습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삶이 공허합니다. 중년기가 되면, 우울증에 빠지는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 입니다. 착하게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는 왔는데 남은 것이 없습니다. 효율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묘한 고집이 있어서 타협하거나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인색합니다.
   
둘째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유형과는 달리 목적은 있으나, 목적을 세운 근거가 부모님이나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받았던 교훈 혹은 이 시대와 사회가 준 가치인 사람들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기초가 된 목적에 따라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게 자란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기가 쉽습니다.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은 이룰 가능성도 큽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 진정한 행복이나 기쁨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쁨이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갈증 속에서 늘 쫓기듯 삽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든 정보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지구상에 왜 태어났는지, 존재의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이유 그리고 목적, 더불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삶의 목표와 기반이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금의 허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이 찾아와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거짓된 정보는 인간 내면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면서 어떤 목표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진리의 말씀 경청하기를 그만두고, 사단의 새로운 정보 앞에 귀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돈이나 명예, 건강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살아보니 어느 정도 행복도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면 무엇을 목표로 세워야 하는지 모른 채 언젠가는 허무함을 느끼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시편 39편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 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헛된 일에 분요’ 하는 것입니다. 의미도 알고 목적도 있어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도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관해서 볼 때는 생명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요한 일서 2장 15절부터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사단이 주는 거짓정보는 우리 자신을 기쁘고 즐겁게 할 만한 것이기에 솔깃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응답 받았다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정해두고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돕기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해둔 목표를 이루게 해주셔야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능력과 도움을 달라고 기도해서 이뤄지면,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고 기뻐하며 뜻을 이루었다 합니다.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육신의 정욕이 있고, 안목의 정욕(보기에 좋은 것)이 있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삶의 목적은 잠시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허망함뿐입니다.

셋째 유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들어 이 땅에 보내셨을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합니다.

만나는 일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믿음으로 할 것이냐 현실적으로 할 것이냐 고집과 경험, 지혜로 할 것이냐 생각하고 분별해서 아버지 앞에 순종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의 목표와는 상관 없이, 신뢰하기에 그것조차 하나님 사랑의 손길로 느낍니다. 힘들지만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 믿음의 분량과 소망의 척도,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소유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도 자기가 청지기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지혜도, 자녀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주신 선물이라 여깁니다. 언젠가 있을 결산의 날을 준비하며 주어진 시간과 물질, 사람을 자신의 뜻과 정욕 따라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사야 43: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만들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또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예배자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하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자리이며, 내가 피조물 임을 확인하는 자리인 동시에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하시는 자리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배를 통해서 낙심이 물러가고, 내 주장이 물러나고 주님 뜻을 위해 살아가는 변화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나 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유형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유나 목적을 이루는데 소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기 원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예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따라가고 목적을 행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의 뜻에 순종해서 내 영광을 드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켜 나갑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기준은 딱 한가지 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인가, 아니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이 될 것인지에 따라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국회위원에서부터 교회 직분까지, 사람들이 준 자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작은 자리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라 믿고 정성껏 열심을 다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사업하는 분들 있으시다면, 거짓되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자리를 내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내가 세운 목적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분석해 보십시오. 열등감에서, 상처에서, 부모가 가르쳐준 것에서, 시대가 중요하다고 일러주는 것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분석해 보십시오. 자기 욕망을 채우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들은 이루어져도 기쁨이 없고, 있어도 잠시 잠깐입니다. 목적 없는 삶을 중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창조하신 목적을 그분께 여쭤볼 수 있습니다. ‘왜 나를 이 땅에 나게 하셨습니까? 왜 나를 이런 상황 속에 두셨습니까? 여기서 내가 행하기 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상황 따라 마음대로 살기에는 남아있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남아있는 시간이라도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새벽시간을 내십시오. 새벽에 하나님이 왜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살게 하는지 묻는 물음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40일간의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남은 세월을 위해 기도 드려야 합니다. 이때까지는 환경에 의해 일 따라 문제 따라 살아온 인생, 남들 보기엔 괜찮다고 할지 모를 인생이지만 속은 텅 비어 행복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대로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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