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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홀로 서기 교육/ 신 6: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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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서기 교육

본문: 신 6: 4∼9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절)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예찬’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어린이는 복되다! 이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왔습니다. 그 복을 많이 가져온 이가 어린이입니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줍니다. 어린이는 순 복 덩어리이다. ”
예수님도 “어린이와 같은 이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8:4). 어린이의 밝고 맑은 마음, 그들의 순전함과 온유함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되는 이른바 ‘쉐마’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집집마다 대문 위에 조그마한 두루마리를 붙여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쉐마’입니다(5절). 이는 유대인 교육의 핵심으로 여기서 신앙교육의 2가지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르치기 전에 모범을 보이십시오. 사랑과 신앙은 말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자녀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이 생각날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반복해서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반복만큼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신앙교육의 4대 강령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 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혼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녀로 양육한다면 일단 신앙교육은 성공한 것입니다. 주님의 가치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이 인생에서 정말 귀한 것인지, 욕망보다는 필요를, 필요보다는 의를, 의보다는 덕을, 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소명적 인생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은사와 재능을 잘 살펴서 평생 기쁘게 주를 위해 몸 바쳐 주를 위한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라 듣고 배워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식과 지식을 초월하여 말씀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부모들이 이 4가지를 명심하고 자녀를 가르친다면 그 아이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 17)
큰 도시의 후생국에 근무하는 한 여직원이 빈민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아이를 알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소아마비로 절름발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아이를 매우 불쌍히 생각하여 그 아이가 걸을 수 있도록 도와 주기 위해 시내의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절름발이 소년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아 주기를 호소했습니다. 의사는 감동하여 즉시 그 아이를 무료로 고쳐 주겠다고 승낙했습니다. 수술을 한 후 열심히 걷는 법을 훈련하고 가르쳤습니다. 똘똘하게 보이는 아이는 성한 몸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중년부인이 된 후생국 직원과 의사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일을 상기해 낸 의사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척 똑똑한 아이였는데 지금쯤 과학자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박사가 되었습니까?" 부인은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지금 사람을 죽인 죄로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 저는 그에게 걷는 법만을 가르치려고 애썼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돈을 주기 전에 돈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를 시켜서 지위만 높여 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한 교육보다는 바르게 살도록 먼저 교육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을 훈련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요즘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는 "너무 빨리 자라나는 아이들"의 저자 엘킨드 박사는 부모들의 잘못된 자녀교육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을 급행열차에 태워 너무 빨리 몰아댄다. 아이들은 좌절감과 실패의식 속에 살며 마음에 화를 품는다. 빨리 배우고 빨리 어른이 되게 하려는 부모의 성급함, 성공에 대한 기대와 재촉 등이 자녀들을 병들게
한다.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들은 결국 반항과 증오의 늪에서 허우적 거린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우리가 자녀교육에 있어 특히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너무 과잉 보호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홀로 서기 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낮은 울타리'에 나오는 두 나무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에게 똑같은 씨앗이 한 톨씩 주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정원에서 가장 토양이 좋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다른 사람은 거친 토양의 산자락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자신의 정원에 씨앗을 심은 사람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면 나무가 흔들리지 않게 자신이 잘 붙잡아주고 비가 많이 오면 그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위에 천막을 쳐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산에 그 씨앗을 심은 사람은 천막을 치거나 자신의 몸에 붙잡아 두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번씩 산에 올라갈 때면 그 나무를 쓰다듬어주며 "잘 자라다오, 나무야." 라고 속삭여 자신이 그 나무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 일깨워 주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정원에 있는 나무는 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지극히 작고 병약해진 반면 산에서 자란 나무는 그 넓은 숲에서 가장 크고 푸른빛을 띤 튼튼한 나무로 자라나 있었습니다.
주부 K씨는 지난 3년 동안 30분 단위로 치밀하게 짜여진 스케줄 수첩을 갖고 다녔습니다. 아들의 수능 뒷바라지를 위해서였습니다. 3년 동안 수학 영어 전문과외와 학원과외를 병행했고 논술 과학 컴퓨터를 따로 배우게 했습니다. 아이가 힘들까봐 그녀가 운전을 해 데려다 주고 데려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K씨는 내심 아들이 재수해주길 바랐지만 아들은 ‘더 이상 엄마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며 2지망에 합격한 대학교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아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해본 기억이 까마득할 정도로 소원해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매일 새벽 2∼3시쯤에 귀가하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낮잠을 자둬야 할 정도였습니다. 고분고분했던 아들이 옷을 골라주는 그녀에게 “이것까지 엄마 맘대로 하려고 하세요?”라고 말할 땐 배신감마저 느껴졌습니다. 고3 뒷바라지할 때보다 지금이 더 견디기 어렵다고 말하는 그녀는 누굴 위해서 그런 시간을 보냈는지 서럽기만 하다고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아들을 둔 가까운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이 경우 부모 자녀 관계가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요. 사실 한국에 이런 가정이 한두 가정이 아닐 것입니다. 보통 우리나라 어른들은 자녀가 부모를 가장 필요로 할 때인 영·유아기에는 자녀가 독립적이길 기대하며 허용적입니다. 반면 자녀가 독립적이고 싶어하는 청소년기가 되면 오히려 가까이 있고 싶어 해 부모 자녀 관계가 원만하기 힘듭니다. 심리학자들은 영·유아기에 수직적이던 부모 자녀 관계는 자녀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수평적인 관계’로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평적인 부모 자녀 관계란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신성으로 지어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내면에 소유하고 있는 고귀한 사실을 그대로 인정받을 때 사람은 변화되고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배웅할 때 손을 잡고 걸으면서 등을 만져주고 학교 이야기를 물으며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른다. 너는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란다. 엄마는 참으로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하고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면 이런 말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공부를 못해서 매를 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아인슈타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재능이 있다. 너는 반드시 훌륭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고 끊임없이 말하며 잠재력을 깨워서 천재로 만든 것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지식’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길 원하는가, ‘지혜’를 가르치는 부모가 되길 원하는가? 우리는 자녀에게 지혜를 심어주기보다 지식을 전하는 교육에 치중해온 것은 아닐까요. 물론 이 사회는 우등생이 성공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 없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생각이 분명한 아이가 생존력은 훨씬 강합니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질책하지 말고 “최선을 다했으면 괜찮아”하고 격려해주는 부모, 자녀가 책 옷 여행지 등을 선택할 때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녀들은 ‘정신의 지문’으로 영토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사막의 모래바람 속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낙타처럼 홀로 떠날 기회를 만들어 줍시다.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 위치한 몬트레이 마을은 오랫동안 펠리컨들의 천국이었다고 합니다. 어부들이 잡아 올린 물고기를 씻을 때 잔챙이는 모두 던져버렸는데 이것이 펠리컨들에게는 기가 막힌 간식거리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펠리컨들은 대단히 만족스러웠으며 날로 살이 찌고 한편으로는 게을러져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어부들이 던져버리던 그 잔챙이 고기들이 상업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자 펠리컨들이 주워 먹을만한 것이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펠리컨들은 스스로 먹이를 구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버려진 것만 찾아 다녔습니다. 결국 펠리컨들은 한두 마리씩 굶어죽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어부들은 여러 가지로 대책을 생각한 끝에 좀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으로부터 먹이를 스스로 잡을 줄 아는 펠리컨을 몇 마리 수입하여 풀어놓았습니다. 새로 온 이 펠리컨들이 굶어 죽어가던 친구들에게로 들어가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온 친구들이 능숙하게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그 굶주렸던 펠리컨들도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이 우리를 영적으로 먹여주는 데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스스로 말씀 속에서 영적 양식을 찾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통하여 영적으로 채움을 받는 것은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스스로, 또한 규칙적으로 말씀을 통해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채울 줄 아는 자들로 성장해 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르시고 그 제자들이 다른 제자를 낳고 그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를 낳아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를 원하건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유아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한 교회에서 그저 말씀 듣고, 배우기만을 하고 있습니다.(개 교회 주의 영향) 주님의 제자로 양육 받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인도자(목사)에게 받아먹기만을 하지말고, 훈련받은 교회를 떠나서 이제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어미 원숭이가 두 마리의 새끼를 키우면서 한 마리는 늘 품에 안고 다녔고 다른 한 마리는 소홀히 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던 새끼 원숭이는 혼자서 나무에 오르내리며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어느 날 다른 지역의 원숭이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어미 원숭이는 "편애하는 새끼"를 안고 이 나무 저 나무를 정신없이 다니며 싸웠습니다. 싸움이 끝난 후 어미 원숭이는 품에 있던 새끼는 숨막혀 죽었으나 다른 새끼는 혼자 힘으로 피해 살아난 것을 알았습니다. 과보호의 비극을 말해주는 이솝우화의 이야기입니다.
초, 중고등학교 다닐 때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과외 수업과 학원으로 길들어진 학생들은 대학교 이후에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을 잘 못하고, 스스로 혼자 연구하는 학문에 적응을 못한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 아들이 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을 낳고 보니 너무 귀하게 생각되어 좀 과보호를 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가 연필을 다 깎아주었습니다. 자칫하면 손이 베일 것을 염려하여 도와주었더니 중학교에 가서도 연필을 깎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둘째에게는 처음부터 칼을 주었습니다. 물론 몇 번 손을 베이기는 했지만 거듭 훈련하다보니 곧 잘 깎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들을 유학 보내면서까지 따라 가고 방을 얻어주는 등 지나치게 돌보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 정도로 자랐으면 기숙사에 들어가든 방을 얻든 내버려두는 것도 중요한 교육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보는 것이요, 둘째는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돌아보는 것은 아주 잘하는 데 내버려두는 교육은 영점입니다. 그저 싸고 돌아서 30세가 넘은 자식들도 홀로 서지 못하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비실거리는 못난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혼해서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가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소 안쓰럽고 나약해 보여도 과감하게 내버려두는 교육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한답시고 자동차 운전을 전혀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위험해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하고 어려워도 감당할 것은 감당해서 부딪쳐야 발전이 있지 않 습니까? 무사태평으로 만사를 안일하게만 보낸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그냥 두겠다고 하시는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독일의 정치적 통일과 제국 건설에 공적이 큰 "철의 제왕" 비스마르크의 청년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 봄날 친구와 함께 사냥을 나간 비스마르크는 갑자기 숲 속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가 보니 그 친구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해달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친구의 외침 앞에 이상하게도 비스마르크는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봐! 내가 자넬 구해줄 것 같나. 오산일세. 사실 난 자네를 겉으로만 친구로 대했을 뿐이지 오래 전부터 자넬 좋아하지 않았어. 기회가 없어 여지껏 살려두었지만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네"라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오랜 친구인 비스마르크로부터 도움은커녕 목숨까지 내주게 된 그 친구는 죽을힘을 다해 늪을 빠져 나왔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숨을 헐떡이는 친구를 힘껏 껴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평소에 자네가 너무 남에게 의지하는 생활습관을 갖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차에 이 기회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네"
우리는 공동사회든 이익사회든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유난히 남을 의지하는 습성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임과 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식시켜 주어야겠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주위에 널려 있는 나쁜 환경에 대해서 노심초사합니다. 제발 우리 아이만큼은 디스코장이다, 미팅이다, 술과 담배 등으로부터 오염되지 않고 순결하게 자라주기를 바랍니다. 그 바램의 정도가 지나치다보면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성은 맹자 시대부터 강조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등교 길에 있는 장애물을 치웠다고는 해도 우리 자녀들이 다른 정보매체를 통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정보까지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친구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경험들을 끊임없이 듣고 있는데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리라는 생각은 너무나 안이한 생각입니다. 이젠 우리의 부모들이 먼저 좀 더 대담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의 앞길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기에만 힘쓰지 말고 적당한 장애물을 그대로 두어서 자녀로 하여금 그 장애물을 통과하여 역경을 이기고 견디어 내는 훈련을 마다하지 않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비닐 하우스에서 자라는 식물은 그 안에서는 잘 자라나 어느 날 그 비닐 휘장이 걷어지면 얼마 못 가서 죽어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인생에 죽는 날까지 비닐을 쳐주어 보호해 주는 동반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부모는 자녀에게서 물러나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고 자녀는 들판에 홀로 서야 합니다. 자녀가 말씀 안에서 스스로 굳게 설 수 있도록 부모는 양육해야 합니다.(딤후3:1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슬기로운 부모, 복된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 기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주님, 오늘도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사랑하고 주님 말씀으로 교훈하며 자녀들을 너무 과잉보호하지 말고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능력과 지혜도 가르치게 하소서. 그리고 자녀들에게 지식과 재능보다 마땅히 행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앉은뱅이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화되고 날로 날로 성장하는 믿음의 가정과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태 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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