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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어느 아들입니까?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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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성경에는 두 아들을 비교하는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보면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이 더 신앙적이고 본이 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는 두 아들 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끝내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거라.” 하니까 “예, 아버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는데 대답만 하고 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에게도 역시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거라.” 하니까 “싫습니다.” 하고 거절을 했는데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잘 못되었구나 생각하고 뉘우치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두 아들 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늦게나마 아버지의 뜻을 따라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이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큰 아들처럼 처음에도 “예!”라고 순종을 하고, 작은 아들처럼 뒤에도 “예!”하고 순종하는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성경을 살펴보면 그런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아멘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도 <아멘>, 뒤에도 <아멘>, 죽기까지 <아멘>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삶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맏아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택함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당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와 창녀들이었고 개처럼 취급받았던 이방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우리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명적인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존재다. 마치 주사위를 던지듯이 던져진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내 형상대로 지었다. 그리고 이 땅에 아무렇게나 던진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너희를 이 땅에 보냈다. 그 사명이 끝나는 날 나는 너희를 부를 것이다.>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인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들을 한번 보세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앞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여러 가지 달라지는 변화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사명감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나서 살다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명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명을 따라서 최선을 다 하다보면 이 세상의 일들도 잘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만 사명자가 아닙니다. 가정을 돌보는 주부도 사명자요, 회사에서 일하는 회사원도 사명자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사명자요, 정치하는 사람도 사명자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사명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팔자라고 생각하며 자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요,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 해서 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하는 일이 직종도 다르고, 맡은 일도 다르지마는 하나님께서 달란트대로 주신 일임을 깨닫고, 사명자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 해서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는 일들도 더욱 더 잘되는 형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의 사명

우리가 <포도원>인 교회에서 할 일이 뭡니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셨는데 포도원에 가서 뭘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일 큰 계명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도 두 가지이지요.
첫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힘을 다 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키며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 예배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은 무슨 명령이든지 그대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사랑의 기준이 뭡니까?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생명바쳐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증거 중에 하나가 뭐겠습니까? 물론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구제하고 도와주는 것도 이웃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증거는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지구 상에 있는 60억의 인구 중에 3분의 1이 되는, 20억 정도가 배고프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있습니다. 한 달에 100불도 안되는 돈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3분의 1이나 됩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와 구호단체들이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얼마나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북한이나,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사람 등 많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줍시다.” 하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집니다.
사고로 몇 백명이 죽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 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고가 있을 수 있느냐고 분개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굶주리고, 육신의 죽음보다 더 비참한 지옥에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마음아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몇 십년 먼저가는 것뿐인데, 진정 비참한 죽음은 영적인 죽음인데, 그런 죽음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있는데, 그런 죽음에 전혀 마음의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자식 열 명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데 한 자녀가 몹쓸 암(癌)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다른 아홉 명이 건강하기 때문에 암에 걸린 한 자녀에 대해 위로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홉 명 건강하니까 한 명은 죽어도 괜찮지 않습니까?”하고 위로를 해 준다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홉 명이 아니라 아흔 아홉 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병든 그 한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부모에게는 꼭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산에 4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40만 명도 안 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입니다. 그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의 수는 또 얼마나 적겠습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열 명의 자녀를 둔 부모에게 아홉 명이 건강한 것이 아니라, 아홉 명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고 한 명만 겨우 건강하다고 하면, 아홉 명이 건강하고 한 명만 아프다고 해도 부모의 마음은 아플 것인데, 아홉 명이 병들고 한 명만 겨우 건강하다고 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입니까? 오늘 부산에 그런 현실이 지금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전혀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아니하고 그저 나 하나 구원받은 그것만 만족해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사명이 뭡니까? <영혼구원>입니다. 영혼구원의 전략이 <제자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서 영혼을 구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한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지 말고 제자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에 나는 큰 아들입니까, 나는 작은 아들입니까?
“예, 가겠습니다.” 대답은 하고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큰 아들입니까? 대답은 “아니요.”했는데 나중에 아버지의 마음이 생각나서 가서 일하는 작은 아들입니까? 처음도 “아니요.”, 마지막에도 “아니요.”하는 제 4의 아들입니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라>는 아버지의 그 마음, 부산만 해도 한 명만 겨우 건강하고 아홉 명은 암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우리가 헤아리고 <VIP작정하자>면 작정하고, <VIP하고 차 마시자>면 차 마시고, <가서 전도하자>면 전도하고 <영혼을 구원하자>면 구원하는, 순종하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사명을 이룰 시기

포도원에 들어가는데 언제 들어가라고 했습니까? <오늘>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늘 해야 되지, 내일로 미루면 되지 않습니다. 130년 전에 당시 미국이 낳은 세계 최대의 부흥사인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대중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하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교 마지막에는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중집회에는 마지막에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초청도 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요도 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자고 강조도 하는데, 여태까지 그렇게 해 오던 무디 목사님이 그날 만은 설교를 그렇게 끝맺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집으로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마음 속에 계속해서 되새김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예배를 마친 군중들이 흩어지자 무디 목사님과 늘 함께 다니는 생키라는 유명한 독창자가 나와서 찬송을 하는데 <오늘 부르시네 오늘 부르시네 그의 품안으로 피난을 가세 폭풍과 죽음의 재앙이 떨어져도 부르시는 주님 음성듣고 오늘 주님 앞에 가면 거기서 안식을 얻겠네> 오늘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라고 계속해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 찬송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보니까 거리에는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리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야단입니다. 그 날이 바로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난 역사상에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에 시카고 시내는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시카고가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지금 시카고에 고층건물이 다른 도시에 비해서 유난히 많은 것은 그 때에 시가지가 완전히 불타고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부흥사였던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 대화재가 있기 전에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결신을 촉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던 그 사람들 중에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그날에 구원초청을 했다면 죽어도 예수믿고 천국갔을 것인데 그들은 초청받지 못하고 “집에 가서 되새김질 하세요.”하고 돌아갔는데 그날 죽은 사람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그날 구원초청을 했다면 그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았을 것인데 초청하지 못해서 죽은 사람이 많은 줄 알고 그는 죽는날까지 내가 왜 그날 초청하지 않았던가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믿을 수 있고, 언제나 봉사할 수 있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가 다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십시오>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른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하나님은 <오늘>,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교회를 섬기면서 일, 이십년 전만 해도 아주 팽팽하던 분들이 연세가 드시고, 혹은 질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거나 병상에 누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면 아, 이렇게 약한 것이 인간이구나, 항상 우리에게 기회가 있지 않는구나, 얼마나 가슴이 답답한지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일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아니면 지옥에 가서 -껄 -껄 하는 여러분들 되지 말고, 그때 충성할 껄, 그때 드릴 껄, 그때 믿을 껄, 그때 봉사할 껄, 하고 -껄 -껄 하지 말고 오늘 이 시간,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큰 아들

큰 아들을 한번 보십시다.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큰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즉각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칭찬할만한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정말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는데 알고보니까 가지를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는데 이 큰 아들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입으로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근사하게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할렐루야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는 아멘이 없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찬송은 잘 하는데 찬송부르고 난 다음에는 <내 주여 뜻대로>가 아니고 <내 뜻대로>하려하고 <살든지 죽든지>가 아니고 어떡하든지 살려고, 죽지 않으려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아니요>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학습․세례 받을 때 하나님 말씀을 잘 배우고 지키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힘쓰고 노력하리라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아니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많은 항존직이 임직할 때는 죽도록 충성하고 성도들에게 본이 되게 봉사하기로 서약하고 작정했는데, 입술로는 “예!”했는데 생활은 “아니요.”로 채워져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입으로만 시인하고 삶으로는 순종하지 않는 이것이 큰 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했는데 순서적으로는 그들이 먼저 들어가고 너희들이 늦게 들어간다는 말 같지만 원어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만 들어가고 너희는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큰 아들같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여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말렉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후미에서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원수라 내가 천하에 그들의 이름을 도말해 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2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서 아말렉을 쳐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승리에 승리를 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조리 죽였지만 왕 아각은 생포해서 살려두었습니다. 짐승도 못 나고 쓸모없는 것은 죽였지만 살찐 소와 양들은 살려서 잘 보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으로는 “예!” 했는데 삶으로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그가 내게서 떠나 내 명령을 순종치 아니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순종을 더 좋아 하신다는 말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술로는 “예”하고 삶으로는 “아니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입술로는 “예”하는데, 찬송, 기도에는 “아멘”하는데 삶은 “아니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입으로만 아멘하지 말고 삶으로 아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5. 작은 아들

작은 아들보세요.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싫소이다.” 반항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뉘우쳤던지 그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작은 아 들은 아예 대답부터 반항적으로 했습니다. 하라는 일은 일부러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일단 제동을 걸어놓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한번 튕겨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라는대로 하면 손해보는 것 같고, 바보인 것 같고, 무능한 사람인 것 같고, 무시되는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반대해 놓고 비판하고 자기를 과시하고 내세우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마음 속에 다분히 열등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떳떳하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라는 대로 하면 자기가 못난 사람같아서 열등의식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락한 우리 마음 속에는 근본적으로 불순종의 영이 다 있습니다. 이런 불순종의 마음을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나가야 진정으로 예수믿는 사람인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격도 고쳐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언제나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작은 아들이 이렇게 했는데 다행한 것은 뒤에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한데 있습니다. 뒤에라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순종을 했습니다. 신앙의 크라이막스는 바로 이 순종에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 해놓고 가지 않는 위선자들이었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의의 도를 가르치는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가리키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늦게나마 회개하였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세리 마태요, 막달라 마리아같은 사람 아닙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니 이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 본래의 의미는 <이런 사람들만 들어가고 큰 아들같은 너희 종교지도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큰 아들은 유대인, 작은 아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이고 시내산에서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섬기고 마음대로 살다가 작은 아들처럼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서 구원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저를 위시한 우리 항존직들이 종교지도자들처럼 다른사람들 앞에서는 예, 예 순종하는 것처럼 하지마는 실제 삶에 있어서는 이들처럼 되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무릎꿇고 기도하고 더 겸손히 주님께 순종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라도 순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순종의 모델이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6. 제 3의 아들 예수님을 본 받읍시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순종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죽을 것인데도 자기를 끌고가는 사람에게 반항하지 않고 소리지르지 않고 잠잠히 끌려가는 양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과 자기의 뜻 사이에서 땀이 피가 될만큼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길 수 없습니까? 옮길 수 있으면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시다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아들도 아니고, 작은 아들도 아니고 처음도 마지막도 언제나 순종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하나님은 높여 주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영광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에릭 리델(Eric Liddell)이라는 사람은 파리올림픽에 100m 경주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경기 일정이 발표되었는데 백미터 경주 예선이 주일 오후 3시와 오후 5시였습니다. 그 일정을 보고 그는 “나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하고 예선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전체의 반응은 아주 냉소적이었습니다.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을 소매 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깊은 척하는 위선자’,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라고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래도 주일에 그는 출전하지 아니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신에 헤럴드(Harold)가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헤럴드는 리델의 기록에 약간 못미치는 선수였습니다. 에릭 리델은 기쁜 마음으로 헤럴드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주종목이 아닌 200m 경주에 출전해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400m에도 출전하였는데 그때는 벌써 스위스의 임바흐라든지, 미국의 피츠라는 사람이 세계신기록을 갱신하면서 우승후보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리델은 그 400m에 출전을 하였습니다. 출전을 앞두고 담당 안마사가 쪽지를 그에게 쥐어 주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히 여기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바라네.’ 에릭 리델은 그 쪽지를 쥐고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무서운 속도로 첫 코스를 돌았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 속도로 계속 달린다면 도중에 쓰러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에릭 리델은 우승후보인 임바흐, 피츠를 제치고 47.6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400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 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명예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더할 수 없는 축복으로 갚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일을 지키라>고 하시면 생명을 걸고 한번 지켜 보십시다. <기도하라, 전도하라, 드리라, 봉사하라>고 하시면 생명을 다 해서 말씀에 순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총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늘 걸리면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순종해야 될 것을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실 것입니다. 어떤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생명을 걸고라도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높여 주셨던 것처럼, 에릭 리델을 높여 주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늘 기도하여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들려주시는 말씀에 생명을 걸고 순종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처음에도 아멘, 나중에도 아멘, 믿을 때도 아멘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아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분을 받을 때도 아멘 했지마는 직분을 은퇴할 때도 아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순종하셨던 순종의 모델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기까지 어떤 말씀이라도 내가 순종해 보리라 다짐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받고 범사가 잘 되고 형통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7. 복음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세리와 창녀가 천국에 들어가고 당시에 잘 믿는다고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세리와 창녀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유대사람들과 유대지도자들이 제일 천시하는 사람이 바로 세리와 창녀였습니다. 세리는 당시 로마의 권력을 입고 백성들을 등쳐먹는 매국노와 비애국자였습니다. 그래서 죄인!하면 세리요, 창녀였습니다.

창녀는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제일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완전히 소외 당한 죄인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싫어하고 멸시하고 천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와 창녀가 너희들보다도 먼저, 아니 이런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만이 의의 도를 가르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요한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 21절 이하에 보면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한 것이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서 살리라>고 했습니다. 지난 날의 죄악은 묻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 어떤 사람이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네가 참된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왔으니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회개하는 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기억치 아니하는 죄를 왜 스스로 자꾸 끄집어내어서 죄책감을 가지고 괴로워 하십니까?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든지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이 시간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게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때문에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가는 것입니다. 늦었더라도 이 시간 뉘우치고 남은 삶을 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순종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영혼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큰 아들이 되지 말라, 작은 아들도 되지 말라, 참 아들의 모델인 예수님을 본 받아서 언제나, 언제든지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되라고 주님께서 우리 앞에 모델로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을 모델로, 죽기까지 복종했던 주님을 그대로 본받아서 주님처럼 높임받을 수 있는, 에릭 리델처럼 높임 받을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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