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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옥에서 온 메시지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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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설교내용

  오래 전에 부산에 있는 모 병원에 성경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직원들과 간호사, 의사들을 위주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지옥과 천국이 있습니까?” 저가 반문을 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답변하는 말이 “제가 성경을 읽어보니까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를 질문하는 그 자체가 대단히 소망스러운 일이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다 믿어야 한다. 천국만 믿고 지옥은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불안전한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동시에 믿어야 천국에 가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라고 설명해 준 바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의식을 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비록 지옥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도 “너 지옥 갈 사람이다”라고 욕을 하면 버럭 화를 냅니다. 지옥은 구약에서는 ‘스올’이라는 말로, 신약에서는 ‘하데스’라는 말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음부, 무저갱, 불타는 곳, 고통스러운 곳, 더러운 곳 등등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8절 ‘믿지 않는 자’ ‘우상숭배 자’ ‘살인 자’ ‘술객들’, 베드로후서 2장 4절 ‘범죄한 천사’, 요한계시록 14장 11절 ‘짐승의 표를 받은 자’ 19장 20절, ‘거짓선지자’, 마태복음 10장 15절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형태가 다르고 질도 다릅니다만 한 가지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시간성입니다. 천국도 영원하고 지옥도 영원합니다.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동시에 영원한 곳입니다.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메시지를 우리 앞에 비유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매우 특이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요긴한 교훈이 됩니다.
  우선 부자와 거지가 다 죽어서 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한 사람은 지옥에 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은 동일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황금 관에 들어갔다 해서 더 편안하고, 호화무덤에 묻혔다고 해서 더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동일합니다. 부자와 거지가 다 죽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죽음이 있습니다. 사고로, 병고로, 혹은 예기치 못한 전혀 뜻밖의 죽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매일 헤드라인 뉴스에 대형사고가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부자는 아주 죽기 싫은 사람입니다.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는 부자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아주 죽기 아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평생 일궈놓은 살림, 평생 세상 것을 위해서 살다가 그것을 두고 간다는 건 상상을 못합니다.

  ‘어떤 인생은 화장실에 집착하다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화적인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셋방을 사는데 제일 고통을 받는 게 화장실 문제입니다. 화장실이 밖에 떨어져 있는데 이 화장실 때문에 너무 가족들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실내에 화장실 있는 집에 살아 보았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셋집이지만 실내에 화장실 있는 집을 구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노력을 해서 22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소원성취된 것처럼 좋았는데 어느 동창생 집에 가보니까 화장실이 두 개가 있거든요. ‘야, 참 부럽다. 안방에도 화장실이 있으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을 기어코 사야지’ 그래서 또 노력을 해서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을 샀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개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또 돈을 벌어서 화장실 세 개 있는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집에 유명한 그림을 하나 걸려고 못질을 하다가 발판이 잘못되어 뒤로 넘어져서 뇌진탕을 일으켰습니다. 그 길로 병원에서 6개월 이상 앓다가 죽었답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 ‘화장실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웃나라 중국은 1억이라는 인구가 귀족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3-15억의 인구 가운데 ·1억이 귀족들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부를 가지고 살고 있는데 이 1억의 귀족들이 소비하는 명품소비가 가히 상상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부자들이 자랑하고 큰소리치고 해도 지금까지 상류층이 100만명 이상 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상류층은 100만명 이하입니다. 중산층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까지 다 해도 20%니, 30%니 하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수치입니다.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100만명도 안됩니다. 그런데 중국은 1억이 상류층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으려 한다면 억울할 것입니다. 평생 이루고 싶은 것 하나 이루어 놓고 ‘이게 전부다’라고 붙잡고 있는 그 사람들이 그걸 놓고 죽으려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부자도 거지도 다 죽습니다. 본문이 그 메시지를 우리 앞에 주고 있습니다.

  죽음 후의 두 길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입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대기실이 없습니다. 완충지역이 없습니다. 반드시 인간은 죽어서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그 두 길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중립지역이 없습니다. 이 부자가 지옥에 갔는데 지옥이 어떤 곳인가? 오늘 본문에 이 부자가 지옥을 간증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음부에서 고통 중에” 지옥은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지옥의 고통은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입니다. 세세토록 당하는 고통입니다. 끝나는 고통이 아닙니다. 세세토록 당해야 될 고통입니다. “밤낮 고난을 받으리라” 밤낮이란 말은 순간순간마다 최절정의 고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고통, 최절정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옥의 고통입니다. 여러분은 아프던지, 다쳐서 고통스러운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어느 정도 아팠습니까? 정말 아픈 고통은 아프다고 소리도 못낸다고 합니다.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면서도 순간순간 최절정의 고난을 겪어야 하는 무서운 고통입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는 곳입니다. 이 불꽃은 요한계시록 19장 20절에 보니까 유황불이었습니다. 유황불 못에 던지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유황불은 가장 강렬한 불입니다. 유황불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독이 있는 불입니다. 독가스 불입니다. 이런 지옥의 불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곳이 지옥이요 지옥에 간 부자의 신세입니다.

  고통 중에 제일 힘드는 고통은 내일이 없는 고통입니다. 희망이 없는 고통은 아주 견디기 어렵습니다. 수술 받고 마취가 깨어나면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희망이 있습니다. 퇴원할 기대가 있습니다. 잠시 후에 건강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는 내일이 있기 때문에 수술 후의 고통은 견딜만 합니다. 여러분이 현재 사업의 어떤 어려움, 신앙생활에 어떤 고통이 있나요? 소망이 있다면 견딜만 합니다. 내일이 있는 고통은 견디어야 합니다.

  한국동란 때 있었던 일화 중에 미군병사가 압록강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죽어갑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해야 하는데 이 전우를 두고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퇴를 해야 됩니다. 죽어가는 전우를 보고 물었습니다. “자네. 소원이 뭔가? 내가 가족에게 전해줄 테니까 소원을 말하라.” 그때 남긴 미군병사의 유명한 말 한마디 “Give me tomorrow" ‘내일을 내게 주시오.’ 이 병사는 내일이 그리웠습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자기의 죽음을 두고 그 말을 한 것입니다. 내게 다른 소원은 없다, 내일이 내 소원인데 내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에 가는 이 결정은 현관에 가서 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현관에 가서 수속 밟고, 지옥현관에 가서 수속 밟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살았을 때에 결정되는 인생관의 선택입니다. 이 땅위에 살아있을 때에, 천국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지옥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죽음 배후에는 천국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바로 살기 위해서 고민하고 두려워해야 됩니다. 바로 못 사는 것을 겁내야 됩니다. 죽는 것을 겁내지 마십시오. 성도의 죽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천국을 가는 죽음인데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우리의 생명과 죽음은 주권자 여호와의 손에 맡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살기 위해 고민하십시오. 바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십시오. 바로 살지 못하는 일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천국에 이르는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은 절대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천국이 보장되는 절대적인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나 믿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영생이 되는 생명입니다. 그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 천국은 보장되는 것입니다.

  값지게 살아야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 말은 세월을 속량하라, 돈으로 사라는 말입니다. 저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묵상해 보니까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장사꾼입니다. 그 분은 무엇까지 파시느냐 하면 시간까지 파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신 시간 값을 냈나요? 우리 하나님은 시간까지 계산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컴퓨터에는 우리의 시간 값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시간 값을 내놔 라고 하실 때가 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 값을 지불하고 시간을 쓰라는 말입니다. 아주 비정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들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의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헛되이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자살을 한 어떤 사람이 남긴 일기에는 자살을 위해 그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자살하기 위해서 그는 치밀하게 자살을 설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범죄입니다. 자살을 충동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사탄을 찬양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쾌락을 충동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 집착하면 사탄을 숭배합니다. 쾌락에 빠집니다. 마약에 빠집니다. 성가대가 찬송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 절망을 노래하고 쾌락을 노래하고 사탄을 노래하고 자살을 충동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입니다. 자기 생명을 죽이기 위해 계획하는 것은 남의 생명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 살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죽이는 일을 우리가 계획하고 내가 실행하는 것은 무서운 범죄행위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죽이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이 천국과 지옥의 길이 살아생전에 선택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바로 사셔야 합니다.

  A. 릴렌드 스텐포드 라는 사람은 미국의 상원의원입니다. 그리고 켈리포니아의 어마어마한 부호입니다. 이 사람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에게 아주 총명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인데 갑자기 고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버지 스텐포드는 절망합니다. 그 아들에게 너무나 큰 기대를 가졌고 모든 사람이 그 아들을 부러워했는데 아들의 사고로 아버지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말을 하면 그는 말합니다. “나는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죽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현몽을 합니다. “아버지, 이 세상에 아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젊은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저들을 사랑해 주십시오.” 이 말을 남기고 아들은 사라졌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스텐포드는 아들이 전해 준 그 말씀 앞에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아, 아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다고? 이 세상의 젊은이들을 사랑해 주라고? 이 세상의 젊은이들이 다 내 아들이구나’ 죽은 아들의 현몽에 따라 스텐포드는 재산을 기증하여 오늘날 세계명문대학 중의 명문대학인 스텐포드대학을 설립합니다. 저가 81년도에 미국에 갔을 때만 해도 미국의 6대 대학에 스텐포드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스텐포드가 굉장히 발전했습니다. 실리콘벨리와 함께 IT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미국의 10대 대학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우리 젊은이들,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을 스텐포드에 보낼 비전과 꿈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이번에 민족사관학교 출신 여학생이 미국에 최 일류대학에 응시를 했는데 8개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선택은 스텐포드로 하였습니다. 그만큼 스텐포드가 유명한 대학입니다. 스텐포드는 나머지 유산도 다 대학에 기증하고 갔습니다.

  영혼구령의 집착

  여러분, 살았을 때에 바로 사는 것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살았을 때에 바로 못 살고 찌꺼기 같은 재물을 남겨놓고 자손들 싸움 붙이는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이 지옥에 간 부자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나사로를 시켜 물 한 방울 갖다 달라는 그 부탁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할 수 없다고 거절할 때에 이 부자가 어떤 애걸을 합니까?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방법은 틀렸습니다. 전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지금 절박합니다. 자기가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에 살아있는 다섯 형제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 다섯 형제 저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내가 있는 이 불꽃에 오지 않도록 전도해 주십시오.” 그 이야기입니다. 이게 지옥에서 온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말은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 주변에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과 전도의 열정은 오늘 지옥에서 보내오는 이 부자의 메시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다섯 형제의 구원문제에 집착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 형제 다섯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어 전도하게 해 주십시오.”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전도운동에 죽은 자가 살아와서 전도하게 한 하나님의 역사가 없습니다. “이 땅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 이 말을 오늘 우리 현실로 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 믿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갔다고 해서 너희 형제들이 믿을 게 아니야 라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믿음은 죽은 자가 살아와서 전도해야 믿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성령께서 역사하여 믿게 하시므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꽃은 사람이 가꾸었습니다. 사람이 심고 사람이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꽃을 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합니다. 그러나 믿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도해야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복음만으로도 성령이 역사함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오는 토요일은 50, 40대 전도의 날입니다. 제가 담임목사로서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본 교회 50, 40대 성도들은 전부 총동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말입니다. 좋은 날씨입니다. 야외 나들이 다 조정하시기 바랍니다. 야외 나들이 계획, 주말나들이 계획 다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시간 값을 지불해야 됩니다. 세상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는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는 토요일에는 우리 하나님께 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주말시간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초청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꼭 초청하십시오. 다른 기도하지 말고 그 사람이 주말에 내 초청을 받을 수 없는 바쁜 일정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그 날의 잔치를 위해서 여러분이 내가 무엇을 봉사할 것인가, 내가 안내를 해볼까, 내가 무엇으로 전도잔치에 협조를 해볼까 그것을 고민해 보십시오. 그리고 토요일에 초청한 그 생명을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계속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주간은 실천하는 주간입니다. 전도대상자를 정하고 찾아가고 그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의 값을 지불하는 주간입니다. 영혼을 사야 됩니다. 그 날은 특별강사를 초빙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분들은 다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오실 때 40대, 50대 새가족을 모시고 온다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관심가지고, 모두가 행동하고, 모두가 이 전도잔치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기 바랍니다. 값을 지불하셔야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소한 것부터 관심가지고 전도에 참여하십시오. 그래야 전도에 열매가 될 줄로 믿습니다.

  맺는 말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 됩니까? 지옥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때문입니다. 불신형제가 지옥으로 오고 있는 그 안타까운 광경을 막아보려고 나사로를 보내어 내 있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하게 해 달라는 이 부자의 절박함, 이 호소는 땅위에 있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가족 중에, 우리 이웃 중에, 우리 친구 중에 지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전도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마귀를 한숨 쉬게 해야 합니다. 지옥을 텅텅 비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도의 열매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도의 열매가 있을 때 마귀가 한숨 쉬고 돌아가며, 지옥이 텅텅 비게 될 것입니다. 지옥에서 온 메시지, 이 한 마디는 지상의 교회가 언제나 새겨야 될 은사입니다.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나 있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 절박한 전도의 부탁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우리의 사명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시간의 값을 지불하고, 물질의 값을 지불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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