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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에게 기쁨의 길이 열립니다 (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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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동안은 우리 백성이 월드컵으로 기쁜 시간을 보냈다. 나이에 상관없이, 고향에 상관없이, 많이 갖고 적게 갖음에 상관없이, 많이 배웠든지 조금 배웠든지 상관없이 하나가 되어서 응원하고 하나가 되어서 기뻐하는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는데 만일 통일이 된다면 이렇게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서 기뻐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왜 기뻐했는가? 우리가 이겼기 때문에 기뻐하였다. 만일 첫 경기부터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48년 만에 첫승을 거두더니, 16강에 올라가고, 기적적으로 8강에 올라가고, 승부차기에서 4강까지 올라가는 각본없는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서 이렇게 기뻐하였다. 너무 좋은 경험을 해서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사나? 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월드컵 몇 경기에서 승리해도 기쁜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약속해 주셨으니 얼마나 기쁜가? 오늘보다 더 좋은 미래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신다는 소망을 약속해 주셨으니 얼마나 기쁜가? 주님이 앞장서서 복된 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얼마나 기쁜가? 우리에게 죽을 길이 아니라 살 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얼마나 기쁜가? 성도들의 가정에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개인의 생활에도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쁘게 살아야 한다. 기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반드시 기쁘게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기독교인들은 기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기쁘게 살 때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게 된다. 반대로 예수를 믿으면서 늘 불평하고 우울하게 살아간다면 않 믿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겠는가?

무신론 철학자인 니체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도 교회 다니고 주변에 많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예수 믿는 식구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생활에서 기쁨이 없다. 발랄함이 없다. 니체의 생각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저렇게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저렇게 기쁨과 발랄함이 없는 기독교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심을 굳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란 니체는 결국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하는 무신론 철학자가 되고 만 것이다.

만일 니체의 식구들이 예수 믿음으로 기쁨과 발랄함이 있었다면 니체는 무신론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우울하게 살고, 기쁨과 발랄함이 없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하나님, 나는 믿지 않겠소"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가 기쁘게 살고, 발랄하게 살아간다면 나로 인하여 하나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쁘게 살아야할 의무가 있다. 기쁘게 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와 대조되는 사람이 있다. 정근모박사.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는 사람들 사이에 천재로 통한다. 스물 네살의 나이에 미국 대학교에서 교수가 되었다. 꼬마교수라고 불릴 정도이었다. 과기처장관을 역임한 분이다. 이 분이 쓴 책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에 보면 예수 안에서 공부 잘하는 일곱 가지가 나오는데 첫 번째가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 어머니의 밝은 표정은 그의 어린 시절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병마에 시달리고있었지만 아들을 대할 때면 병상에서 일어나 기도한 후 꼭 연필을 깎아주었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때 어머니를 잃었다. 병상에 있으면서 기도하며 기쁜 모습으로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영향이 이렇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을 만들어 내었다. 나의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이 기쁨 때문에 정근모 장로님과 같은 분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고, 나의 삶에 기쁨이 사라지면 나로 인하여 니체와 같은 무신론 철학자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기쁘게 살면 주변의 사람에게 인정받게 된다. 작가 호퍼는 노동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실업자로 우울하게 하루 하루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는 LA시에서 운영하는 무료직업 소개소에 아침마다 나가 일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무려 5백여명이나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가끔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잔디 깍을 사람이요!" "가구 운반할 사람이요!"라고 소리치고 거기 모인 5백여 명의 사람들 중 한 두 사람만 뽑아 갔다. 호퍼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 중 무엇을 기준으로 한 사람을 뽑아가는 걸까? 그것만 안다면 일자리 구하기 쉬울텐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내가 정말 직업을 구하는 게 시급한 사람처럼 보이면 뽑히지 않을거야.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거야." 다음 날 호퍼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엔 역시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들어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이야기 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저기, 가운데 웃고 있는 사람!" 그는 호퍼를 가르키고 있었다. 그뒤부터 호퍼는 매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기쁘게 살면 세상에서도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기쁘게 살면 건강에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대부분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는 마음이 기쁘지 않은 것이다. 겉사람이 건강하려면 속사람의 마음 상태가 평안하고 기뻐야 한다. 그러나 속 사람이 편치 않고 근심과 우울증에 걸려있다면 겉사람까지도 병에 걸리게 된다.

1982년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 뇌암에 걸린 소년이 누워 있었다. 이름은 숀 버틀러. 나이는 일곱 살. 숀은 의사로부터 "회생불가" 판정을 받았다. 야구광인 숀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런타자 스테플턴의 열렬한 팬이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스테플턴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내 아들은 지금 뇌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당신의 열렬한 팬인 숀이 마지막으로 당신을 한번 보기 원한다." 스테플턴은 숀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숀, 내가 스테플턴이다. 내일 너를 위해 멋진 홈런을 날려 주마. 희망을 버리지 마라." 숀은 눈을 번쩍 뜨며 반갑게 야구영웅을 맞았다. 이튿날 스테플턴은 소년과의 약속을 지켜 홈런을 쳤다. 그 소식은 숀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소년은 병상에서 환호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소년의 병세는 완연한 회복기미를 보였다. 5개월 후에는 암세포가 말끔히 사라져 퇴원할 수 있었다. 희망과 기쁨은 암세포를 죽이는 명약이다. 기쁨은 우리의 육신을 건강하게 만든다.

기쁘게 살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가? 근본적인 기쁨은 주님께서 주시는 줄로 믿는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 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이 짧은 노랫 가사에 많은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서 주는 기쁨은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슬픔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에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당신은 어디에서 기쁨을 찾는가? 주안에서 기쁨을 찾기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합니다." 주님이 나를 버리셨다. 주님이 나를 떠나셨다고 생각하니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어거스틴도 고백한다. 내가 주님 품안에 있기 전까지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여기에 기쁨의 뿌리가 있다. 5절 말씀을 보라.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지금 주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는 것이다.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눈 수술을 했다.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의 직장까지 아내를 출근시켜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장이 너무 머니 혼자 출근하라고 말했다. 이 말에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해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 배신감까지 느꼈다. 그리곤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 다음 날부터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집고 버스를 타고 하면서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혼자 다니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2년… 버스운전 기사가 어느 날 이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아줌마는 복도 많소.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함께 앉아 있어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등뒤에 손을 흔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격려를 해주니까요."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고 괴로워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다고 슬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내가 지금 주님의 품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불안하다. 우리는 슬퍼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신다. 이 확신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기쁨의 길이 열린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대표팀 모두 호텔 로비에 앉아있었다. 이태리와의 시합에서 이긴 후였지만 그들은 스페인과의 경기를 앞두고 히딩크를 향해 물었다. 스페인과의 경기에도 냉정할 수 있나요? 난 지금 한국의 감독이다. 냉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라고 대답하자 이천수가 묻는다. 이번 월드컵이 끝난 후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의 감독이 되어 다음 월드컵에서 만난다면 우리와 싸우게 되겠죠? 그 질문에 히딩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영표가 묻는다. 그 때 우리를 다시 만난다면 우리를 적으로서 바라보게 되는 건가요? 아니 그렇지 않다. 물론 시합도중에 새로 맡게된 팀이 골을 넣게된다면 난 물론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골을 넣는다면 난 내색하진 못하겠지만 속으로는 자랑스러워하며 또 한편으로 응원할 것이다. 내가 이곳을 떠나도 난 언제까지나 한국팀의 감독이고 떠난 후에도 난 한국팀의 감독이다. 멤버들 모두 히딩크의 말을 듣고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늘 개구쟁이만 같던 이천수가 조용히 묻는다. 그 때 우리 한국팀이 이기던 지던 상관없이... 또 한번 우리를 안아 주실 수 있나요? 승부에 관계없이 우리를 안아줄 수 있나요? 이천수에 말에 모 두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히딩크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히딩크의 눈은 빨개지면서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다가가 모두를 한자리에 모아 꼬옥 안아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sure" 그럼, 물론이지.

히딩크는 떠날지 몰라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묻기를 "하나님, 승부에 관계없이 우리를 안아줄 수 있나요? 하나님, 내가 넘어져도 나를 안아줄 수 있나요? 하나님, 내가 실패해도 나를 안아줄 수 있나요? 하나님, 내가 죄를 지어도 나를 안아줄 수 있나요? 하나님, 내가 심한 질병에 걸려 고통스러울 때도 나를 안아줄 수 있나요?" 하나님의 대답. "Sure" 그럼 물론이지.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자.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 기쁨이 길이 열리는 축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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