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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 (마 21: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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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머릿돌은 주춧돌이라 하기도 하고 기초석(基礎石)이라 하기도 하는데 좀 괜찮은 건물에는 다 머릿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들어오시면 오른 쪽 현관 옆에 머릿돌이 있습니다. 본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머릿돌을 기초로 하여서 건물이 지어지고 또 소유주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 머릿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서 삶의 기초가 되고, 삶의 표준이 되고, 소유주가 되시고, 머릿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본 것처럼 건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버린 머릿돌이 이방인에게로 옮겨 갔습니다.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삶의 기초로 삼는 사람과 나라는 그 위에 아름다운 인생을 건축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인생과 나라를 세워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기초로 삼고 그 위에 내 인생을 건축하여서 든든한 인생,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인생을 세워갈 수 있는 성도들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집을 짓는 인생으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을 세워주시고 지켜주셔야만 든든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서 내가 집을 세우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그래,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세워준다고?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마.> 그래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왕조가 바뀌지 아니하고 그의 모든 인생의 가문의 집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그는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셨습니다. 집의 기초가 튼튼해야 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9.11 테러 때 무너진 쌍둥이 빌딩이 있던 맨하탄은 고층건물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00층 가까운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습니다. 그렇게 높은 빌딩들이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지반이 반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탈리아의 피사(PISA)에 가면 사탑(斜塔)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사의 사탑’이라는데 사탑이라는 말은 ‘비스듬하게 넘어져 있는 탑’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 탑을 바로 세우는 보강공사를 한다고 지금 야단들입니다. 왜 그렇게 비스듬해 졌습니까? 기초가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든든한 기초석으로, 머릿돌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내 인생의 집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내 인생이 든든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인생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은 내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내 삶의 뿌리를 어디에다 두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석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 되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반석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래는 어떻습니까? 모래는 그 위치가 얼마나 자주 변하는지 모릅니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모래는 날려 가 버립니다. 물이 들어가면 내려앉고 맙니다. 이 땅의 물질은 모래와 같습니다. 돌고 돕니다. 세상에 조그만 변화가 있어도 날아 가 버리고 맙니다.

이 세상의 지식도 모래와 같습니다.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쓸모가 없어 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머리에 조금만 이상이 있고, 핏줄만 하나 터져도 우리의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은 모래와 같습니다. 흔들립니다. 잠깐입니다. 정권만 바뀌어도 줄줄이 교도소로 가는 모습들을 보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사람도 모래와 같습니다. 언제나 다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 곁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쾌락도 모래와 같습니다. 한 때의 쾌락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의 쾌락도 시들해지면서 그 원욕이 그친다고 했습니다.
내 건강도 모래와 같습니다. 힘찬 건강들이 점점 쇠하여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내 건강이 내 몸에서 떠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 위에 내 인생을 세우면 이것들이 흔들릴 때, 떠날 때, 불탈 때 내 인생도 따라서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다 내 인생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까? 어디에다 내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영원한 반석이신,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 인생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흔들리지 아니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 가정을 세우면 내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 인격을 세우면 인격이 조석변(朝夕變)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내 자녀를 세워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내 사업을 세워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내 신앙을 세워 보세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든든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은 인생의 표준입니다

또한 머릿돌은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머릿돌을  기준으로 하여서 좌우로 돌을 놓습니다. 그 위로 또 돌을 쌓아 올라가면서 집을 만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모퉁이 돌이 비스듬히 놓여 있으면 집 전체가 다 비스듬히 기울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신앙과 행위에 표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표준이요,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삶의 기준을 예수님과 그 말씀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들리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의 삶도 따라서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말씀 위에 내 삶을 올려놓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모델로, 표준으로, 잣대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든든한 인생, 행복한 인생, 성공하는 인생을 바로 거기에서 얻게 될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머릿돌에는 그 건물 소유주의 이름이 새겨 져 있습니다. 누구의 집인가 하는 것을 그 머릿돌에서 밝히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과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들의 소유도 예수님이시고, 이 교회의 주인도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악한 농부’ 비유 속에 또 하나의 비유입니다. 악한 농부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을 악한 농부라고 말합니까? 주인의 밭을 세 내어서 농사를 지으면 때가 되었을 때 당연히 세 받으러 오는 종들을 잘 대접하고 그 세를 주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농부들은 세를 받으러 오는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들을 보냈을 때 ‘자, 상속자가 온다. 저 상속자를 죽이고 그 포도원을 우리가 차지하자’하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농부들입니까? 다시 말해서 주인의 소유를 주인의 것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이것이 바로 이 농부들의 ‘악’인 것입니다.
그럴 때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농부들을 다 진멸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인의 것을 주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소유하려고 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인생’으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데, 다 하나님의 것인데 마치 내 것인양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도 역시 악한 농부와 같이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물질, 내 것입니까? 건강, 내 것입니까? 시간, 내 것입니까? 지식, 내 것입니까? 생명, 내 것입니까? 내 자식, 내 것입니까? 가만히 따져보면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 없이 적신으로 발가벗고 났다가, 돌아갈 때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 없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참으로 지혜로운 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는 것 아닙니까? 돈을 찔러 주기도 하고, 넣어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장례치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먹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수의에 주머니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 사용하다가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다 두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땅 따먹기 인생’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놀이기구가 하도 많아서 전자오락기나 컴퓨터로 놀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놀이기구가 없어서 땅 따먹기를 하고 놀았습니다. 병뚜껑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퉁겨서 그만큼 땅을 뼘으로 재어서 따먹는 놀이입니다. 땅 따먹기 할 때는 친구들끼리 서로 내 땅이 크다, 네 땅이 크다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저녁 때가 되어서 엄마가 “아무개야 밥먹으러 오너라”부르면 그렇게 싸움질하며 따먹기하던 땅을 휘휘 저어버리고 각자 자기 집으로 불려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 땅에 서 ‘내 땅이 크다, 네 땅이 크다’하면서 더 큰 집, 더 큰 권세, 더 많은 지식,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의 황혼이 짙어질 때 <오너라>하시면 이 땅에 있는 것들 다 그대로 두고 갈 뿐이지, 누가 그것 움켜쥐고 갈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소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사용한 것, 그것만이 참된 영원한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스터드라는 사람은 그의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선교사의 길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하며 이것을 그의 삶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어떤 희생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서 죽어 주셨다면 내가 그를 위해서 어떤 것을 바치고 희생해도 그것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말은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아직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직도 ‘이것은 하나님 것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소유주요, 나의 왕이시오, 나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로드쉽(Lordship)을 인정하기 전에는 진정한 신앙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믿는 참 재미를 보기 힘듭니다.
악한 농부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참된 행복과 만족과 풍성함이 보장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농부가 어떨 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주인의 것을 주인의 것으로 인정하고 소작료 달라고 할 때 잘 내어 주면 그 주인이 내내 농사를 짓게 할 것 아닙니까? 거기에서 포도 따 먹고, 포도즙도 마시고, 포도를 팔아서 온갖 것을 살 수 있는 행복이 거기 있는데 만약에 악한 농부와 같이 된다고하면 주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면 거기에 온갖 불행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권이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게 될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막을 것 막아주시고, 채울 것 채워주십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소유를 누가 손댄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자녀, 우리의 가정, 우리의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를 씁니까? 우리는 힘이 없어서 지키지 못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양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혈의 권세 아래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유된 성도들의 특권이요, 축복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나의 참된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내 인생의 기초로 삼고 거기에 내 인생의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참 바른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예수님에게 부딪히면 깨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반석을 기초로 하여 자기를 건축하면 더할 수 없는 행복이요, 축복이지마는 이 돌을 버리는 자가 있습니다. 44절에 보면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8장 14 절에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 보내주신 인생의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서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밥을 뺏아 먹는 것도 아닌데 괜히 예수 이야기가 나오면,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내고,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정신으로 이러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그 배후에 영적인 조종을 자기도 모르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이 얼마나 좋습니까? 낮이면 아주 살맛납니다.

그러나 도둑에게는 밝은 것이 아니라 어두운 것이 더 좋습니다. 요즘에는 도둑들이 강도가 되어서 낮에도 집을 엄습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도적은 밤을 더 좋아합니다. 러브호텔에 가는 사람들은 밝은 것이 싫습니다. 어두운 것이 더 좋습니다. 거짓된 사람은 진리가 싫습니다. 내가 거짓되면 진실한 사람이 싫어집니다. 깨끗한 사람이 싫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이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이성적(理性的)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이 걸려 넘어집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천지창조, 홍해를 가른 사건, 예수님의 여러 기적들을 비과학적이다, 말이 안된다,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성경에만 있는 이야기이다, 하고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살펴 보세요.  내가 천지를 창조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못한다, 내가 홍해를 건너지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도 못 건넌다, 내가 물 위를 못 걷느다, 그러면 하나님도 못 건넌다, 내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지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도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을 뭣 때문에 믿겠습니까?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지, 나하고 똑같은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믿으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을 다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인생의 머릿돌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 인생을 지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내 가슴 속에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안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다, 성경에 이적만 없으면 성경이 참 좋겠는데...하는 이런 자가 돌 위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돌 위에 깨어진다>고 했습니다. 쓸데없이 성경에 부딪쳐서 머리 깨어지지 말고, 다리 부러지지 말고, 머릿돌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속에 영접하고 그 위에 내 인생을 지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주님을 믿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머릿돌 되시는 예수님을 가슴 속에 영접하고 전적으로 그 말씀을 믿어버리면 내 인생이 얼마나 복되게 건축될지 모릅니다.


5. 돌이 떨어지면 가루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에 부딪히는대로 계속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44절에 보면 돌이 그 위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어떻게 된다고요? <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저가 돌에 부디치면 깨어지고, 돌이 그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어버린다고 했습니다. 돌 위에 부딪히는 자는 자기가 가서 부딪칩니다.

그런데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진다는 말은 돌이 와서 주도적으로 그 위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저를 가루로 만들어서 흩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정말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을 때에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마치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내가 가서 부딪쳐서 넘어지기도 하고, 깨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말에 가서는, 역사의 끝에 가서는 돌이 움직입니다. 내가 가서 돌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고, 돌이 와서 내게 부딪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반하는 자에게는 돌이 그 위에 떨어지는데 그러면 가루가 되어서 다 흩어지고 만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서 2장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더 분명해 집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을 다스릴 때 꿈을 꾸었습니다. 아주 계시적이고 중요한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 꿈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내가 어제 밤에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내게 이야기하고 해석하도록 하라.”
신하들이 와서 말합니다. “왕이시여. 어느 사람이 왕이 어제 꾼 꿈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꿈 이야기를 해 주시면 우리가 꿈을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아니다. 너희가 내가 꾼 꿈을 내게 보이지 아니하고 해석도 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을 다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 꾼 꿈을 기억나게 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해몽을 해 줍니다. “왕이시여. 왕은 큰 신상을 보셨지요? 그 신상의 머리는 정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되어있고 배와 넙적다리는 놋으로 되어있고, 종아리는 철인데,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던진 것이 아닌 뜨인 돌이 어디서 날아와 신상의 진흙과 철의 발을 치니까 신상이 다 부서져서 여름타작 마당에 겨와 같이 되어서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어지고 그 신상을 때린 돌은 태산을 이루어서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셨지요?” 그러자 왕이 맞다고 내가 그것을 보았다고 하며 기뻐서 이야기 합니다.

다니엘은 해석을 해 줍니다. “왕이시여. 그 해석은 이렇습니다. 왕의 나라와 왕은 금과 같습니다. 금과 같이 찬란한 왕과 왕의 나라인데,  가면 갈수록  메대와 파사-은과 같은 나라, 그 다음에 헬라-놋과 같은 나라, 로마-철과 같은 나라, 이런 나라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결국에는 뜨인 돌이 날아와서 그것을 쳐 버릴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버리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바벨론도 파사도 헬라도 로마도 다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랬더니 느부갓네살이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온갖 보석을 선물하고 나라의 총리를 삼고 친구들은 장관으로 삼아주었습니다.

결국에는 종말의 심판이 오게 될 것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심판주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에 돌이 떨어지게 되면 개인도, 사업도, 가정도, 권세도 다 망가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예수님 반대하고 복음 반대하다가 망한 나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유대인들 보세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농부의 포도원 주인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여 버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들 위에 돌이 떨어져서 완전히 박살나서 2천 년 동안 온 세상에 흩어져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러시아 보세요. 교회의 문을 다 닫아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수 천만 명의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그 공산주의가 무너질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께서 그 공산권을 무너지게 만드시고 닫혔던 예배당을 다시 회복하게 하셨는데 일전에 어느 한 곳에 가 보니까 교회가 지금은 수영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영장으로 개조해서 쓰고 있더라고요. 

그것을 다시 복원해서 교회를 만들려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카드를 만들어 팔아서 교회를 회복하겠노라고 열심히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독, 서독이 통일되었다고 하지만 통일된 것이 아니라 동독이 망한 것입니다. 이제 동구권의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공식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까?
일본 보세요. 교회 다 폐쇄하고 종들 잡아서 신사참배 시키고, 8월 18일에는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 다 함흥에서 한꺼번에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더니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겠습니까? 8월 15일, 3일 전에 손들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지 않았습니까? 원자탄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일입니까? 완전히 가루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오늘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돌이 떨어지면 다 무너지고 가루가 될 것이다.>       

미국과 이라크 전(戰)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회복할 수도 있고, 또한 회복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뜨인 돌이 떴을 때에는 돌에 대해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 위에 떨어집니다. 다 부서집니다. 다 가루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복음이 부드럽고 은혜스러운 것 같아도 무서운 심판을 동반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머릿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서 그 위에 내 인생을 세워나가면 구원입니다. 축복입니다. 성공입니다. 더 할 수 없는 행복이지마는 이를 거역하고 반대하고 핍박하고 대항하는 자에게는 언젠가 그 위에 돌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돌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보호받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든든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돌을 거부하고 돌에 부딪히다가 돌이 떨어져서 가루가 되는 인생, 가루가 되는 사업, 가루가 되는 가정, 가루가 되는 건강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여러분의 인생을 세워 나가서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어떤 환경도 건드릴 수 없는, 든든한 인생을 살아나가서 하나님 앞에 영광돌릴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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