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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로 돌아오라 (렘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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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어느 청년에게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직장에 들어가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 곳이나 직장을 옮겨 다녔고, 제법 괜찮은 직장인데도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작심삼일이라고 합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이 삼일을 가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런 성격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생활, 사회생활이 매우 힘듭니다. 이 사람은 집에 와도 구박을 받고 친구들에게 가도 구박을 받습니다. “어렵게 구한 직장을 쉽게 포기하느냐? 좀 더 견디어 보라, 적응해 보라”는 충고를 하도 많이 받다 보니 스스로 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특히 지난 번 그 일은 내가 조금만 참았으면 괜찮은 건데’라고 후회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에게 자아의식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지금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구나! 앞으로는 좀 참아 보자’는 자기 인식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에 이 사람이 직장을 구했습니다. 거기서 이런 자아의식을 가지고 부딪쳐 오는 갈등을 참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심삼일을 극복했습니다. 훌륭한 직장인으로 오늘까지 잘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고치는 일은 어렵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버릇을 고치는 것도 아주 어렵습니다. 우리의 습관 하나 돌이키는 것도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입니다. 기다림의 음성입니다. 인내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너를 벌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망가진 모습 그대로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범죄의 타락에 물들어 있는 망가진 이스라엘입니다. 도무지 하나님 앞에 돌아갈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예루살렘이 불타고,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고, 영적으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났으며,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계속 복음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이 말은 다시 만나자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네게로 돌아와서 나와 만나자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만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은총적 만남과 악연적 만남이 있습니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고, 그 사람을 만나서 창조성이 일어나고 행복하고 내 생애 좋은 길을 발견하는 사람도 허다히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주 좋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은총의 만남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은총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좋은 상관을 만나고, 좋은 교회를 만나고, 더 근원적으로는 좋은 부모를 만나야 하는 은혜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향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 주시겠다고 합니다.

  시카고 어느 시골교회에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세 살 박이 어린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장에 한 거지 남자가 갑자기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이틀 전에 가출한 이 아버지는 자기 아이가 죽은 걸 알고 죽은 아이의 새 운동화를 벗겨 가지고 가서 팔아 35센트의 술을 마신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그 아이의 장례식 때 만취한 상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 끝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걸며 소망을 두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후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미국 부흥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멘트 라이트’ 목사입니다. 이 목사님의 과거는 그렇게 망가졌지만 그가 돌아와 하나님을 만나고 새 사람이 되어 미국의 영혼을 깨우는 부흥목사로서 사역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되는 것을 스스로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발버둥  다가 더 엉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벌써 돌아갔어야 하는데 스스로 내 문제를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돌아오라, 진실을 회복하라, 공평을 회복하라, 정의를 회복하라, 돌아오는 것은 회복입니다. 돌아와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고, 돌아와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은 인간의 마음이 옥토로 변하기 위해서 돌아와야 합니다. 좋은 씨는 좋은 토양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아와서 묵은 땅을 갈아 기경하고, 길가와 같은 굳은 땅이 부드러워지고, 돌밭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가시덤불 같은 우리 마음이 옥토로 변해야만 거기에 떨어진 씨가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줄 믿습니다. 농사하는 농부들은 갑자기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밭을 갈아서 준비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행위도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돌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의 첫걸음입니다. 여호와께로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성찬예식은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거룩한 만남입니다. 이 성찬은 신성한 만남이고 영원한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예식입니다. 생명을 나누고 영원히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예식은 만남입니다. 결혼식도 만남의 의미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혼식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태리와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이혼식을 거행합니다. 참 웃기는 예식입니다. 모두 까만 옷을 입고 합니다. 여러분, 이혼 주례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선진국이라고 그런 것까지 배워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도 이혼식을 주선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식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보았더니 “헤어지더라도 원수처럼 살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혼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만남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과 신성한 만남을 가지고, 거룩한 만남을 가지고, 뜨거운 영교의 시간이 일어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성찬예식에 참여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격 없는 죄인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갈 자격도 없는 우리이지만 그런 죄인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버릇없고, 촌스럽고, 치사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어느 지방의 성도님 아들이 고등학교 추첨을 받는데 그 지역에 불교재단 학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아이들이 그곳에 배정을 받으면 3년 동안 아주 곤혹을 치룬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성도님은 ‘하나님, 우리 아이가 다른 학교는 어디를 가도 좋으니 불교재단 학교에는 배정되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100일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추첨을 하고 보니 불교재단 학교에 배정되었습니다. 이 성도님이 두문불출하고, 주일날 교회도 가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돈을 달라고 했습니까? 오래 살기를 구했습니까? 건강하기를 구했습니까?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아이 불교학교에 배정이 안 되기를 기도한 그것 하나 들어 주지 않아서 제가 앞으로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런 기도를 가리켜 일명 ‘막가파 기도’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막가파식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 앞에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도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께 앞으로 내가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일에 대해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너무 힘드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이 육체의 가지를 없애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종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답이 없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아 너의 가시가 괴롭느냐? 그대로 지고 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다메섹 길에 서 보라

  여러분, 우리 기도의 응답이 이렇게 올 때 과연 아멘이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앞에 아멘 했습니다. 왜 그럴까? 바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아멘이었습니다. 이 바울을 죽음의 지경에 던져도, 가시가 괴롭혀도, 유대인의 구박과 로마인들의 환난이 자기를 엄습해도 그는 아멘 했습니다. 어째서 가능한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포악자요 훼방자요 핍박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니라” 나는 포악자요 핍박자요 훼방자요 하나님의 교회를 해하던 자였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을 잡아다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찾아 주셨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그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변하여 주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설교할 때마다, 간증할 때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서 자기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 가서 자기를 보면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죄인 이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에 서 있는 사울을 보면 죄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죄인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울인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할 말이 많고, 변명이 많고, 조건이 많습니까? 다메섹에 서 있는 사울을 보십시오. 할 말이 없는 죄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오늘 감히 성찬예식에 참여할 자격이 있어 온 것이 아닙니다. 다메섹에 서 있는 바울이 내 모습입니다. 죄인이라는 것 외에 하나도 내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 떡과 잔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의 마음이 돌아오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돌아오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주변에 정치적인 변화가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때를 호령하던 이승만 정부, 그 분은 하야성명 한 마디 앞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온 나라를 호령하던 유신정권은 총 한방 앞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결혼 한 번 멋지게 하면 행복이 거기에 있는 줄 알고, 신혼여행 멋지게 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근사한 집 한 채 사고 나면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무언가 이 땅위의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승부를 걸고, 거기에 집착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다 된 줄로 우쭐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맺는 말

  다메섹에 서 있는 사울을 보십시오. 그에게 무엇이 보입니까? 우리가 이 시간 그 사울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오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병 있는 사람은 병 낫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병이 나아지지 않아도, 육신의 병이 나아지지 않아도 영혼의 병을 고치는 자리로 나아갈 때 육신의 병도 낫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만남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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