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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에게 소망의 길이 열립니다 (롬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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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축구로 한반도가 뜨거웠다. 지난 주에 월요일에 대구로 가는 도중에 미국과의 축구할 시간이 되어서 대전의 어느 다방에 가서 축구를 봤다. 90분 동안 가슴을 조이는 경기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 대구에 도착했는데 곳곳마다 붉은 티를 입은 응원단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고 따끈따끈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옆 좌석에 앉은 어떤 사람이 "이제 우리 축구는 끝났어. 무슨 16강인가? 이제 선수들도 모두 집으로, 히딩크도 집으로"이다. 이 말을 듣는데 은근히 화가 났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미국이 폴란드를 이길 것은 확실하고, 포르투칼하고 우리와 비교해 볼 때에 우리가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끝났다고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질 때에 지더라도 왜 벌써부터 끝이 났다고 미리 단정짓는가? 그러나 지난 금요일 밤의 게임은 완전히 그 사람이 예측한 것에 반대이다. 미국이 졌고, 우리가 포르투칼을 이겼다. 나는 이런 사람을 보고 "당신은 너무 이른 절망을 하고 있군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은 축구에서 뿐만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미리 예측해서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공부를 잘 못한다고 너는 그렇게 해서 뭐가 되려고 이 모양이냐? 물론 염려가 되어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이른 절망이 아닌가? 사업을 하면서 주변 상황을 볼 때에 않 좋은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비슷한 업종이 많아졌다든지, 경쟁이 심해 졌다든지, 이윤이 박하다든지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너무 일찍 절망하는 사람들을 본다. 너무 이른 절망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내일 일을 염려하다 보면 결국 너무 이른 절망을 하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이 처음에 감독의 자리를 맡은 후에 선수들을 이끌고 나간 국제 게임에서 계속해서 5:0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의 이름이 오대영 감독이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히딩크 감독을 왜 불러왔느냐? 즉시 보내라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너무 이른 절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한일 월드컵을 생각했다. 지금은 오대영으로 졌지만 월드컵 때에 보자. 그는 너무 이른 절망을 하지 않았다. 결국은 이렇게 온 국민을 기쁘게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의 한국 이름을 공모했는데 가장 유력한 이름이 이대영이다. 성이 바뀌었다. 오대영에서 이대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너무 이른 절망은 우리의 일을 그르치고 만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병에 걸린 환자가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얽힌 전설이 있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물에 먼저 들어가서 목욕하는 자에게 어떤 병이든지 고침받는 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 이렇게 기다리기를 삼십 팔년을 기다렸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미리 염려하고 미리 이른 절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미리 절망하지 않았다. 삼십 팔년을 소망을 갖고서 그 자리를 지켰다. 우리는 앞질러서 예측하고, 앞질러서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버드대학 법과 졸업생이 어느 날 갑자기 3개월 시한부 삶의 뇌종양 환자라는 진단을 받고 말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물론 그도 절망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비 올 확률을 얘기하는 날씨예보처럼 3개월이라는 것은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환자들 중 상당수가 3개월 이내에 죽었다는 의미이지, 내가 3개월이 지나면 틀림없이 죽는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결국 그는 계획했던 대로 화가 잭슨 폴록의 전기를 완성하기 위해 집념을 불살랐고 마침내 책을 완성했으며 퓰리처상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3개월 선고를 받은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그가 말하기를 "기적을 만드는 방법은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당신 3개월 아니 3년 밖에 못산다는 진단을 받으면 미리 삼년 후에 죽을 일을 생각하며 미리 절망하고, 일찍 낙심해서 결국은 3년이 아니라 3개월 만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소식을 들어도 미리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을 때에 3개월이 아니라, 3년이 아니라 15년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캄캄한 독 속에서 쥐들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쥐를 캄캄한 독 속에 집어넣었더니 3분을 못 견디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독 속에 한 가닥 햇빛을 비췄더니 그 쥐들이 36시간을 살았다고 한다. 캄캄한 독 속에서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쥐들은 체력을 다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하여 죽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결론이다. 미리 절망하면 죽는다.

우리는 미리 절망하지 말자. 당신의 절망은 너무 이른 절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이같이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가? 당신은 소망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가? 먼저 잘못된 소망부터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디모데전서 6:17말씀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산다. 그러나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의 끝은 참으로 비참하다. 재물로 인하여 형제가 싸우고, 재물로 인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재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재물이 우리 인생의 소원이 될 수는 없다.

북태평양 부근에서 금광을 찾는데 반평생을 보낸 두 광부가 있었다. 그들은 번번히 빈손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는 금광을 찾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계속 작업을 강행했다. 그들이 어느 낡은 광산의 밑을 파내려가기 시작한지 수개월이 지난 어느날 마침내 그들은 금맥을 발견했다. 이제 부자가 된다는 기대감에 빠진 그들은 금광터널의 기둥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내려갔다. 얼마 후 흙더미가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광산은 함몰되기 시작했다. 수 톤의 흙더미가 두 사람을 덮쳤다. 한 사람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금덩어리를 움켜 쥔 채 땅에 쓰러졌다. 다른 광부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자. 이 굴이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도와줄테니 금을 내려 놓고 일어나 죽으면 다 끝이야." 그러나 부상당한 광부는 여전히 금덩어리를 움켜쥔 채 말했다. "안돼. 나를 여기에 두고 가. 나는 드디어 금맥을 찾았어. 나는 일생을 이 일에 바쳤어. 이제야 이것을 찾았는데…. 나를 두고 가!" 흙더미는 계속 쏟아지고 광산을 흙으로 덮여 갔다. 다른 한 광부가 아무리 외쳐도 금덩어리를 손에 쥔 광부는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면서 쓰러진 그 광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쳤다. "난 부자로 죽었다고 전해 줘!" 오늘날 부자로 죽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왠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재물이 우리 인생에 소망이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는 걷지 못하는 거지가 앉아서 매일같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손을 벌리면서 한푼 달라고 구걸한다. 왜냐면 그 앉은뱅이에게는 물질이 유일한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거지를 향하여 간다. 나를 바라보라고 말하니 그 거지는 "얼마나 줄까?"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이 기대를 벗어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침받은 앉은 뱅이는 뛰며 춤을 추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전 곁에 앉아있던 거지는 그의 소망을 단지 동전 몇닢에 두고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인생의 소망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도다." (벧전 1:3) 당신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서 사는가? 물질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다. 주님이 나의 소망이 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나의 소망이신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니 얼마나 우리의 삶에 소망이 넘치겠는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라. 그의 나이 75세 되던 때에 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다.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간 곳이 가나안 땅이다. 정착할 만하니 그곳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양식이 없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갔는데 굶어 죽게될 위기에 처했다. 우리 같으면 너무 쉽게 절망하고 고향 땅으로 되돌아 갔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절망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애굽 땅에서는 더 곤란한 일을 당한다. 사랑하는 부인까지도 빼앗기게될 신세가 되었다. 결국은 자기 부인은 누이라고 속여서 위기를 모면하고 만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고향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결국에는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확신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무엇을 믿었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약속을 믿은 것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는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우리는 미리 앞서서 절망하지 말자. 당신의 절망은 너무 이른 절망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라. 당신에게 소망의 길이 열리는 축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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