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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내게 데려 오라!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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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동광교회)

오늘은 어리신 이, 곧 어린이들을 먼저 생각하며 지키는 어린이 주일인데요, 가슴 아픈 이야기로 말씀 마당을 열겠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인천에서 일어났던 사건인데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 하나가 자기 사는 아파트 15층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아이는 현장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이 아이가 자살한 이유입니다. 이유인즉 나쁜 성적을 비관한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집은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부모님도 다 살아계셨고,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사는 아이였습니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의 가치관이었습니다.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그 아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이 아이에게 심어준 가치관이란, 세상에서 학교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학교 성적이 좋아야 성공할 수 있고, 세상에서 성공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 해서 너의 인생은 너의 성적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서 이 아이는 학업 성적이 올라가면 행복했고, 반대로 성적이 떨어지면 불행했습니다. 문제는 이 아이의 성적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만큼 오르지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기는커녕, 고학년이 될 수록 점점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바보라고 규정하고 맙니다. 이렇게 살아서 행복할 수도 없고, 그러니 이 땅에 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잘못된 믿음 말고는 전혀 잘못이 없는 이 아이는 부모와 세상을 향해, 공부 못해서 죄송하다는 편지를 남겨 놓고 자살이란 극단적인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제 겨우 12살,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자기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아이처럼 자살 충동을 느끼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데 있습니다. 성적을 비관하고, 자기 못난 외모를 비관하고, 자기의 작은 키를 비관하고, 자기의 부족한 환경을 비관하고, 심지어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부모를 비관하면서, 걸핏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아이는 전교 1등을 한 뒤에 그만 자살한 경우도 있습니다. 유서에 보니, 다시는 이처럼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을 것 같고, 지금이 최고로 행복하니, 이렇게 행복할 때 세상을 떠나겠다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사느니 죽는 쪽이 훨씬 낫다는 악마적 가치관에 우리 아이들이 휘둘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로 이런 세태 속에 우리 부모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말 한 마디 건네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라고 말할 수도 없는 법, 분명 내가 살아 본 세상은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해야 그나마 사람 구실하고 살 것 같은데,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은데, 공부하라고 했다 해서 자살을 해 버리면,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이유 있는 항변입니다. 해서 우리 부모들은 부모대로 정말 갑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우리 부모 세대가 잊지 말아야 할 기본 원칙 하나 있습니다. 자녀교육의 방법론이 아니라, 원칙인데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 부모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성경적 원칙, 작년 이맘때쯤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다시 들으시며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 원칙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 "부모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대할 때에 절대로 지켜야 하는 원칙 하나는 자녀가 노여움을 타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공부하라고 권하는 일,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원칙이 있으니, 그 공부 때문에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좀 과격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 자녀를 노엽게 하느니 차라리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쪽이 더 좋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부모님은 이렇게 반문하실 겁니다. 우리 아이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아이 인생을 책임지실 겁니까? 네 책임지겠습니다. 단, 부모님이 해 주실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저와 함께 자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부모의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저는 그렇게 반문하시는 분들께 오히려 반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부모들끼리, 솔직하고 정직하게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정말 성적 1점 차이가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 맞습니까? 인생의 행복이 성적순으로 정해지는 것 맞습니까? 내가 학교 다닐 때 받았던 성적의 순서대로 행복이 정해지는 것 맞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인생의 행복과 보람이 꼭 성적순서대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 아이들의 모든 것을 성적으로만 평가합니까? 왜 우리 아이들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성적이란 굴레를 씌워,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느냐 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여쭙겠습니다. 성적이 왜 그리 중요합니까? 정말 자녀를 위한 마음입니까? 혹시 우리 부모들의 체면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닙니까? 제가 너무 비약했습니까? 물론 기왕이면 좋은 성적을 받는 것, 좋은 일입니다.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가면, 좀더 많은 것이 보장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으니,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을 품고 출세한 아이들,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노여움이 가득한 채 권력을 가진 자녀, 오히려 자기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 힘들게 만듭니다. 해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자녀들 가슴 속의 노여움과 분은 역사에 오점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성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저는 그것이 사랑이요 행복이라 믿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면, 그 아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 그 아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자기가 꼭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 주는 일이라 믿습니다. 해서 그가 원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요 부모가 해야 할 일이라 믿습니다.

부모님 여러분, 내 눈으로 자녀를 보지 마시고, 자녀의 눈으로 자녀의 삶을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내 욕심은 버리시고, 오직 자녀들의 꿈을 발견해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인사하며 덕담을 주십니다.

<주 안에서 자식 농사 잘 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말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세 번이나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소위, 수난예고인데요, 그러나 그 때마다 제자들은 그 말씀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 뒤에서 누가 더 크냐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제자들, 저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착잡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간다고 이야기해 주는데도, 저들은 자리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장면을 먼저 확인하고 갑니다. / 마가복음  9:33-37 / (읽기) / 이 말씀에서 종말론적 신앙을 괄호 안에 넣고 나면, 윤리적 명령이 남는데요, 내용인즉 “어린이를 영접하라!”는 겁니다.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어리신 이, 곧 어린이를 맞아들이고, 그 어린이들과 잘 사귀라는 명령입니다. 어린이들과 잘 사귀라는 명령을 꼭 기억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9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건만, 주님의 위대한 제자들, 바로 다음 장인 마가복음 10장에서 다시 한번 주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엉뚱한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모자란 제자들의 모습, 다시 확인합니다. / 막 10:13 / (읽기) / 거기 사람들이란 단어와 제자들이란 단어에 표시하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는데, 정작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 어린아이들을 주께로 데려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라는 작자들은 저들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저들을 꾸짖고 맙니다. 방금 전에 어린이를 영접하고 저들과 잘 사귀라 하신 말씀, 그래야 천국 간다는 말씀을 주셨는데도, 오히려 주님 면전에서 복 받기 원하는 어린이들을 제자들이 나서서 나무라다니, 이젠 우리 주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 해서 14절에서 우리 주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10:14 / (읽기) /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사모하여 주님께 나아오는 저들을 나무라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사탄이 막아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의 제자들이 저들을 막아서서 저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부모님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막지 마시고 꾸짖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 저들이 바로 천국의 주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주인인 아이들이 자기 천국을 향해 오는데 그 길을 가로 막고 나서서는 아니 됩니다. 천국 가는 길이 막힌 아이, 그 인생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오히려 우리 자녀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떤 부모님은 TV 드라마는 자녀들과 같이 보면서, 예배는 같이 드리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어떤 부모님은 영화는 같이 보면서 말씀은 같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오, 그것 역시 주님께로 오는 길을 부모가 나서서 막는 일입니다. 우리 아이가 드라마나 영화나 광고를 보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모들이 말씀을 가르쳐 줄 때에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큼,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오, 광고 한 편 찍듯, 공을 들여 우리 자녀의 눈높이 맞도록 말씀을 각색해 주시고, 그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타고 우리 자녀들이 주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해서 우리 주님, 계속해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 10:15 / (읽기) /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풀어줍니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진한 마음입니다. 순진한 마음, 곧 순수하고 참된 마음을 말하는데요, 문제는 우리네 부모들의 마음이 이젠 더 이상 순진하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우리 부모들을 향하여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저들과 사귀라 하신 것입니다. 저들에게서 순진한 마음을 다시 배우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말씀은 우리 부모들을 위한 축복의 말씀이군요. 여러분, 어린이를 영접하시고 저들과 깊이 사귀시어, 모두 천국을 상속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부모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불안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천국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집니다. 왜? 평소 어린아이들과 자녀들을 제대로 영접하지 못했고, 저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막아서서 꾸짖지는 않았는지 불안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꼭 기억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면 됩니다. 그런데요, 곰곰 따지고 보니, 천국 가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어린이를 사랑하고, 내 자녀들을 제대로 사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순교해야 할 줄 알았는데, 여기 이 귀엽고 사랑스런 어린이를 영접하고 저들과 사귀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그래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를 향한 우리 주님의 애틋한 마음을 다시 한번 헤아리고 싶습니다.  동시에 어린 아이들의 특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와 함께 주시는 몇 가지 지침을 받으려고 합니다. 잘 들어 주시고, 가정의 달 5월, 한 달만이라도, 우리 아이들과 깊이 사귀어 주시기 바랍니다.

1) 어린이는 순수합니다. 어른들처럼 두 마음이 아닙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열등감도 없고, 거만한 우월감도 없고, 빈부의 차이에 대한 그 어떤 걸림도 없고, 또한 스스럼도 없습니다. 정직합니다. 순진합니다. 순수합니다.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 곧 천국에 들어간다 하셨습니다. 5월 한 달, 우리 어린이들과 잘 사귀시어 이런 순수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어린이들에겐 꿈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꿈을 잘 꿉니다. 무한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꿈이 현실보다 강하다는 점입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훨씬 강합니다. 희망은 경험적 현실을 초월하는 힘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어린이들의 힘이요 생명력입니다. 지금 여기에 분명히 없는데, 그러나 마치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순전한 어린이들이 강퍅해진 어른들보다 훨씬 영적입니다. 5월 한 달, 어린이들을 영접하여 순순한 꿈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3) 어린이들은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습니다. 어린 것이 오직 부모님의 사랑에 목숨을 겁니다. 행여 부모님의 사랑이 내게서 떠난 것 같거나,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거꾸로 난폭해지기도 하고 공격적이 되기도 합니다. 왜? 사랑에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둘째를 낳고 나면 첫째가 포악을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 순하던 첫째 아이의 성격이 아주 공격적인 성격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기 동생을 안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와서 동생을 공격합니다. 때로 자기도 다시 갓난아기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젖 뗀 아이가 다시 젖병을 물려달라고 우깁니다. 동생처럼 말입니다. 왜? 자기 목숨이 달려 있는 부모님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떠난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 사랑 다시 찾아오려고 온갖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른들 가운데 사랑에 목숨 거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아주 어려운 세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른들도 많습니다. 사랑 보다 귀한 것이 더 많은 존재, 바로 어른들, 아니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에 목숨을 걸었던 어떤 아들의 슬픈 이야기 한 토막 / 그러나 부모들이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 한 토막 간증으로 드립니다. / 1950년 한국에서 일어난 6.25전쟁 때 이야기, 참전한 미군 병사 하나, 전투 중 행방불명, 부모가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음, 포기한 어느 날, 아들이 집으로 전화를 함,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이미 본국으로 후송되어 이제 치료를 다 받고 집에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 그러니 자기를 데리러 오라는 것, 아버지가 무척 기뻐,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아버지에게 아들이 특청을 함,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나의 전우 하나가 전투 중 부상을 입어 두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같이 데려 가게 해 주세요.”“그러자, 며칠 쉬었다 가라고 하렴”“아니요, 평생, 아들처럼 같이 살게 해 주세요.” “바보 같은 녀석, 생면부지 남의 아들 데려다가 어떻게 돌보란 말이냐? 성한 몸도 아니라면서, 너의 엄마가 싫어할 줄 뻔히 알면서 왜 그러느냐?”  "그 친구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데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지금 갈 테니 어서 집에 올 준비나 하고 있어!” “싫어요, 친구와 같이 안 가면 저도 안 갈래요.” “이 놈, 왜 이래,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니야”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 아들은 권총으로 자살 한 뒤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시신에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제대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주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 기본이 안 된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오히려 주님께 나아오는 어린이들을 막아서서 나무라는 제자들 역시, 제자가 아닙니다. 부모와 제자는 자녀와 어린이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어르신 여러분!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사랑하는 일, 마음먹기에 달린 일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 어린 아이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좀 어린아이 같아지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속의 때를 벗어 버리고, 주님을 영접하듯 어린이를 영접하여, 저들과 좀 사귀시기 바랍니다.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최소한 5월 한 달, 목숨 건 사랑으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사랑해 보십시다. 우리 주님처럼, 나에게 맡겨 주신 아이들 자주 품에 안아, 하늘의 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부모로 세우심은 주님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안아주라는 명령에 다름 아닙니다. 나를 교사로 세우심은 저들을 가슴에 품어 사랑으로 양육하라는 명령에 다름 아닙니다.

최소한 하루에 한번씩 자녀들을 품에 안고 저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자녀뿐만 안아 주실 일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아이들 모두를 가슴에 품고 저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 그 자체로 이미 행복한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저들의 인생이 주 안에서 잘 되고 잘 잘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인사!

<주 안에서 자식 농사 잘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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