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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청과 거절 (눅 14: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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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조병우 목사

성경에는 잔치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적을 행하신 곳도 혼인잔치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잔치에 대한 이야기가 더러 나옵니다. 열 처녀의 이야기도 잔치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말씀하고 있고 탕자의 이야기에서 결론도 아들이 돌아옴을 기뻐하면서 잔치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잔치들은 분명히 천국을 설명하는 요소도 있고 현실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잔치에 대해서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7절에서 11절까지 잔치자리에서 상석에 앉기를 힘쓰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둘째는 12절에서 14절까지 잔치에 손님을 청하거든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16절에서 24절까지에는 잔치에 손님들을 초청하였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지 않았고 대신해서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소경들로 잔치에 초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세 가지 잔치에 대한 교훈을 정리해 보면 주님의 잔치는 세상잔치와는 확실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잔치의 첫째 교훈은 천국잔치는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든지 섬김을 받는 사람은 천국잔치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세상잔치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위한 잔치이지만 천국잔치는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위한 잔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첫 번째 잔치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했습니다. 세상잔치를 보면 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위해서 준비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잔치의 가장 귀한 손님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보면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장 귀한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가장 낮추셨다고 했습니다.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는데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사람의 무릎을 그 앞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는데 천국은 주님을 위한 잔치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존재인데 자기를 높이려고 하다가 쫓겨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 사회를 보면 잔치자리가 많습니다. 세상이라는 잔치자리가 있습니다. 정치라는 잔치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잔치자리는 모두가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모두가 섬기는 잔치입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주인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막 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낮은 자를 섬기고 약한 자를 섬기는 자는 주님은 섬기는 자입니다. 가난한 자를 섬기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려고 한다면 조금만 더 낮은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섬겼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잔치를 체험했습니다. 누구든지 섬김을 배우기 전에는 예수님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섬김을 배우기 전에는 천국의 기쁨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섬김을 배우기 전에는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섬김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섬김을 배우기 전에는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천국잔치의 모형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섬김을 배우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섬김을 배우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잔치에 대한 교훈은 내게 갚을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내 잔치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도로 갚음을 받을 수 있는 베품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내게 갚을 수 있는 사람과 내게 갚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잔치와 천국잔치를 구분하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잔치는 다 서로 갚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잔치는 내가 상대에게 받은 만큼 또한 주는 것이 양심이고 인격입니다. 또한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베풀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역량이 큰 사람의 잔치에는 아무래도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사회적으로 역량이 적은 사람은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에게 갚을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천국잔치를 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사람들을 그 앞에 모을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양에게 말하기를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고 염소에게는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서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양은 어떤 사람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양은 지극히 작은 소자를 자기 삶의 자리에 초대한 사람입니다. 염소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자기 삶의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리는 일에 지혜롭기보다는 베푸는 일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타인을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만을 위하여 산 삶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에게 부하고 타인에게 인색한 사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천국잔치가 될 수 있고 아니면 세상잔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우면서 산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도 천국잔치를 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에 도우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모든 피조물들을 도우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사람을 통해서 행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약한 자를 자신의 삶에 초대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지금 일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약한 자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시려는 일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잔치에 대한 교훈은 하나님의 초청에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잔치에 왜 인간이 거절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매우 간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초청에 거부했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에 초청에 거부를 했고 어떤 사람은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거부를 했습니다.

여기 잔치는 넓게는 천국잔치를 말씀하고 있고 우리의 삶에서 보면 교회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한 이유들을 보면 하나같이 우리의 삶에 너무도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인생에게는 소유가 필요합니다. 밭을 샀다는 것은 소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는 일이 중요합니다. 소를 샀다는 말은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생에게는 삶의 즐거움이 필요합니다. 장가들었다는 말입니다.

일이 목적인 인생, 소유가 목적인 인생, 쾌락이 목적인 인생은 천국 잔치를 거절하고 사는 사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과 목적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이루는 도구이지 목적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해도 목적이 아닌 것을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인생의 방향을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직업이나 삶의 행복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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