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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보게 된 바울 (행 9: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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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곽주환 목사 (구로중앙교회) 

한 어머니가 LA에 가 있는 딸네 집에 다니러 갔다. 아침에 깜짝 놀랄 일을 보았다.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가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 딸을 아껴주는 그 사위가 대견스럽게만 보였다. 그런데 다음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갔다가 다시 한번 놀랐다. 아침이 되니 며느리는 꼴도 안보이고 금이야 옥이야 받들어 키워서 미국 유학까지 시켰던 아들이 궁상맞게 제 손으로 아침을 지어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아들이 측은하게 보였고 한편 며느리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똑같은 모습을 보면서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그 어머니, 대견스럽게 보이던 사위, 측은하게 보이는 아들, 기특한 딸, 괘씸한 며느리… 당신이라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표현이 나오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 가지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중에 가장 큰 변화는 관점의 변화이다.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열 두명의 정탐군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열명이 보고하기를 그들은 대장부요 우리는 그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 어떻게 그들을 정복하겠는가?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얼마든지 우리는 정복할 수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지만 관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지니 표현이 달라진다.

골리앗이 일대 일로 싸우자고 제안한다. 골리앗은 큰 몸집을 가진 거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저렇게 큰 골리앗과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아마도 다윗은 생각하기에 내가 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넘어뜨릴텐데 저렇게 큰 몸이기 때문에 돌을 던지면 훨씬 잘 맞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같은 골리앗을 보더라도 몸이 크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관점도 있지만 다윗은 몸이 크기 때문에 쉽게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같이 우리의 삶에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넘어질 수도 있고 일어설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포드가 자동차를 발명해서 친구들을 모아 놓고서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마무리 될 때에 어느 친구가 이 자동차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길도 없는데 어디를 다닐 수 있겠는가? 라고 물을 때에 포드가 대답하기를 길이 없어서 차가 못 다니는 것이 아니라 차가 있으면 길이 생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관점을 갖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면서 마땅히 여겼다. 죽을 사람이 죽었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바울의 목표는 교회를 잔멸하는 것이었다. 교회를 완전히 제거하는 목표를 갖고서 박해하였다.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옥에 마구 가두면서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였다. 그래서 자연히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 바울은 포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고 적지 않은 해를 끼치고 있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바울이 다메섹을 향하여 간다. 이유는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이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신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은 사흘 동안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사흘이 되던 날에 아나니아가 사울을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었다.

생선 비늘을 생각해 보라. 그런 비늘을 눈에 끼고 살 때에 어떻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겠는가? 바르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늘이 벗겨지자 다시보게된 바울은 이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다시 보게된 바울은 어떤 관점을 갖게 되었는가? 의지하는 대상이 달라졌다. 자기에게 힘을 주는 근원이 달라졌다. 자기의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기초가 달라졌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갈 때에 그는 대제사장이 써준 공문서를 손에 쥐고 달려갔다. 바울은 권력이 주는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시 보게된 바울은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대제사장이 써준 공문서가 내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나에게 근본적인 힘이 되어 주심을 깨닫게 된다.

우리 주변을 보라. 대제사장이 내게 써준 공문서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세상이 주는 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있는 물질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있는 인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있는 경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있는 물질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바울의 눈에 비늘이 벗겨진 후에 그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하는지 분명한 눈이 열렸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과 미디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미디안과의 싸움에 나가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무려 삼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삼만 명 중에서 결국은 삼백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삼만 명이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기들의 힘으로 이긴 줄로 착각하고, 자기들의 군사력을 의지하게 된다. 삼백명의 군사들이 나가서 미디안을 물리치고 돌아온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훈련이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시 보게된 바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서를 의지하던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세상에서의 권력을 의지하는 관점이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는 관점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바울은 자랑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바울은 히브리인이요, 로마의 시민권자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이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바울이 자랑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다시 보게된 바울은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니 이러한 것이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로마에 가면 옛날 로마 공화정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다. 사도바울이 순교하기 바로 직전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조그마한 지하 감방이 있다. 그 감옥에서 보면 로마 황제 시저의 동상이 보인다. 바울은 학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 가문에, 그 경력에, 당시에 바울이 얼마든지 로마 황제 시저의 줄을 잡아 편안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보게된 바울은 지하 감방에서 로마 황제 시저의 줄을 붙잡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붙잡았다.
이같이 다시 보게된 바울은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대제사장이 써준 공문서를 의지하였다. 자기 자신의 교육을 의지하였다. 자기 자신의 인맥을 의지하였다. 자기 자신의 물질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고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도 다시 보게된 바울과 같은 경험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다시 보게된 바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성공의 기준이 달라졌다. 성공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대제사장의 공문서를 의지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러 갈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성공의 가치관이었다. 성공의 관점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보게 된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일이 성공의 기준임을 깨닫게 된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택함 받은 그릇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 받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 되었다.

어느 작은 마을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성주를 찾아가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성주는 대답 대신 컵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 청년에게 건네주더니 옆에 있던 군인을 불러 세워 갑자기 무서운 명령을 내렸다. 청년이 포도주 잔을 들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뒤를 따르다가 청년이 포도주를 엎지르면 그의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바짝 긴장을 한 채 한 방울의 포도주도 흘리지 않은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성주 앞에 섰다. 성주는 마을을 도는 동안 청년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성주는 거리에 있는 거지와 장사꾼도 못보고 술집에서 여자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느냐고 엄하게 물었다. 청년이 솔직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성주는 그제야 빙긋이 웃으며 "그래 그것이 바로 너에게 말하고 싶은 인생의 교훈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정한 푯대를 바라보고 그렇게 정신을 집중시키고 한눈을 팔지 않는다면 너를 둘러싼 어떤 유혹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필경 너는 성공적인 삶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우리 삶의 정확한 푯대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에게 있다. 주님을 위해서 택함 받은 그릇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내 인생의 푯대요, 내 인생의 방향이다.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내 인생의 성공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관심은 내 속에서 주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기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그 결과 바울은 우리의 마음에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의 눈에 붙어있는 비늘은 없는가? 눈에 붙은 비늘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도 바울처럼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란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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