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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과 들에 전하라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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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요즘 산과 들에 나가면 만발한 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 돋은 나뭇잎 색깔은 얼마나 또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봄바람이 지나갈 때면 향기가 가득합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바람이 전하는 소식이 있을 것 같고, 시냇물은 뭐라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쁠 때는 자연의 소리가 노래로 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울적하면 자연의 소리는 울음으로 들립니다. 새가 노래한다고 하고, 또 새가 운다고도 합니다. 사실은 새가 말하는 것입니다. 듣기 나름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마음이 한결같을 수는 없습니다. 기쁠 때가 있지만 걱정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 걱정거리가 있지만 신앙으로 믿음으로 이내 견뎌야 합니다. 신앙에도 영적 침체기가 있지만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용기를 얻고 일어납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으십니까? 교회에 나오면 평안과 위로를 받으십니까?

한국교회 교인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예배를 통해 매번 은혜를 받고 계십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이 아주 가끔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번 역동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감격과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가슴에 불을 담아 갑니다. 삶에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멋진교회가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교회의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끼리 패가 나뉘어 분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패는 고린도교회를 거쳐 간 지도자를 지나치게 따르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을 좋아하는 교인들은 바울 파를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를 좋아하는 교인들은 베드로 파를 만들었습니다. 아볼로를 좋아하는 교인들은 아볼로 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자기네가 진짜 그리스도 파라고 우겼습니다.

누가 진짜 맞습니까? 끝까지 싸워봐야 압니까? 교회에서 당을 짓고 서로 다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나뉘게 됩니다. 싸우는 교회는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새신자가 왔다가 싸우는 것을 보면 실망합니다. 다시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급히 편지를 썼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바울은 기도하면서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만약 멋진교회 안에 교인들이 싸우는 일이 있다면 목사인 저도 고민할 것입니다. 무슨 말로 이 싸움을 말릴 수 있을까?

교인이 싸우는 것은 교회에 은혜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마음도 메마르게 됩니다. 교회에 오면 마음이 젖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이 말라 있으면 어찌됩니까? 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람 마음도 메마르면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냅니다.

일 년 중 봄에 산불이 제일 잘납니다. 봄 가뭄으로 산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개인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전체가 편 가르기로 나뉘어졌습니다. 이 싸움을 말릴 무언가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분노를 가라앉히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고린도교회의 싸움의 발단은 자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지도자가 더 낫다고 우겼습니다. 교인들은 서로 자기가 왕 노릇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떠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못난 교인들을 야단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장 달려가 매를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4:21 말씀을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 달려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편지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일 먼저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오늘 본문 1:18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지금 고린도교인들이 싸우는 까닭은 심령 속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했다면 다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싸우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십자가를 들이댔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 왜 모진 고난을 겪으셨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해 보시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지신 그 심정을 나도 가지겠다는 아닙니까? 사랑의 마음, 희생의 마음을 그대로 물려받겠다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에는 도가 있습니다. 그 도는 어리석음과 미련함입니다. 어리석게 손해보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입니다. 미련하게 먼저 사과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집은 일곱 식구인데 가난했습니다. 그렇지만 늘 웃음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형네 집은 세 식구이고 부자입니다. 그런데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형이 동생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네 집에는 똑똑한 사람만 있고 우리 집에는 바보들만 살기 때문이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동생은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가 자기 잘못이라고 하는 바람에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님 집에서는 서로가 네 잘못이라고 하며 책임을 떠넘기니까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게 다 똑똑해서 생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형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해 보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으면 아주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다 듣고 나면 미련한 이야기로 결론이 납니다.

십자가는 죄 없는 예수님이 대신해 고통의 형벌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까운 생명을 버린다 말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18에 ‘십자가의 도’를 헬라어로 읽으면 ὁ λοϒος ϒαρ ὁ τού σταυρού입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십자가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그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십자가, 바로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가 하나님 능력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믿으십니까?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헬라어로 읽으면 ‘두나미스’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 Dynamic 으로 번역했습니다. ‘두나미스’에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폭발」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저께 북한 용천역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폭발력이 센지 반경 4 Km까지 파편이 날아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싸우는 곳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이대면 싸움은 파편이 되어 날아갑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그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십자가를 들이대면 세상의 지혜와 똑똑한 것이 없어집니다. 세상 지혜가 멸하여지고 총명이 폐합니다.

1:19 말씀.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이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싸워서는 안 됩니다.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를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혜 있는 자, 선비, 변사가 가득합니다. 1:20 말씀.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그러나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21 말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22 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기적이 나타나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표적이 없으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합니다.

헬라인은 철학을 좋아합니다. 소크라테스, 플로톤, 소피스트들이 모두 헬라 문명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헬라인들은 생각을 깊이해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깊은 명상이나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미련해 보이지만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십자가 이야기가 미련해 보이지만 십자가 이야기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여러분! 우리 멋진교회는 다투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투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십자가가 있으면 제일 먼저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 죄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이 죄를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앞에서 무감각합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녀도 여전히 화도 잘 내고, 싸움도 잘합니다.

만약 십자가가 가슴에서 희미해지고 있다면 이보다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지금 나에게 생생하지 않다면 내 영혼은 메마른 것입니다. 그런 메마른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죽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삶에는 십자가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이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내 삶에 십자가가 시들해진 증거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언제나 십자가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의 모든 삶에는 십자가가 따라 다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일하십니다.

1:23 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할 때 반드시 십자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다 포기하고 죽는 것입니다. 할 말을 없다고 한 마디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채찍으로 때리면 맞는 것입니다. 매달면 달리는 것입니다. 손과 발을 못으로 치면 박히는 것입니다. 창으로 찌르면 찔리는 것입니다. 너무 아픈 고통 속으로 그만 죽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릅니다. 십자가는 하는 것입니다. 진짜 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아 죽은 것입니다.

죽는 것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다시 산 것은 부활이요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결론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믿는 곳에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미련해 보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은 믿는 자의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전도를 부끄럽게 생각하면 남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21 절.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우리가 전도하면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듣는 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십자가 이야기를 믿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멋진교회는 나가 전도할 때입니다. 제가 예언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멋진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전도에 관심이 없으면, 이 교회는 얼마 후에 패가 갈리고,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3 주 전부터 전도할 구역을 정해 드렸습니다. 둥지 식구들이 함께 기도하고 떠나십시오. 눈치 보지 말고 무조건 나가시기 바랍니다. 4 월 전도 담당 구역,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전도하다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욕을 듣고, 쫓겨나면 기뻐하십시오.

찬송가 252 장은 전도자의 열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특히 4 절을 보면 셋째 단에 「구원하는 소리를 산과 들에 전하라」고 노래합니다. 산과 들에서 바람에게 바위에게 시냇물에게도 전도하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열정입니다. 이 뜨거운 열정으로 나가 죽어가는 영혼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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