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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양의 미래 (겔 18:30~32, 딤전 1:12~17,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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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에스겔서 18:30 ~ 32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디모데 전서 1:12 ~ 17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맡은 일을 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그분을 섬기는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5:1 ~ 7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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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면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유 장로님이 기도하신 대로 홍수 걱정입니다. 홍수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홍수라는 말은 물이 넘쳐흐른다는 뜻입니다. 사막지대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홍수 이야기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얘기로 들릴 겁니다. 물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마실 물만 아니라 농사지을 물도 없는 사람들한테 물이 넘쳐서 난리가 났다고 하면 뭐라고 반응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홍수를 당하면 우리 주위에는 물이 넘쳐납니다. 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날 때마다 부족한 게 있습니다. 홍수가 났을 때 재해대책본부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뭡니까? 식수를 공급하는 일입니다. 물이 많다고 다 마실 물은 아닙니다. 물은 많은데 정작 마실 물이 없어서 식수를 따로 공급받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다고 다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제가 어저께 얘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예장의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모시는데, 무려 90명이 출사표를 던졌답니다. 좋은 교회니까 그렇게 많이 몰렸겠지만, 어쨌든 그 중에서 선택된 사람은 딱 한 사람 아니었겠습니까! 나중에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람 참 많은데, 쓸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다고 했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좋은 물이 많이 있어서 맘대로 마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물 속에 단 한 방울의 독극물이 들어가면 모든 물은 다 죽음의 물이 됩니다. 하나의 작은 잘못이 커다란 사회를 멍들게도 하고 못쓰게도 합니다. 제가 홍수 얘기를 하고 식수 얘기를 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물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단지 매일같이 넉넉하게 마시고 쓸 수 있는 정도면 족합니다. 그 양은 많은 양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곳에서는 찬송이 울려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중국을 가보셨죠? 저도 중국 땅, 용정이나 연길을 갔는데, 겨울에 가면 고통스런 게 하나 있었습니다. 숨을 쉬기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60년대나 70년대에 하던 대로, 모든 집에서 다 연탄을 때기 때문에, 연탄구멍에서 올라오는 연탄가스가 하늘을 자욱하게 덮고 있어서 저는 숨을 쉴 수가 없는데, 그곳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아갑니다. 공기? 하나님이 그런 공기 준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풍족하게 마실 수 있는 맑은 공기를 주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준 공기에 인간이 발산하는 오염 물질이 합해졌고, 그래서 맘대로 숨을 쉬고 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식수를 마셔야 살 수 있지만, 산에 있는 나무는 식수가 아닌 적당한 양의 빗물만으로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식수를 먹고 음식도 먹고서는 여러 오물을 만들어 내는데, 나무들은 그냥 빗물만 먹고서도 산소를 만들어 우리에게 공급해 줍니다. 이것이 놀라운 창조의 섭리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무와 산과 물과 바다와 우리 인간이 어우러져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니,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만드신 은총의 우리 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의 우리를 떠난 사람을 “잃은 자”라고 말합니다.

누가 잃어버린 자입니까? 일단 우리를 떠나면 혼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상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은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람이 없다면 말할 상대가 없습니다.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 혹시 사람이 있어도 말을 걸 수 없는 사람, 귀가 있고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그냥 끙끙 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어느 사회학자의 말대로 군중 속의 고독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도 사람도 다 잃고서 대화가 없는 사회, 불만과 좌절이 팽배한 사회입니다.

교회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잃어버린 상태를 벗어나서 함께 모여서 우리 안에서 입을 열게 하고, 귀도 들리게 하고, 눈도 뜨게 하고, 그래서 얘기하고 감사하고 느끼고 찬양함으로써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창출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런 일을 예배라는 이름으로 매주일 이렇게 실행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학자 중에 본회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글과 말 중에 여러 가지 중요한 것들이 많지만, 오늘 이 잃어버린 자들의 설움과 관련해서 한 가지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이분은 히틀러 치하에서 반 나치, 반 히틀러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사형 언도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갑니다. 그는 처형되기 전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 때문에 버림을 받고, 잃어버린 자, 모든 권리를 빼앗긴 자, 아무런 힘도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본회퍼는 자신이 하려고 한 일을 되돌아보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한 일을 기뻐하십니까?” 본회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기뻐하노라. 너는 잃은 자가 아니라 내가 택한 자이다. 네가 무력한 가운데 있지만, 내가 너와 함께하니 힘을 얻어라.” 그때 본회퍼가 한 말이 “힘없음 속의 힘, 힘없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본회퍼가 고백한 무력함은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죽임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절망적인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부활의 힘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무력함 속의 힘! 이 힘은 하나님의 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를 벗어나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잃은 자조차도 하나님은 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늘을 지붕 삼아 사는 사람들, 바윗돌을 베게 삼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풀뿌리를 음식으로 삼아 사는 불쌍한 사람들, 그들도 하나님은 돌보시고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만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벗어나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었던 자라 하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둘러매고 안전한 우리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나 잃어버려진 것 자체가 복일 수는 없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힘없는 자에게 힘을 주셔서 그 힘으로 다시 하나님의 동산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힘, 그 힘이 힘없는 자의 힘입니다.

제가 지난번 워싱턴에 다녀온 일 가운데 오늘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백악관에서, 국무성에서, 국방성에서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세계 최강국 아닙니까? 첨단 문명에 첨단 무기와 세계 최고의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불안해하십니까?” 그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강한 힘이 있어도, 독극물 한 방울이 물속에 스며들어 퍼지듯이, 자기들을 흔들 수 있다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없는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보다도 힘이 있는 미국의 불안은 훨씬 크다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우린들 불안하지 않습니까? 안보, 안전, 누가 백 퍼센트 안정을 보장하겠습니까?

그 사람들 말이, 물론 목사들이 모여 있으니까 더욱 그렇게 말했겠지만, “하나님께서 미국도 지켜주시고 한반도도 지켜주시고, 인간의 힘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안전지대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도록 함께 좀 기도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집단은 그것이 국가든, 사회든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왜 완벽할 수가 없습니까? 인간의 집단에는 언제나 우리 바깥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잃은 자가 우리 바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그 우리가 아무리 튼튼해도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아프신 분이 참 많습니다. 오랫동안 아프신 분들, 지금 질병을 앓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 가정의 식구들 마음은 항상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잃은 양을 찾으러 가셨느냐 하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가 울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다가 아흔아홉 마리를 채워서 ‘백 마리’라는 완전한 공동체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잃은 게 왜 귀합니까?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왜 찾아오십니까? 그놈을 찾아다 채워야 온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왜 죄인들과 식탁을 같이 합니까? 버리면 되지.” 하는 비난에 대해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죄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지은 죄를 용서하여서 의인들의 완전한 동산을 만들려고 한다. 이게 구원의 역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어깨에 걸머쥐고 다시 우리로 돌아오실 때, 그 우리는 바리새인들만 있는 율법의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우리는 회개하면 누구나가 돌아와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음의 집입니다. 유대인들만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인종과 지역을 다 초월한 복음이라 이름하는 집! 율법의 집에는 허가를 받아야 들어가지만, 복음의 집에는 허가 없이 신고만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유의 집!

하나님은 이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셔서, 그 힘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걸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의 말이다. 회개하고 나와 함께 새집을 이루고 살자. 이 집은 죽임의 집이 아니고 살림의 집이다.”

국무성에 있는 분들과 이야기 하면서, 군사 안보를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정부가 나서기 어려우면 교회를 통해서라도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하자는 데에 합의를 했습니다.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인도주의와, 소위 북한 정권의 악의를 없애는 것, 두개를 동시에 추진하자고 한 것입니다. 단, 악의를 없애는 것도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게 지난번 회합의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이유로든 버림받은 사회, 나라, 국가, 개인이 존재하는 한,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안보는, 안전은 백 퍼센트 보장되지 않습니다. 잃은 자가 회개하고 돌아와 새집을 이룰 때까지는 말입니다. 자유의 집, 큰 집, 바로 이런 집을 만들어 가보십시다.

저는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들 중에 강단에서 말씀을 하시거나 공연을 하시는 등 소위 무대에 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도 주일날 이렇게 강단에 서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합니다만, 저에게는 소박한 바람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때로 미술 전람회에 가거나 음악 발표회에 갈 때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서 한구석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서서 감상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연주되는 음악, 전시된 그림, 그 자체를 즐기고 거기에 내 몸과 맘을 쏟아 붓고서 감동을 느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예배가 오르겐 전주로부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한 시간 예배인데, 이때만큼이라도 찬송과 기도와 성서 말씀과 설교 등 모든 순서 속에 빠져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일주일에 한 시간만이라도 몸과 마음과 지혜와 정성을 몽땅 쏟아서 예배 속에 첨벙 뛰어들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도 가끔 이 자리를 벗어나서 여러분 곁에 앉아서 그렇게 한 시간만 은혜에 완전히 잠겨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번 빠져보십시다. 사람을 믿고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분위기 속에 한번 빠져서, 그분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분과 함께 기뻐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깊이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내 말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다. 베풀려고만 하지 말고 좀 받아보십시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시다. 참으로 은혜를 받아서 우리도 베풀게, 우리도 가르치게, 우리도 일 좀 하게 해주시라고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집에 들어오셔서 한번 푹 담가 보십시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집은 죽음의 집이 아니고 생명의 집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너라. 나와 같이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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