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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천국의 주인공 (눅 18:1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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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얼마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라고 하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이트가 열 세 살 때에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수술에서 수혈이 잘못되어서
이 소년이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고 하는 AIDS 라고 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이 병원에서 잘못해서 그대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가정도 특별히 의사선생님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밝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 미국에 전해지게 될 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이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유명인사들이 앞을 다투어서 이 어린아이를 찾아 방문했습니다.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레이건도 친히 이 어린 소년을 찾아 방문했고요
또 당시의 유명한 팝 가수인 마이클 잭슨까지도
이 어린 소년을 방문해서 위로했습니다.
결국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이 소년은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욱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 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니예요. 전 지금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아무도 아빠가 제게 준 선물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내게 천국 열쇠를 주었잖아요.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고, 교회에 나아가 예수를 믿게 해 주었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보다 위대한 선물이 어디있겠습니까? ]

우리 모두는 자녀에 대한 관심은 지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어린이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어떻게 다른가를 발견하고 우리 자녀들에 대한 바른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먼저 어린이 주일 유래를 살펴보면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게 된 것은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들의 가능성과 꿈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실시되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살리스트(Universalist)제일 교회의 레오날드 목사는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일을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 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어린이 주일'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린이 주일은
교회 절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했던 것은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윤극영 등
어린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색동회는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 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어린이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어른들이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3>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도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어린아이에 대한 관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맡겨주신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며,
또 우리교회에 보내주신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하는가를
잘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말씀의 개요를 말씀드린다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느 마을에 들어가셔서 복음을 증거 하시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작은 어린아이 하나가 예수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와서
예수님 무릎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부인이 그 아이를 잡아당기고
자기의 아이를 예수님 가슴에 슬쩍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웃으시며 그 아이의 얼굴에 볼을 갖다 대셨습니다.
그 옆에 있던 젊은 부인도 안고 있던 어린아이를
예수님 품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아이들을 받아 안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늘의 이슬 같은 신령한 복(福), 땅의 기름짐의 복,
강건한 복이 임할지어다."
그러자 모든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 무릎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이 광경을 시종 지켜보던 제자들이 화를 내면서
"여보세요,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피곤한 분이신 데
왜 아이들을 데리고와서 이리 귀찮게 구는거요" 하면서
데리고 온 아이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내게 오는 아이들은 금하지 마라, 저들을 용납하라,
저들에게 복을 빌어 주라 ].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에 대한 관심은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4>당시 부모들도 자녀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을 바라며
아이를 앉고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이것 정말 잘한 일이요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부모들은 관심이 지나칠 정도이지만
그 목적은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얼마전에 미국 뉴욕 타임즈의 보도에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사는 <저스틴 채프먼>이라는 8살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3살 때부터 천재성을 나타내어
<스텐퍼드 비네>라는 지능 테스트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5살 때 온라인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6살 때 뉴욕의 <로체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때 받은 IQ 테스트에서 298점을 받았고
미국 대학 입학 능력 시험인 SAT에서는
주요과목에서 만점인 800점을 맞았습니다.
지난해 7월 영재를 위한 <브리든 스쿨>에 입학했습니다.
처음엔 곧잘 했지만 11월부터 모든 수업을 거부하더니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등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면서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일로 채프먼의 어머니는 어린이 보호 태만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채프먼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 채프먼의 IQ테스트는 조작했고,
SAT 성적은 이웃집 아들의 점수를 훔쳤으며
스텐퍼드 비네의 지능 테스트는 대신 답을 썼다 ] 고 실토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열등의식 때문에 자녀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자녀를 망그트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관심을
먼저 신앙에 대한 관심이 가져야 하고, 인격적인 성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토기장이 손에 들려진 진흙과 같아서
토기장이가 빚으면 그 빚는 모양 그대로 자기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세모 모양의 그릇이 굳어진 후에 네모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굳기 전에는 그 모양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굳어지기 전에 잘 빚어야 합니다.
어린이의 학습능력이나 암기력, 그들이 가진 에너지와 순수함을 고려할 때 귀한 어린이의 시절을 놓치지 않고 <5>
그들에게 잊혀진 하나님의 형상을 바로 새겨 넣는다면
그들은 평생 바른 자아상과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방황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나갈 것입니다.
잠22:6절 [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라고 우리에게 명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위임받은 토기장이입니다.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21세기를 살아나가는데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게 합니다.
복음, 믿음, 구원은 쉰 세대의 용어인양 뒷전으로 밀려나고
영어, 인터넷이 성공하는 삶의 정석으로 등장하여 우상시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토기장이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위대한 석학? 예술가? 전문가 아니면 스타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부모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통해 부모가 무엇에 비중을 두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가라는 것으로
결코 그들에게 신앙의 전통이 전수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바르게 서게 될 때 자녀들의 삶에 위대한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토기장이 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토기장이의 임무를 위임하셨고
나아가서 교사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음세대를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 자손에게 그것을 알리라고 하신 목적은 시76:6-8절에
[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경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전수는 구약과 신약에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이 신앙을 다음세대에게 전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자신의 신앙을 치장하라는데 있지 아니하고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의 전수인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6>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오늘의 교회 안에 기성세대와 비슷한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했습니다.
바로 아이들을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를 맡고 있는 몇 몇 분의 교사들 외에는
대부분 자기 아이에게는 관심을 가지지마는
주일학교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미온적입니다.
교인들이 그럽니다.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되느냐? 고 물으면
주일 낯 예배 장년 출석수만 말하지 주일학생들은 빼 버립니다.
어린아이는 교인 수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관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 수준이나 오늘 교회 교인들 수준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경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내 소유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녀는 소유가 아닙니다.
내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근간에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니
자녀를 학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의 변명은
<내가 내 새끼 때리는 데 당신은 왜 참견이야?>
이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하여 자녀를 주셨지만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부모는 양육권만 있지 소유권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요게벳은 모세를 낳았을 때 자기 아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모들은 아들을 낳으면
자기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모세 부모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이이기에 하나님께 죽고 사는 것을 맡기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갈대 상자를 만들어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17년을 기다리던 아이였습니다.
얼마나 기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젖떨어지자 마자 성막으로 보내서 <7>
그 곳에서 엘리 대제사장과 같이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내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를 바르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바이얼라 윌덴> 목사님이 뉴욕 인근에 살고 있는 가정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그 가정에 4살된 아이가 있었는데
얼마나 총명하고 사랑스러운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가 조금 후 밝혀졌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산더미같이 설겆이 할 것이 쌓여 있었습니다.
너무나 바빴습니다.
그런데 4살된 아들이 책을 들고 오더니 물었습니다.
<엄마! 이 사람은 무엇을 하는 거야?>
엄마는 설겆이를 하다 말고 아들을 데리고 소파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다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참동안 그렇게 설명을 하여 주었더니
아들은 <알았어> 하면서 만족한 얼굴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바쁜 데 어떻게 그렇게 아들이 물어 보는 것을 다 대꾸하여 줍니까?>
이 질문에 엄마가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설겆이는 평생하는 것입니다. 지금 못 하면 나중에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의 질문은 평생 처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순위는 아들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를 소중히 여겨야 좋은 부모가 됩니다.
에디슨은 어려서 공부를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소중히 여겼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미진아라고 평을 받았던 윈스턴 처질도
부모가 소중히 길렀습니다.
어려서 머리가 너무나 나쁘다고 평이 나 있었던 아인슈타인,
정신 박약아라고 평하였던 아인슈타인도 부모가 소중히 길렀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렵다고 포기한 아이들을
부모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소중히 길렀습니다.
다 포기하였어도 부모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인류에 빛을 발하는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혹 주일학생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없어야 겠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어린아이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입니까?

1) 15절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손으로 어루만져주셨습니다. <8>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 하나를 안아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지금까지 이런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거든요.
주님 당시에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을 경시하고 매우 엄하게 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님의 태도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행동이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교육 방법인지 몰라요.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집마다 의사가 계셨잖아요. 가정의, 무면허 의사, 할머니 말이에요.
할머니께서는 손자들을 무릎에 눕혀 놓고
'할머니 손은 약손이다' 하시면서 배를 살살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잠이 들고, 한잠 자고 나면
아프던 배가 깨끗이 낳아서 정말 할머니 배는 약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자라게 되면 잘못되는 애들이 없어요.
옛날 부모들은 그 많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다 부모의 손길로 길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아이들을 사랑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엄마들은 달라요.
애들을 영어, 컴퓨터, 피아노, 태권도 학원 등에다 맡겨 버립니다.
언제 부모의 손길을 느낄 겨를이 없어요.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이런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 결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남을 배려할 줄을 모르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共同體)정신이 희박한 아이를 만듭니다.
우리들은 돈 가지고, 학원에만 보내서 남의 손에 맡겨서만 기르려고 하지 말고, 가장 중요한 것,
부모의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자녀들에게 전달해 주어야합니다.
머리를 만져주면서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 주고,
눈을 스다듬으며 허탄한 데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입술을 잡고 만져서 진실한 말이 나오도록 하고,
가슴을 꽉 눌러 앉아서 허탄(虛誕)한 생각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손과 발을 만져서 지혜롭고 슬기롭도록 하고, 어깨를 꽉 잡아서 용기(勇氣)를 잃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길러야합니다.

오늘 당장 가서 자녀들을 가슴으로 안아주고 볼을 맞대고 쓰다듬어 주세요. 우리 교사들도
이런 따뜻한 정으로 어린이를 교육하고, 학생들을 교육해야합니다.
이런 사랑이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입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교육, 신앙교육, 인격교육을 시켜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와서 <9>
목사님께, 교사님들께 사랑 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요.
그들의 정서에 너무 좋은 거예요.
< 이번 부흥회 때도 젊은 새댁이 아이 앉고는 나오면서
목사님~! 우리 애기 축복기도 한 번 해 주이소 >

심리학자 <할로우>의 실험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두 마리의 어미 원숭이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차가운 철사로 만들고, 또 다른 하나는 따뜻한 헝겊으로 만들어서 젖병을 철사로 만든 어미의 목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끼 원숭이들은 젖병을 매단 철사 원숭이에게는 가지 않고,
늘 따뜻한 헝겊 어미의 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젖을 먹을 때도 몸은 헝겊 어미 쪽에 두고
목만 길게 빼서 젖병을 끌어당기곤 했습니다.
이 실험 결과 부모와 자식간의 애착현상은 젖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고 따뜻한 접촉 때문이라는 것이 증명됐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물질의 제공자이기 때문만 아니라 따뜻한 피부접촉을 통한 사랑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시대야말로
어린이를 안아주셨던 예수님을 닮아 가는 부모님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하루 한번이라도 내 자녀를 사랑으로 안아주어
그들이 '나는 사랑 받고 있는 귀한 존재자'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독 같은 기사 막10:16절에 보면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나온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머리에 안수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공개적으로 존경받는 선생이 어린이를 품에 안고
안수하며 축복해 주시는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마음껏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너는 지혜롭다, 늠름하다, 장차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
너는 대 학자가 되겠다, 너는 대 사업가가 되겠다', 등
이런 복을 빌어 주고, 격려를 해주어야 합니다.
작년 철야기도 때 정교수님이란 분
교회 문간 방에 육남매가 살면서 그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 박사야 박사야" 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렸을 때 보면 어머니들이 복을 빌어주기는커녕 아이들에게 정말 입에다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욕을 합니다. 어떻든 그 욕을 먹고 컸는 대도 이렇게 잘 사니 하나님의 은혜에요. <10>
그런데 참 좋은 말이 하나 있어요. 코 풀 때는 '흥(興)해, 흥해'
그러잖아요. 다행이 그 저주가 임하지 않은 것은 코를 많이 풀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엄청한 선언을 합니다.
16절에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래셨을까요? 어린아이들에게 구원(救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뜻 잘못 생각하면
구원은 어른들에게만 해당되는 줄로 압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에게도 정말로 구원이 필요하며,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이것을 믿는 부모라면 자녀들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천국의 모델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18:17절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서 어른들이 배울 점이 많다는 말입니다.
특히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 백성의 합당한 성품을 가져야 되는데
이것을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순진(純眞)하고 깨끗한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아무런 사심도 가지지 않고 때묻지 않은 순진한 마음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겸손(謙遜)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의 잘못도 금방 깨닫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겸손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특히 천국의 주역인 어린아이의 마음은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그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부모가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리라는 믿음 속에서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단 한 학기의 학비도 마련할 힘이 없으면서 돈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11>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부모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을 확신하며
부모님만 의지하면서 마음놓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줄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미인(美人)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가 그 부모를 신뢰하는 것과 같이 주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시 어른들의 아이들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엎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와 어린이는
인구조사 때 수에 넣지도 않을 정도로 무시했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충격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귀중히 보십니까?
그건 바로 어린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요
신앙과 전통을 이어갈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주도적 세력을
WASP(White, Anglo, Saxon, Protestants)라고 합니다.
그들은 영국 구교회의 핍박을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의 영향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난 축복을 받아 세계의 리더들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역경들이 있었지만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적 유산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나의 자녀관은 어떠합니까?

아이를 많이 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쓰는 용어가 늘 거칠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빨리 처먹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들은 어느새 그런 말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셨습니다. 과일을 깎아 대접했더니 선생님이 아이에게 같이 먹자고 권합니다 <12>
그러자 아이가 엄마 눈치를 슬슬 보며 묻습니다.
“엄마, 선생님이 같이 먹자는데 같이 처먹을까요?”
부모의 한마디 한마디는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언어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담긴 사상이 전달된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그 아이 안에서 가치체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부모들이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을 가장 많이 가르칩니다.
그래서 일본은 예의가 바른 나라입니다.
미국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과 나누어 가지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미국인들 몸에 배인 자원봉사 정신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와 무슨 말을 가장 많이 나눌까요?
단연“공부해라”입니다. 그리고 “빨리 빨리”입니다.
그래서 늘 “빨리 밥 먹고 학교가라”,“빨리 공부해라”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 일하는 것 보면 무엇이든지 후딱 해 치웁니다. 잘 했느냐 못했느냐가 없습니다. 일단 했으면 됐다는 식이지요.
그래서 무너지고, 부숴 지고 그럽니다.
결국 한 사람의 생애는 부모의 말 한마디로 시작 됩니다.
말 한마디가 가치관을 형성하는 틀이 되는가하면,
말 한마디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모든 교육의 출발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가정교육이라는 것이
거의 무의식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더욱 주의가 필요합니다.

좋은 향수의 가격은 만만치가 않다고 합니다.
샤넬 향수 같은 것은 한 병에 몇 십 만원 합니다.
그러나 향수가 아무리 비싼들 사람의 향기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저마다 향기를 내고 싶어합니다.
사람의 진정한 향기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의 향기입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라고 하는 향기를 지녔습니다.
어른인체 하면, 악취가 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는체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되어야 향기가 납니다.
이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에 예수가 살포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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